글: 축용(祝勇))
명신종(明神宗, 1563-1620), 즉 만력제는 만력14년(1586년)부터 황궁에서 한걸음도 나가지 않았고, 사망할 때까지 30여년간 조정을 돌보지 않았다. 만력제는 10세에 등극하였으니 명실상부한 소년천자이다. 이는 그가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세월을 그저 후궁에서 보냈다는 말이 된다. 명나라말기의 학자인 하윤이(夏允彛)는 "귀비가 총애를 얻은 때로부터, 황상은 점차 만사를 귀찮아 했고, 조회에 임하는 것이 드물어졌다"고 하였다. 확실히 이 황제가 가장 즐겼던 것은 후궁에서 취생몽사하면서 세월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가 가장 싫어한 것은 아마도 문관들의 고집센 얼굴을 보는 것이다. 재미없는 상소문때문에 스스로의 달콤한 꿈이 깨지는 것을 원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내각수보(內閣首輔), 즉 재상조차도 황제본인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대신들이 올린 글은 대부분 건드리지 않고 남겨둘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심지어 주요한 관직의 임명에 대하여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서로 품급이 다른 관복을 누가 입든 대동소이하고, 자기와는 상관없다는 것같았다. 명나라의 제도에 따르면, 고위직은 황제가 친히 임명하지 않으면 비워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정부의 많은 관직이 빈 채로 남아 있었다.
만력34년(1606년)에, 대학사 심리(沈鯉)가 황제에게 올린 글을 보면, 이부상서는 이미 3년간 비어있었고, 좌도어사도 역시 1년간 빈자리로 남아 있었다. 형부와 공부는 시랑 1명이 겸직하고 있고, 병부는 상서와 시랑이 모두 비어 있었다. 예부는 겨우 시랑 1명만 남아 있고, 호부에도 상서 1명밖에 없었다. 전체적으로 당상관 31자리 중에서 24자리가 비어 있었다. 만일 제대로 자기 직책을 수행하지 않는 관리를 제외한다면, 조정은 거의 아무도 정사를 돌보지 않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정부기구는 중국역사상에서도 아주 드문 경우이다. 조정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황제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만력제는 심지어 장엄한 국가제사행의식 생략했고, 비슷한 귀찮은 일들은 모두 관리들이 대행하게 하였다.
제국의 정치기구가 공전되자, 문관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최상부로 승진할 희망이 없어졌다. 이에 대하여 황제는 이미 습관이 된 듯했다. 만력제는 아무 생각이 없었고, 이런 복잡한 국면을 해결할 의지도 없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그저 회피하는 것이었다. 여색이외에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돈버는 것이었다. 즉, 자기가 살아있을 때, 자손(특히 그가 총애한 복왕)에게 자산을 넘겨주는 것이었고, 자기가 죽은 후에도 걱정없이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이란 것이 바라는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모든 노력의 결과는 전체 왕조, 특히 그의 자손들을 포함하여, 되돌아올 수 없는 깊은 수렁으로 빠지게 만들었다. 그가 아주 사랑했던 복왕 주상순은 여러해 후에, 낙양에서 이자성에 의하여 참수당한다.
만력41년(1613년) 9월의 어느 아침, 한 이민족여인이 튼튼한 말을 타고서, 만력제의 시야에 들어왔다. 무엇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광경에 황제는 질식할 것같았다. 미친듯한 말발굽은 그의 신경을 밟는 것같았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끼게 하였다. 말이 뛰자, 먼지가 일었고, 마치 구름처럼 말의 사방을 에워쌌다. 말은 멀리서 가까이 다가왔고, 그는 말탄 기수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도 전에, 그녀는 눈앞에 나타났고, 손에는 긴 창을 들고 그를 향하여 돌격해왔다. 그는 큰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자신이 용상에 누워 있고, 이마에는 식은 땀이 많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만력황제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허약해진 몸은 여기저기 아파왔다. 곁에 있는 환관은 그를 위하여 이마의 땀방울을 닦아 주었다. 그는 환관에게 명하여 대신들을 불러오라고 했다. 대신들에게 있어서 이렇게 황제를 대면하는 것은 드문 기회였다. 그들은 줄줄이 들어와서 용상아래에 무릎을 꿇었다. 황제는 그들에게 자기가 꾼 기괴한 꿈을 이야기 했다. 사관은 황제의 말에 따라, 이 꿈이야기는 <<명신종실록>>에 기재되어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400년후에도 그가 꾼 꿈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황제는 신하들에게 해몽을 해주기를 바랐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피휘를 할 필요가 없다. 무슨 뜻일까. 기탄없이 말해달라"
관리들은 금방 답을 내놓았다. 꿈속의 이민족여자가 말을 타고 창을 들고 있다는 것은 대명제국의 강산을 빼앗겠다는 뜻이라고.
