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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원)

몽골족들이 건립한 역사상의 국가들

by 중은우시 2007. 7. 11.

 

 

작자: 미상

 

몽골족들이 얼마나 많은 국가를 세웠는가? 몽골인들은 13세기에 굴기하여, 사상유례없는 몽골제국을 건립하였으나, 1634년에 이르러 몽골제국(북원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린단칸(林丹汗)이 청나라와의 전쟁을 벌이는데, 몽골족의 커얼친등의 다른 부들이 만주족에 결탁함에 따라, 린단칸은 중과부적이 되어, 감숙성으로 도망친다. 여기서 카르카와 오이라트부등과 만나서 반격을 하고자 하나, 불행히도 천화(天花, 천연두)로 죽고만다. 이 기회에 만주족은 몽골을 점령하니, 1635년에 몽골제국이 멸망한다.

 

어떤 사람은 원나라가 멸망한 것을 몽골제국의 멸망으로 보기도 한다. 많은 사람은 몽골제국, 원나라 그리고 몽골의 4칸국은 알지만 그 이외는 잘 모른다. 사실, 몽골족들은 역사상 그보다 훨씬 많은 국가를 건립했었다.

 

1. Khamag Mongol Uls (대몽골국, 10세기말 - 1161년)

 

하이두(海都)는 징기스칸 가족중에서 처음으로 한(汗)에 오른 인물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가한(可汗, Khan), 즉 황제로 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이두의 가한의 호칭은 분명히 나중에 추증된 것이다. 징기스칸가족은 하이두시기로부터 명실상부한 몽골의 황금가족이 된다. 11세기, 하이두는 차라르(札剌兒)부를 무너뜨림으로써 이름을 얻고, 하이두한(海都汗)으로 모셔진다. 이것이 나중의 몽골제국의 원형이다.

 

하이두가 건립한 정권은 그의 증손자인 허부르한(合不勒汗)에 이르러 이미 Khamag Mongol Uls(대몽골국)이라고 불리워진다. 허부르한은 강대한 여진족들과 맞서서 자신의 정권을 지켰다. 금나라는 1135-1139년 및 1147년에 허부르정권을 정복하기 위한 전쟁을 시작했다. 금나라의 장수인 호사호(胡沙虎)는 초원으로 깊이 들어왔다가 패전을 겪는다. 금나라는 부득이하게 1147년 하부르의 넷째아들인 후투라한(忽圖剌汗)에게 강화를 요청한다. 그리고 할 수 없이 변방지역의 몇개 주를 몽골에 넘겨준다. 그러나, 허부르한의 후계자인 얜바하이한(俺巴孩汗)시기에 이르러, 앤바하이한이 부주의하여 타타르족에게 붙잡혀 금나라에 인도되는 일이 벌어진다. 금나라사람들은 그를 목려(木驢)에 올려놓고 못을 박아 죽여버린다. 새로운 칸인 후투라한은 복수를 위하여, 금나라를 공격한다. 금나라황제는 1161년 타타르와 연합하여 몽골을 공격하고, 처음으로 몽골왕권을 무너뜨리게 된다. 몽골은 칸이 없게 되었다. 예수가이(也速該, Yesuges, 테무진의 아버지)는 그저 몽골의 수령일 뿐이었다. 그러나, 28년이 지난 후 1189년이 되어, 나이 28세의 테무진(鐵木眞)이 다시 몽골정권을 재건립한다. 사람들은 테무진이 몽골초원을 통일하자 징기스칸으로 존칭한다. 실제로 1189년에 테무진이 건립한 몽골정권이 성립되자 이미 테무진은 징기스칸으로 불리웠다.

 

2. 대몽골제국(1206-1635)

 

여러차례의 전쟁을 거쳐, 징기스칸은 나이만, 타타르, 크리에(克烈)...등 여러 강대한 적수를 물리치고 마침내 1206년 몽골제국을 건립한다.

1205년, 1207년 그리고 1209년 징기스칸은 세번에 걸쳐 서하(西夏)를 공격한다. 서하는 어쩔 수 없이 여자를 바치고 강화를 요청한다.

1211년, 다시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금나라를 친다.

1215년, 몽골군은 금나라수도 중도(북경)를 점령한다. 요서지방에서 금나라수비군을 전멸시키고, 금나라의 북경(지금의 내몽고 영성의 서쪽)을 점령한다.

