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개주(李開周)
1. 피모옥(皮帽屋)
현재는 자가용을 가지는 것이 유행이지만, 원나라때는 말을 소유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자가용을 가지려면 차고가 있어야 되듯이, 말을 가지려면 마굿간이 필요하다. 원나라때의 마굿간은 다른 시대와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집의 바깥쪽에 만들었다. 마굿간을 바깥에 두다보니, 마부(馬夫)도 자연히 바깥에서 거주한다. 어떤 마부는 마굿간에서 그냥 자지만, 운이 좋은 사람은 주인이 마굿간 옆에 새로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을 지어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피모옥이다. 피모옥은 작은 단칸집인데, 몽고파오(蒙古包)의 형태를 본떠서 만들었다. 띠풀(茅草), 대나무(竹木) 혹은 소가죽(牛皮)으로 만드는데 출구를 하나 만들어두고, 안에는 침대, 마통(馬桶, 변기)이 있었고, 부뚜막은 없었다. 일반적으로 식사시에는 마부도 주인집에 들어가서 같이 식사하였으므로 별도로 부뚜막을 둘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2. 지옥(地屋)
내몽고 정람기의 경내에는 상도(上都)가 있었다. 원나라때 상도에 사는 주민들의 주택중 1/5이상이 토굴식이었다. 당시에는 "지옥"이라고 불렀다. 지옥은 1장정도 깊이였고, 동그랗게 혹은 네모나게 입구를 팠다. 지붕에는 나무판을 얹고 나무판 위에는 띠풀을 깔고 띠풀 위에는 다시 흙을 덮었다. 그리고 그 흙위에는 곡물을 심기도 했다. 집안에는 흙구들(土炕)이 있고, 부뚜막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화장실은 없었다. 옥상은 지면과 편평했고, 중간에 구멍을 뚫었는데, 연기가 잘 빠져나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3. 계관방사(係官房舍)
원나라는 금나라와 남송을 정복한 후, 정부에서 금나라 중도, 남송의 임안을 접수한 후 관청소유주택을 인수받았다. 나중에 백련교를 평정한 후에는 백련교의 향당(香堂)도 접수했다. 이런 부동산은 원나라 정부소유가 되었는데, "계관방사"라고 불렀다. 대부분 공무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공무원의 인원수가 많고, 계관방사의 수량은 매우 적다보니, 최대한도로 모든 공무원들에게 거주할 집을 마련해주기 위하여, 원나라정부는 계관방사를 여러개의 작은 집으로 분할하여, 직급에 따라 분배했다. 고급공무원은 좀 많이 나눠받고, 하급공무원은 좀 적게 나눠받았다. 그리고 장막을 가운데 쳐서 집을 구분했다.
4. 사택추옥(私宅僦屋)
"추(僦)"는 빌린다는 뜻이다. 사택추옥이라는 것은 사인이 개발하여 공개적으로 임대 또는 판매하는 주택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도 소형주택에 포함시킨 이유는 원나라때 몇 개의 주요한 대도시에서 사인들이 지어서 임대나 판매하는 주택은 소형주택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원나라사람들이 쓴 글을 보면 원나라의 대도, 항주, 천주, 변량등 몇 개 대도시에는 모두 협소하고 어두운 추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주택은 점유면적도 적고, 건축가격도 싸므로, 임대료를 낮게 할 수가 있어서, 수입이 적은 군인들이나 소상인들이 임차하여 거주하기 좋았고, 문인들과 상인들이 단기간 거주하는데도 적당했다.
원나라의 전성기에는 대도시에서 이미 토지부족현상이 나타났다. 관한경(關漢卿)의 <<[남여]일지화.항주경>>을 보면, "만여개의 누각이 높고 낮게 서있는데, 조그만치의 놀고 있는 땅도 없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항주의 토지가 이미 부족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원전장>> 권19에는 "현재 백가지 물건이 모두 가격이 뛰었고, 집을 매매하는 가격도 몇 배 뛰었다"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북경의 집값과 물가가 비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토지가격이 비싸고 집값이 오르면, 소형주택을 개발하게 되는 것이 역사의 필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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