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기록

명청시대의 양주수마(揚州瘦馬)

중은우시 2007. 12. 25. 14:35

글: 단목요(端木搖)

 

양주수마(揚州瘦馬), 말 그대로 하면 양주(揚州)의 비쩍 마른 말이라는 듯인데, 사실 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양주수마"는 명청시기의 양주미녀(揚州美女)를 가리키는 말이다.

 

양주는 강회의 교통요충지로, 물길이 발달하였고, 교통이 편리하였다. 운하와 장강이 이 곳에서 교차하여, 양주의 독특한 온난하고 부드러운 특징을 낳았다. 명청시대에, 양주의 염업(鹽業, 소금업)은 조정의 주요한 경제명맥이었다. 양주는 양회(兩淮, 회남과 회북) 염상(鹽商)의 본거지였다.  양주의 염상은 아주 돈이 많았고, 많은 돈을 집안에 쌓아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많은 돈을 어떻게 써야할 지를 모를 정도였다. 의식주에 있어서 모두 최고를 맛보다보니 무엇을 하더라도 별로 신선한 감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이처럼 물질이 너무 풍족한 시대는 인간성이 심히 왜곡되고 변태적이 된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관념이 농후했던 봉건사회에서 상인은 "사민(四民)"의 말석을 차지하므로, 하급계층에 해당한다. 명청시기의 양주염상은 졸부의 집단이었다. 문화적인 수준은 그들이 급증하는 부를 따르지 못했다. 그들은 돈은 많이 벌었지만, 정신적인 의지처는 없었다. 모든 오락을 그들은 다 해보았다. 모든 것에 무료해지자 그들은 각양각색의 기괴한 짓들을 하게 된다.

 

여인에 대하여, 풍만한 전통적인 미녀는 더 이상 그들의 엽기적인 심리를 만족시킬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비쩍 마르고, 유약한 여자를 그들의 엽색목표로 삼게 되고, 날로 팽창하는 그들의 욕망을 만족시키고자 한다. 생리적인 욕망, 취약계층을 보호하려는 욕망, 호사를 누리고 전횡하며, 이름을 날리려는 욕망들을 말이다.

 

그리하여, 명나라때부터, 번화하고 태평스러웠던 양주성에서는 진루초관(秦樓楚館)과는 다른 교방(敎坊)이 나타나서, 전문적으로 젊은 여자를 교육시켜 부유한 상인들의 첩으로 보내게 된다. 양주성과 주변의 농촌에서 먹고살기 힘든 가난한 집안에서는 할 수 없이 자신들의 딸을 이곳에 팔아버리게 되는데, 청루(靑樓)에 파는 것과 차이가 없다. 차이가 있다면 조건이 괜찮으면, 부잣집의 작은마나님이 될 수 있다는 것뿐이다.

 

교방은 젊은 여자를 사와서, 그녀들을 교육시킨다. 교육방향은 부유한 상인들의 기괴하고 특이한 심미적인 취향을 만족시켜주는 것이다. 교방은 특별히 젊은 여인의 몸매에서는 비썩 마른 것을 아름답게 여겼다. 그리하여 이 곳에서 교육받은 여인들은 하나같이 날씬하고 말랐다. 그리하여 "양주수마"라는 칭호를 얻게 된 것이다.

 

몸매가 마르고 약하고 작은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양수수마의 일거일동, 한번 찡그림과 한번 웃음이 모두 염상들의 심미적인 취향에 부합해야 했다. 예를 들어, 길을 걸을 때는 가벼워야 하고 소리를 내서는 안된다. 눈빛은 정을 가득담아서 곁눈질로 보아야 한다는 것등이다. 이처럼 길러진 수마는 잘 팔렸고, 가격도 잘 받았다.

 

당시 양주성안에는 수백명의 가축판매와 마찬가지로 수마매매가 이루어졌다. 이들 중에 아파(牙婆)는 매파처럼 중매를 서는 사람을 말한다. 이들 뿐이 아니라 또한 장쾌()도 있었다. 장쾌는 원래 가축교역의 중간상인이다. 그들이 가축으로 돈을 벌지 못하는 경우에는 수마를 판매하는 사업을 했다. 그리고 이런 수마매매가 가격도 괜찮고 이윤도 풍성했다. 예를 들어 어느 부유한 상인이 수마를 사려고 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이 아파, 장쾌들은 상인들에게 똥파리처럼 달라붙어서 아무리 떼어내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고 거래를 성사시켰다.

 

번화한 양주성은 예비첩들의 집산지가 되었다. 대량의 "수마"들이 가혹한 교육훈련을 거친 후, 전국각지로 팔려갔다. 그리하여 전국에서 "양주로 가서 수마를 사자"는 분위기가 있었다. 바로 명청시기에 양주수마는 천하에 그 명성을 떨치게 된다. 소위 "수마"는 사실 팔려나가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는 예비첩들의 무리인 것이다.

 

양주수마는 역사상 "양주여성"에 대한 모욕적인 단어이다. 여성을 임의로 유린하고 망칠 수 있는데, 마치 약하고 작은 말한마리를 능욕하는 것과 같았다는 것이니, 양주여성에 있어서는 더할 수 없는 모욕이었다.

 

선천적인 조건에 따라 양주수마는 등급이 있었다.

 

청나라의 정요항이 지은 <<속금병매>>라는 책에는 "수마"에 대한 묘사가 있다.

 

1등자질의 여자아이는, "금(琴)을 타고, 퉁소(簫)를 불며, 시를 짓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바둑을 두며, 쌍육(雙六)을 할 줄 알고, 골패(骨牌)도 만지며, 여러가지 음교(淫巧)를 익히게 한다" 그리고 잘 화장하는 기교와 몸매훈련을 시키게 되는 것이다.