1218년, 대장 제베를 보내어 서요(西遼, 카라키타이)를 점령한다.

1219년, 징기스칸은 친히 아들 주치, 차카타이, 오코타이, 톨루이와 대장 수부타이, 제베를 데리고 호라즘제국(중문으로 花剌子模)에 대한 전쟁을 일으킨다. 몇개의 부대로 나누어 진공하고 전략요충지를 포위하며 각개격파한다. 전쟁은 몽골측이 주도했다. 1219년, 몽골군은 와다라성(지금의 카자흐스탄경내)을 공격하여, 다음 해 점령한다.

1220년, 징기스칸은 부하라를 점령하고, 호라즘제국의 새로운 수도 사마르칸트(지금의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를 점령한다. 주치, 오고타이, 차카타이는 병사를 이끌고 호라즘제국의 수도인 옥룡걸적(玉龍杰赤, 지금의 우즈베키스칸의 우르겐트)를 점령한다. 톨루이의 군대는 후라산(Khurasan)지구로 진입한다. 제베, 수부타이는 징기스칸의 명을 받들어 호라즘의 통치자 무하마드 슐탄을 추격한다. 그는 카스피해의 외딴 섬까지 도망쳐 병으로 죽는다. 제베, 수부타이는 군대를 이끌고 계속 서진하여 크림반도에 이른다.

1221년, 톨루이는 후라산지역을 모두 점령한다. 징기스칸은 마지막 슐탄인 자란틴(札丁)을 추격하여 인더스강에 이르나, 붙잡지 못하고 귀환함.

1222년, 점령지구에 다루가치를 두어 통치함.

1223년, 사마르칸트로 돌아와서 겨울을 남. 다음해에 귀국함.

1226년, 징기스칸이 서하를 공격함. 서하국이 멸망함.

1227년 7월 12일, 징기스칸이 병사함. 서하국이 망함. 임종전에 송나라와 연합하여 금나라를 무너뜨리는 전략을 제안함. 대황후 보르테는 네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이 주치로 킵차크한국의 시조임, 둘째아들은 차카타이로 차카타이한국의 시조임, 셋째아들은 오고타이로 제2대칸(원나라 태종)임, 넷째아들 톨루이는 나중에 원나라와 일한국의 황실이 됨. 후란황후는 아들 1명을 낳았는데, 고리젠(闊列堅)인데, 그 후예는 원나라때 하간왕(河間王)에 봉해진다.

1234년, 몽골황제 오고타이는 제왕대신회의를 개최하여, 징기스칸의 사업을 계승하기로 하고, 계속 서쪽으로 진격한다. 오고타이는 각각 페르시아, �차크, 부리아르(不里阿耳)를 공격하여, 기본적으로 페르시아 전역을 점령한다.

1235년, �차크를 공격하던 부대가 저항에 부닥치자, 오고타이는 대서정벌군을 증원한다. 주치의 아들인 바투, 차카타이의 아들인 바이타르, 오고타이의 아들인 구육, 톨루이의 아들인 몽케 및 여러 왕, 나얀, 공주부마의 장남등을 이번 원정에 참전시킨다. 바투가 총지휘관이 된다.

1236년, 군대는 볼가강 중류에 있는 부리아르에 도악한다. 대장인 수부타이는 부리아르를 점령한다.

1237년, 몽골군은 �차크를 공격한다. 몽케는 그들의 대장인 츠만을 죽여버린다. 카스피해 이북지구는 몽골군에 점령된다. 바투는 군대를 이끌고 러시아를 대거 침략한다. 그해 말에 모스크바등 14개도시를 점령한다.

1238년 2월 블라디미르를 함락시키고, 다음 해에는 키에프를 함락시킨다.

1240년, 공골군은 보레르(폴란드), 마자르(헝가리)등을 점령한다.

1241년 4월, 몽골은 크라코프, 리게니차등의 성을 공격하고 모라비아(Moravia)등지를 약탈한다. 바투는 3로의 부대를 이끌고 마자르군을 대파한다. 국왕은 도망친다. 몽골군대는 아드리아해 동쪽 해안과 남유럽 각지를 공략한다. 이해 말에, 오고타이가 사망한 소식이 군대에 전해지고, 바투는 군대를 발칸에서 볼가강유역으로 회군시킨다. 바투는 사라(볼가강유역)를 수도로 �차크한국을 세운다.