만일 사서의 기재가 정확하다면, 우리는 놀라운 역사의 계시를 보게 된다. 명나라가 회복할 수 없는 수렁에 빠지려는 순간에 운명은 꿈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명나라의 주인에게 계시를 내린 것이다. 이는 위험의 근원이 어디인지, 도전자의 신분이 어떠한지도 알려준 것이다. 현재 우리는 관리들의 해몽이 그들의 해몽이론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시국분석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이 기회를 빌어 황제에게 권유하기 위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들이 꿈속의 이민족여자를 대명제국의 진정한 위협으로 보았고, 섬서에서 온 농민군이나 몽고고원의 철기군도 아니라고 보았다. 이것은 그들이 역사를 꿰뚫는 혜안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그저 역사의 우연인지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이 꿈은 의미심장하다. 역사는 어떤 때는 소설과도 같다. 그러나, 만력제는 관리들의 분석을 그다지 믿지 않았던 것같다. 이러한 계시도 그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상소문과 같이 보았던 것같다. 국면이 얼마나 엄중하건, 진언이 얼마나 비분강개하건, 모두 주색선단의 역량에 미치지 못했고, 황제로 하여금 그가 스스로 만든 환상의 만족에서 해탈하도록 하지 못했다.
만력44년(1616년) 누르하치가 허투하라에서 칸에 올랐을 때, 만력제가 3년전의 꿈을 기억해 냈는지는 모르겠다. 누르하치가 24세 되던 그 해(만력11년, 1583년)에 부친의 직위를 상속받아, 명나라에 의하여 건주좌위도지휘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후궁에 머물던 만력제는 이렇게 기억하기 어려운 이름은 생소했을 것이다. 만력제가 언제부터 누르하치의 이름을 기억하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요동변방의 부락수령이 그의 왕조에 감히 도전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2년후, 즉 만력46년(1618년), 4월 13일, 누르하치는 2만의 보병기병을 이끌고 대명왕조를 토벌하기 시작한다. 개시전에 <<칠대한>>을 써서 명나라를 토벌하는 선언문으로 삼고, 향을 태워 하늘에 고한다. 누르하치는 그의 팔기군을 두 길로 나누어 명나라를 공격한다. 좌익4기는 동주, 마근단을 공격하고, 누르하치가 친히 이끄는 우익4기는 요동의 주요도시인 무순성을 공격한다.
긴창을 든 백색의 외로운 빛이 밤에 빛난다. 다른 점이라면 창을 든 사람이 누르하치라는 것이고, 만력제의 꿈속에 나타난 이족여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장창이 휘둘러지면, 수천수만의 팔기기병이 밀물처럼 성벽으로 밀려갔다. 전쟁이 개시된 것이다. 모든 것은 만력제의 꿈속에 나타난 것과 같았다. 창을 든 여자는 말위에서 뛰어다녔다. 만력제가 꿈꾸었던 용상이 그의 목적지였다.
누르하치가 중국동북부에서 돌연 나타났지만, 만력의 고집을 꺽지는 못했다. 이미 발생한 사실에 대하여 황제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침중해서가 아니라 그가 냉막해서이다. 변방의 봉화도 그의 식어버린 열정을 되살리지 못했다. 연단로의 불꽃이 그의 얼굴에 비치고, 그에게 장생불사의 약속을 해준다고 생각할 때만이 만력은 약간의 흥분을 내비칠 뿐이었다.
만력47년(1619년) 9월, 이부상서 조환의 호소하에, 조정백관은 문화전앞에 줄줄이 무릎을 꿇고, 황제가 친히 조회에 참석하여 정사를 논의할 것을 기구한다. 이런 장면은 대단한 것이다. 이는 관방의 청원활동이고, 민간의 것은 아니다. 관료들이 이런 최후의 방식으로 황제에 항의를 표시한 것이다. 하루의 시간도 이들의 연약한 무릎으로서는 무척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나이들고 약한 관리들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이 정도만 해도 기적이다. 관리는 모두 모였다. 오로지 황제만 빠진 것이다. 황제는 부재로 그의 존재를 표현했다. 침묵으로 그의 권위를 나타냈다. 하루종일 황상은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았다. 항의하던 관리들도 진퇴양난에 빠진다. 그들은 스스로 일어나서 항의를 끝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할 수도 없었다. 이 문제에 있어서 무릎과 머리의 판단은 서로 달랐던 것이다. 황제와의 힘겨루기에서 관리들이 우위를 점할 수는 없다. 사태는 수습이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다. 황제는 대충 때가 된 것을 보고는 환관을 보내어서 문화문에서 성지를 낭독하게 한다: "모든 관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조회에 참석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그저 두 글자로 답했다: "면담(免談, 말을 꺼내지 마라)"
실망이 극에 달한 조환은 올린 글에서 황제에게 이렇게 물었다: "만일 어느 날 계문(북경서쪽)이 유린당하고, 철기가 경교(京郊)를 짓밟을 때도, 폐하께서는 여전히 깊은 궁궐에서 아무 걱정없이 베개를 높이 베고서, 병을 핑계로 해서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고집센 만력제는 관료들의 압력에도 전혀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그는 관리들을 더욱 미워했다. 만력48년(1620년), 그가 황제위에 있은지 48년이 지난 후, 만력황제는 평안하게 세상을 떠난다. 그는 그가 친히 설계에 참여한 정릉에 묻힌다. 효단황후와 효정황후 즉 공비 왕씨의 관 사이에 놓여진다. 만력의 손안에서 쇠퇴해진 명나ㅏ는 숭정과 같은 열심히 일하는 군주를 만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운명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24년후, 즉, 숭정17년 3월 19일(양력 1644년 4월 25일), 대명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는 매산 수황정에서 목을 매고 자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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