 

2등자질의 여자아이는 글을 가르치고, 곡도 연주할 수 있게 한다. 다만, 주요한 것은 재무회계인재로 키우는 것이다. 장부를 정리하고 장사일을 돕게 하여 상인의 보조역할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3등자질의 여자아이는 글을 가르치지 않고, 그저 여자들의 바느질, 재봉등을 가르치거나, 음식을 요리하고, 집안을 정리하는 일을 가르친다. 이리하여 훌륭한 주부로 기르는 것이다.

 

당연히 이처럼 힘들게 교육훈련시키는 것은 나중에 좋은 주인을 만나서 가격을 잘 쳐받기 위한 것이다.

 

'수마'의 매매과정은 마치 상품을 고르는 것처럼 이루어진다. 장대(張垈)가 지은 <<도암몽억(陶庵夢憶)>>은 이 과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수마의 집으로 가서, 좌정하면, 차를 내놓는다. 아파가 수마를 부축해서 나온다,

말하기를 "아가씨 손님에게 인사하세요" 하면, 절을 한다.

말하기를 "아가씨 위로 걸으가세요" 하면, 걸어간다.

말하기를 "아가씨 몸을 돌리세요"하면, 몸을 돌려서 바로 선다, 얼굴이 나타난다.

말하기를 "아가씨 손을 내놓으세요"하면, 소매를 떨치고 손을 내놓는다. 팔이 드러나고, 피부도 드러난다.

말하기를 "아가씨 상공을 보세요" 하면, 눈을 돌려 흘깃 쳐다본다. 눈이 드러난다.

말하기를 "아가씨, 몇살이지요?"하면, 몇살이라고 한다. 목소리가 드러난다.

말하기를 "아가씨 다시 걸으세요" 하면, 손으로 치마를 걷어올리고, 발이 드러난다.

발을 보는데는 방법이 있다. 문을 나설 때 치마폭이 먼저 소리가 나면 반드시 크고, 치마를 들어올렸을 때, 사람이 보이지 않는데, 발이 먼저 나타나면, 반드시 작다.

말하기를 "아가씨 돌아가세요" 하면, 한 사람이 들어오고, 한 사람이 나간다.

한 집에서 반드시 5,6명을 보는데, 모두 이러하다.

 

이 묘사는 아주 상세하고, 언어가 간략하지만 분명하다. 더 이상 수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멋진 극본이며, 화면이 생생하게 보는 것같다. 만일 희극으로 만든다면 바로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수마의 얼굴, 손, 팔, 피부, 눈, 목소리, 발등을 하나하나 보는 것이다. 이 약소한 여인의 옷만 벗기지 않을 뿐이다.

 

이 장면에서 무엇이 생각나는가? 티비에서 본 미인선발대회의 장면이 떠오르는가? 경마장에서 출마하기 위한 말들의 행진이 떠오르는가. 양주수마는 진정으로 매매대상으로 전락했고, "사람"의 존엄과 가치를 상실하였다.

 

모든 "수마"가 성공적으로 부자집에 시집갔던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남겨진 "수마"는 어쩔 수 없이 화류계로 들어간다. 진회하의 변에서 "양방(揚幇)"의 기녀들은 대다수가 "수마"출신이었다.

 

매일 저녁, 그녀들은 화장을 하고 골목길을 드나든다. 차루주관의 문앞에 있는 것을 "참관(站關)"이라고 한다. 달빛아래에 얼굴색이 창백하니 더이상 사람모양이 아니다. 이렇게 "참관"하는 가련한 수마들은 어떤 여인은 밤늦게까지 손님을 만나지 못해서 홀로 떠나야 한다.

 

부유한 상인이나 관리, 귀공자들에게 선택된 행운아인 '수마'들도 이때부터 반드시 행복하고 만족한 생활을 누린 것은 아니다.

 

다만, "수마를 길러내는" 인신매매꾼들은 아주 돈을 많이 벌었다. <<속금병매>>의 기재에 의하면, 1등의 "수마"는 1500냥이상의 은자에 팔 수 있었다고 한다. "춘풍십리양주로"에 노랫소리와 춤이 있고, 밤이 깊은 곳에 얼마나 많은 수마가 있었는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아마도, 양주수마의 이야기는 지역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히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강건성세(강희,건륭)때 발생했다. 그것도 가장 부유하다는 양주에서.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양주수마가 뭔지 모른다. 그저 아주 비썩 마른 말이 아닌가 생각할 뿐이다. 명나라말기에서 청나라초기에 이르는 진회팔절(秦淮八絶)은 후세인들이 모두 기억하고 있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겼다. 그러나, 양주수마의 먼지쌓인 피눈물의 역사, 처량하고 비참한 이야기는 우리들이 일찌감치 잊어버리고 말았다.

 

<<가이샤회고록>>에서는 일본 교토의 예기의 역사를 썼다. 양주수마는 그러나 일찌감치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그저 영화드라마의 소재가 될 뿐이다. 이는 번화하고 부유한 겉모습 아래에 일단의 굴욕의 쓴 역사가 있었고, 역사적으로 초개와 같이 약소하고 의지할 데없는 영혼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양주수마"가 역사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날을 기대한다. 그녀들의 마르고 작으며 힘없으나, 강인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우리 21세기의 여성들로 하여금 더욱 자강불식하도록 일깨워주면 좋겠다.

 

지금도 양주에서는 "처를 맞이한다"는 것의 구두어는 "취마(娶馬)" 혹은 "취마마(娶馬馬)"이다. 워내, 취마(말을 취하다)라는 것은 양주에서 유전되어온 수마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주 뿌리깊게 남아 있는 것이다. 이를 생각하면 더욱 처연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