 

3. 원(元, 1271-1368)

 

1271년, 징기스칸의 손자인 쿠빌라이는 대도(북경)에 대원왕조를 건립한다. 이로부터 북경은 중국의 이후 700여년간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 된다. 1276년, 원나라는 남송의 도성인 임안(항주)를 점령하여 전중국을 차지하게 된다.

 

이후 원나라는 두번 일본정멸, 두번 안남(월남)정벌, 두번 버마정벌을 하고, 고려, 버마, 점성(캄보디아), 안남(월남)등지를 원나라의 속국으로 만든다.

 

원나라의 강역은 서아시아에 이르러, 유럽과 중국의 교류가 빈번해졌다. 기술교류도 신속해졌다. 졍제의 발달로 수공업과 상업이 발전하고, 원나라때는 중국의 면화가 아주 보편화되어, 방직업이 성행한다. 이외에 조운, 해운의 발달과 지폐가 유통되어, 상업은 원나라를 아주 번성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원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로 성장한다. 원나라세조때, 베니스 상인인 마르코 폴로는 중국에 왔다가 여행기를 남긴다. 거기에 원나라의 번성한 모습을 잘 그리고 있다.

 

1351년에는 유복통이 홍건적의 난을 일으키면서 전중국을 석권한다. 기의군(起義軍) 중에서 주원장은 세력을 확충하여 6,7년내에 진우량, 장사성등의 부대를 물리치고, 1368년 원나라의 대도를 핍박하여, 몽골통치자를 중원에서 몰아낸다. 이로써 원나라는 멸망한다. 그러나, 북원(몽골제국)은 1634년까지 계속 몽골지역에 존속한다.

 

4. �차크한국(金帳汗國, 1243-1502)

 

징기스칸의 장남 주치는 에르치스강 서쪽, 호라즘북쪽을 봉지로 받았다. 1243년, 바투가 서방정벌을 한 후에 볼가강가에 이르러 동으로 에르치스강, 서로는 러시아, 남으로 발카시호수, 카스피해, 흑해에 이르고, 북으로는 북극권부근에 이르는 광대한 �차크한국을 건설한다. 수로로 함은 것은 볼가강 하류의 바투사라(현재의 아스트라칸 부근)이다. 한국내에는 바투의 13명의 형제 및 그 후예들이 각각의 세습봉지를 가지고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몽구의 군사귀족은 만호, 천호, 백호, 십호를 행정단위로 하는데, 이는 군사단위이기도 했다. 1255년에 바투는 사망한다.

 

아들인 월즉백(月卽伯)이 즉위하면서, �차크한국은 전성기를 맞이한다. 수도를 베르크사라(지금의 볼가그라드부근)으로 옮기면서, 일한국, 이집트등과 교통하고, 대외무역이 흥성하였다. 이슬람교는 볼가강하류에 널리 퍼져 있었고, 이후 �차크한국도 이슬람교를 신봉하며, 일부 몽고유목민들도 이슬람화되었다.

 

14세기후기, 몽고귀족은 대외적인 전쟁을 계속 일으키게 되면서, 내부의 투쟁도 계속되었다. 이리하여 한국은 쇠락하고 와해되었다. 1420년대초, �차크한국은 강토가 얼마 남지 않았으며 "대장한국(大帳汗國)"으로 불린다. 대장한국은 1502년에 멸망한다.

 

5. 백장한국(白帳汗國)

 

바투의 형인 오르다 및 그의 후예들은 지금의 서시베리아, 카자흐스탄을 점거하고 백장한국을 형성한다.

1390년대후반부터 백장한국의 나얀인 예디구는 허수아비 칸을 조종하여 대부분의 �차크한국영토를 장악해버린다. 그는 1399년에 리투아니아를 물리치고, 리투아니아의 확장을 저지한다. 1408년, 오르스로 진공하여 많은 도시를 멸망시킨다. 그러나 모스크바는 함락시키지 못했다. 1410-1412년 내분시에 그는 권력을 잃고 도망친다.

 

6. 청장한국(靑帳汗國)

 

몽골의 제2차 서방정벌후, 바투의 동생인 시반(昔班)은 서방정벌의 주요한 장수였다. 헝가리를 정복하는데 공을 세웠다. 바투는 남부 우랄을 그에게 준다. 청장한국을 건설한다.

 

7. 오고타이한국(1225-1310)

 

징기스칸의 셋째아들인 오고타이의 봉지는 에르치스강상류와 발카시호수의 동쪽 지역이다. 수도는 예미리(葉密立, 지금의 신강 액민현)에 두었다.

 

1229년, 오고타이가 황제위를 승계한 후, 봉지를 아들인 구육에게 주었다. 1251년, 몽케가 칸에 오른 후 오고타이계의 여러 왕들은 봉지를 분할하여 각각 왕에 봉해진다. 이리하여 기세를 잃게 된다. 1260년, 쿠빌라이가 황제에 오른 후, 하이두는 태종의 적손이 황제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리부거, 나이얀, 두와와 연합하여 황제위를 다투게 된다. 1301년(대덕5년) 패하여 사망한다. 이로써 오고타이한국의 세력은 쇠퇴한다.

 

1310년 오고타이한국의 하이두의 아들인 차파르가 차카타이의 후예인 체보에게 패하면서 차카타이한국에 병합되어 버린다.

 

8. 차카타이한국(1227-1369)

 

징기스칸의 둘째아들인 차카타이가 세웠다. 전성기에 강역은 동으로 투푸판, 나박, 서로는 아무르강, 북으로 타르바하타이산, 남으로는 힌두쿠시산을 넘었다.

1314년, 차카타이한국으니 동, 서 양부로 분열된다. 동부는 아리마리를 중심으로 하여, 카스, 투루판일대를 포함하고, 서부는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하중지구를 통치했다.

1369년 서차카타이한국의 투헤루 테무르가 죽은 후 얼마되지 않아, 자신의 장군인 테무르에게 정권을 탈취당한다.

 

9. 동차카타이한국(1348-1514)

 

1348년, 투헤루테무르가 악소에서 칸으로 오른다. 역사상 투헤루테무르가 통치한 지역은 동차카타이한국으로 불리웠다. 한때 서차카타이한국과 병립했다. 1389년, 투헤루테무르의 어린 아들인 헤디르후제가 칸에 오르고, 수도를 베스파리(別失八里)로 정했다. 1418년, 헤디르후제의 손자인 아이스칸이 다시 국도를 이리바리(亦力把里, 지금의 이녕시)로 옮겼다. 그래서 동차카타이한국은 "별실팔리국" 또는 "역력파리국"이라고도 불렀다. 동차카타이한국은 1348년에 건립되어 8대, 15명의 칸이 통치했고, 1514년에 예르캉한국(葉爾羌汗國)에 망한다.

 

10. 예리캉한국(葉爾羌汗國, 1514-1680)

 

1514년, 동차카타이한국의 투헤루테무르칸의 후예인 사이더칸이 예리캉한국을 건설하고, 수도를 예리캉(지금의 莎車)에 정한다. 서역의 대부분지역을 통할한다. 1680년에 갈단에게 패배하여, 갈단(爾丹)에 병합된다.

 

11. 일한국(伊爾汗國, 1253-1353)

 

장기스칸의 손자인 훌레구(旭烈兀)이 서쪽정벌후 건립한다. 동으로는 아무르강, 서로는 지중해, 북으로는 카스피해, 흑해, 코카서스, 남으로는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대제국이다. 지금의 이란, 이라크, 남코카서스의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아, 아르메니아와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만스탄이 모두 일한국의 범위에 속한다. 아프가니스탄 서부의 헤라트왕국은 일한국의 속국이었다. 소아시아의 롬수단국(1077-1308)도 명의상은 속국이지만, 실제로는 일한국이 관리를 파견해서 통치했다.

 

1256년, 훌레구는 몽골대군을 이끌고 아무르강을 건넌다. 6월, 무라이경내에 도착한다. 몽고선봉장령인 체더부화는 무라이의 여러 성을 함락시켜 막대한 타격을 준다. 무라이의 수령인 루크나딘은 몽골대군이 압박하자, 그의 동생인 사신사를 보내어 훌레구에게 강화를 요청한다. 훌레구는 루크나딘에게 친히 와서 항복하라고 한다. 그러나, 루크나딘은 결정을 계속 미룬다. 11월, 훌레구는 몽골대군에게 맹공을 명하고, 루크나딘은 어쩔 수 없이 성을 나와 항복한다. 몽골대군은 도성인 아라모스(카스피해 남쪽)를 점령한다. 1257년초에 루크나딘은 몽골군대에 처형당하여 죽는다. 그의 가족들도 모두 죽임을 당하고, 무라이는 완전히 평정된다.

 

1257년 3월, 아제르바이잔에 머물던 바이주가 군대로 왔다. 훌레구는 바이주에게 계속 서방으로 정벌하라고 지시한다. 바로 흑의대식(黑衣大食)의 수도인 바그다드로 향하게 한다. 당시 압바스왕조는 하리파모스타신이 정권을 잡고 있었고, 직접 흑의대식을 통치했다. 그리고 전체 이슬람세계를 관할했으며, 유프라테스 티그리스강유역의 강국이었다. 1257년 겨울, 훌레구, 바이주등은 3로의 군대를 이끌고 바그다드를 포위공격한다. 다음 해 초, 삼국이 만나서 바그다드로 총공격을 감행한다. 몽골군대는 대포로 바그다드성을 공격하고, 성문이 부서졌다. 2월, 모스타신 하리파는 투항한다. 훌레구는 바그다드를 함락시킨 후, 몽골군대가 도시를 7일간 약탈한다. 그리고 모스타신은 죽여버린다. 이로써 압바스왕조는 멸망한다. 훌레구는 군대를 이끌고 계속 서진하여,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 이른다. 이리하여 세력이 서남아시아에 미친다. 몽골군대는 이집트군대에 패배하였기때문에 서쪽으로 진군을 비로소 멈추게 된다. 타브리스(이란북부)를 수도로 정하고, 일한국을 건설한다.

 

하찬칸(1295-1304)이 재위할 때 일대 개혁을 시도한다. 1295년 6월 19일, 그는 장병을 이슬람교로 개종시키고, 그해 11월 3일에 즉위하며 무하마드라는 이름을 얻고, 스스로 술탄이라 칭한다. 이후, 몽골귀족과 이란귀족은 계속 섞이게 되어, 일한국은 점차 이슬람국가로 바뀌게 된다.

 

하찬칸이 죽은 후 얼마되지 않아, 일한국은 혼란에 빠진다. 1335-1378년의 40여년간, 8명의 일칸이 권력다툼에서 각자 왕조를 건립한다.

 

12. 자랄왕조(賈拉爾, 1336-1411)

 

1340년에 건립되어, 이라크, 아제르바이잔, 모술과 디아바크르를 보유했다; 컬트왕조(1245-1389)는 1342년에 독립하여 왕을 칭한다.헤라트와 후라산의 일부지구를 차지했고, 나중에 테무르제국에 멸망한다.

 

13. 무자파르(穆札法爾)왕조(1313-1393)

 

파르스, 케르만과 쿠르드트탄을 차지하고, 카이로에 신하국을 자처했음. 나중에 테무르제국에 멸망함.

 

14. 사르베다르국(1337-1381)

 

후후산 북부를 차지함. 1380년이후, 일한국의 폐허위에 각 왕조가 설립되었다가, 나중에 테무르제국에 멸망당함.

 

15. 테무르제국(1370-1506)

 

테무르제국의 개국황제인 테무르는 서차카타이한국의 사마르칸트 이남에 있는 갈석성(渴石城, 綠城)의 몽골파르라스부에서 태어났다. 이 부락은 14세기초에 카스카강유역으로 와서 거주했다. 그들의 씨족은 비록 유목생활을 하였지만, 이미 일부 정착하기도 했고, 테무르의 처는 서차카타이한국의 허찬칸의 딸이다. 그리하여, <<명사>>엣는 테무르를 원나라의 부마라고 적었다.

 

1370-1405년사이에 테무르는 이집트의 마부루크왕조를 격파하고, 시리아를 점령했으며, 오스만투르크제국에 승리를 거두어, 바아사이트 술탄을 생포했고, 인도의 델리 술탄국을 소멸시키고 새로운 제국을 만들었다.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이 제국의 중심이었다. 전성기에는 그루지아에서 인도에 이르는 서아시아, 중아시아와 남아시아를 아우르는 대제국이었다. 수도는 사마르칸트였는데, 나중에 아프간 서부의 헤라트로 옮겼다. 1405년, 테무르는 병사를 이끌고 명나라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도중에 병사한다. 명나라는 재난을 힘겹게 비켜간 것이다.

 

테무르제국의 문화는 크게 발전했다. 그리하여 이 시기를 "테무르문예흥성기", "페르시아문학예술의 황금시대"라고 부른다. 15세기중엽, 징기스칸의 장남 주치의 후예인 시반이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흥기하여, 1500년 부하라와 사마르칸트를 점령하고, 우즈베크칸국을 건립하며, 1506년 테무르제국을 멸망시킨다. 테무르제국의 통치자들은 어쩔 수 없이 인도로 가서 무굴왕조를 개창한다.

 

16. 무굴제국(1526-1858)

 

1526년, 테무르의 5대손인 바부르는 인도를 침입한다. 그리고는 인도스탄황제임을 선포한다. 이리하여 무굴왕조는 인도를 통치하는 중심이 된다. 이후, 바부르는 1527년의 칸누전투, 1529년의 거거라전투를 거쳐 북인도를 통일한다. 1530년, 후마옹이 제위를 계승한다(1530-1556), 1540년, 후마옹은 곡녀성(曲女城) 전투에서 비하르아프간 추장 사르사에게 패하여, 페르시아와 아프간으로 도망친다. 이리하여 무굴왕조의 인도통치는 잠시 중단된다. 1555년, 후마옹은 다시 인도평원을 정벌하고, 델리와 아그라를 점령하여, 무굴왕조의 인도통치를 회복한다.

 

1556년, 아크바가 제위를 승계하여, 내정개혁을 실시하고, 관용적인 종교정책을 실시하며, 무굴왕조의 인도통치기반을 확장한다. 그는 중앙집권제를 건립하고,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인도사회경제의 발전을 추진하였다. 차한제(1605-1627)와 사자한(1628-1658)시대에 이르러 무굴왕조의 국세는 전성기에 이른다. 문화예술도 새로운 발전단계로 접어든다. 이 시기의 예술특색은 민족전통과 중앙아시아, 페르시아의 예술을 결합한 것이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타지마할이 이 시기에 세워진다.

 

1858년 무굴왕조는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17. 키바칸국(1512-1785)

 

16세기, 징기스칸의 장남 주치의 후예인 아부하이칸은 강대한 우즈벡칸국을 건립한다. 아무르강 하류의 호라즘 오아시스에 위치하고 있었고, 통치범위는 서로는 카스피해, 남으로는 후루산북부에 이르렀다. 비록 통치계급가 귀족계층은 몽고인이지만, 주요한 주민은 우즈베키스탄족이었다. 다음으로는 투르크만족, 카라카르바크족과 카자흐스탄족이었다.

 

16세기초, 호라즘은 시반니칸에 정복된다. 그가 죽은 후 잠시 이란의 통치를 받는다. 약 1512년경, 현지주민은 이슬람 지도자의 독려하에 이란총독을 몰아내고, 우즈벡왕족인 일바르스(1512-1525 재위)를 칸으로 모시고, 독립왕국을 만든다. 수도는 처음에는 우르겐트였다. 16세기말에 키바(아랄해 남쪽의 키파)로 이주한다. 건국초기, 정국은 혼란스러웠다. 1593년, 부하라칸에게 정복되고, 1598년 다시 독립한다. 아부르하츠 바하사르칸이 즉위한 후, 그와 그의 아들인 아누사(1663-1687 재위)는 여러차례 부하르칸의 국경을 침입한다. 1740년, 키바는 이란의 나디르사에 정복당한다. 나디르사가 죽은 후, 키바는 이란의 지배를 벗어나지만, 내란이 극심했다.

 

무하마드 바시무칸시기(1806-1825) 칸국은 정치적으로 통일되고 국세가 강성해 졌다. 칸국은 나중에 러시아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고, 1920년 2월, 현지인민과 소련홍군의 공격하에 칸국은 멸망한다. 호르즘소비에트인민공화국을 건립하였다가 나중에 1924년 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만스탄으로 된다.

 

18. 카자흐칸국(1456-1718)

 

15세기중엽, 백장한국의 최후칸인 주치의 후예 바라크의 아들인 크레칸은 키바칸국의 아부르하이르칸이 와라에서 패한 틈을 타서, 자니베크칸과 함께, 일부 유목부락을 이끌고 동쪽으로 옮긴다. 바르카스호수의 남쪽에 차카타이후예의 정권인 이리바리(동차카타이국)경내로 들어온다. 초하, 타라스강의 광활한 토지위에 카자흐칸국을 건립한다. 카자흐민족의 통일은 이때 이루어진다. 이리하여 새로운 민족이 하나 또 탄생하게 된다.

 

1628년, 에서무칸이 죽은 후, 장게르칸이 즉위한다. 동부의 준가르부가 강성해지자, 자주 카자흐칸국을 공격했다. 장게르와 부하르칸 그리고 에르캉칸은 연합하여 공동으로 준가르에 반격한다. 1652년, 장게르칸은 준가르와의 전쟁에서 사망하고, 카자흐칸국의 내부통치집단은 분열된다. 비교적 세력이 강한 귀족이 스스로 칸이 되어 분렬하게 된다.

 

1718년(강희57년), 투크칸이 서거한 후 카자흐칸국은 날로 쇠약해진다. 아래의 작은 왕들이 칸의 명령을 듣지 않게 된다. 1755-1757년(건륭20-22년)에 청나라는 준가르를 격파해줌으로써 카자흐칸국은 위협이 소멸된다. 일부 유목민은 알타이, 탑성(塔城), 이리지역에서 유목한다.

 

18세기 중엽, 제정러시아의 세력이 팽창하여 카자흐초원의 원래 청나라 이리장군의 관할을 받던 바르카스호수의 동쪽과 남쪽지역으로 침입한다. 카자흐 헤자이부락의 3000여호는 이리와 보르타라지구로 이주한다. 경계가 확정된 후, 적지 않은 카자흐족이 신강으로 넘어왔다.

 

19. 크리미아칸국(1430-1783)

 

크리미아칸국은 1430년에 건립되었따. 바투의 동생인 투화테무르의 후예인 하지 거라이가 건립했다. 그의 통치시기에 발행한 첫번째 돈에 명시된 시기는 1441-1442년이다. 그는 1466년까지는 통치했다. 그가 건립한 칸국은 동으로는 돈강하류를 경계로 하고, 서로는 다뉴브강 하류에 까지 이른다. 북으로는 예리츠성과 탄보프에 이르렀다. 1454년, 하지 거라이는 크리미아강의 남안인 바허체사라이, 원래의 키르크야성을 수도로 정한다. 하지가 건립한 거라이 왕조는 1771년까지 계속되다가 러시아에 정복되고, 최종적으로 1783년에 러시아에 편입되었다.

 

20. 카산칸국(1445-1552)

 

카산칸국은 1445년 바투의 동생인 투화테무르의 후예인 우르 무하마드와 그의 아들 마흐무티가 건립했다. 우르 무하마드는 1446년 그의 아들인 마흐무티에게 암살당한다. 마흐무티의 통치기간(1446-1464)에 나라의 건설이 완성된다. 영토는 볼가강 중류와 하마강 유역의 원 불가왕국이었다. 마흐무티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카산칸 이부라힘은 1468년 비아트카를 정복한다. 이부라힘의 아들 아밍은 1506년 모스크바공국의 군대를 격파한다.

 

1552년 6월, 러시아황제인 짜르 이바노프 4세는 대포와 군대를 동원하여 카산성을 공격한다. 10월 2일 함락시킨다. 카산칸국은 이로써 러시아에 병합된다. 카산왕조의 멸망은 러시아에서 몽골족의 지배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21. 아스트라칸국(1466-1556)

 

1466년에 건립되었다. 금장칸 쿠츠크 마하마의 손자인 예주카심이 창건했다. 아스트라칸성을 수도로 삼았다. 강역은 볼가강하류 및 남코카서스초원지대를 포함하고, 북으로는 카산칸국, 서로는 크리미아칸국, 동으로는 노가이칸국과 경계를 마주했따. 주민은 주로 유목, 어업에 종사했고, 농업은 약간의 비율을 차지했다. 수공업이 비교적 발달하고, 모피, 피혁등으로 이름을 날렸다. 교통의 요지여서 육로와 수로로 코카서스, 흑해와 카스피해에 닿을 수 있어, 내외무역이 아주 발달하였다.

 

1553년 이바노프3세가 3만의 러시아군대를 파견하여 아스트라칸국을 공격하였고, 암구르체이칸을 몰아내고, 제르비스아리를 옹립했다. 칸국은 러시아의 속국으로 바뀐 것이다. 1556년 이바노프3세는 아리칸을 축출하고 정식으로 아스타라칸국을 합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