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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청나라때 국비외국유학생들은 어떤 시험을 치렀는가?

by 중은우시 2007. 11. 16.

해외유학은 일찌기 청나라말기부터 있었다. 당시에는 아주 새로운 경향이었고, 경쟁은 지금보다도 훨씬 치열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로 인하여 인생이 바뀌게 되었다.

 

호적(胡適) 선생은 해외유학파인 선배로서 <<호명복을 추억함>>이라는 글에서 일찌기 자신이 겪었던, 국비유학생시험에 관한 이야기를 실은 바 있다.

 

선통2년(1910년) 7월, 나는 북경에서 미국국비유학시험을 치렀다. 그 날,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합격자명단이 붙었다고 하였다. 나는 인력거를 타고 합격자 명단을 보러 사가후통으로 갔다. 하늘은 이미 어두워졌다. 나는 인력거의 등잔을 들고, 합격자명단의 끝부분부터 보아올라갔다(왜냐하면 나는 시험을 잘 치지 못했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합격자명단을 다 보았는데, 나의 이름이 없어서 매우 실망했다. 그런데, 제일 앞부분에 "예비합격자"라는 말이 있었다. 나는 다시 등을 들고 "정식합격자"의 명단을 살펴보았다. 여전히 끝부분부터 읽어올라갔다. 나의 이름이 있었따. 자세히 보니, 호달(胡達)이었고, 호적(胡適)이 아니었다. 나는 다시 위로 거슬러 보아갔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내 이름이 있었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등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원래의 인력거를 타고 되돌아왔다. 마음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 호달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마터면 괜히 좋아할 뻔 했군!"

 

이 호달이 바로 호명복이다. 나중에 호적과 같은 배를 타고 미국으로 가고 함께 코넬대학에 입학하며, 호적과 좋은 친구가 된다.

 

"국비미국유학"은 "국가배상금국비미국유학"이라고도 한다. 이 "국가배상금"이 바로 "경자배상금"이다. 경자(1900년)년에 8국연합군이 중국을 침입하고, 북경으로 처들어온다. 나중에 청나라정부를 핍박해서 "신축조약"을 체결하는데, "배상금"이라는 조항에서 당시 중국인구를 1인당 백은 1냥으로 계산해서 4억5천만냥으로 계산했다. 이자는 4리였으며, 39년에 나누어 원금과 함께 갚는 것이었다. 합계 9억8천여만냥이 되었다. 나중에 영국, 미국등의 국가는 이 배상금중 아직 지급되지 않은 부분을 돌려주기로 결정하고, 중국에 학교, 도서관 병원을 만드는데 썼다. 그리고 각종 장학금, 유학생파견경비로 썼다. 미국은 선통원년(1909년)부터 경자배상금을 돌려주기 시작하였으며, 그해에 제1차미국국비유학생을 모집했다. 호적이 시험친 것은 제2차미국국비유학생이었다.

 

이 해에 호적은 아직 20세가 되지 않았었다. 1904년에 고향인 적계를 떠나 상해로 공부하러 갔다. 나중에 상해의 중국공학에 입학했고, 다시 신공학으로 전학했다. 나중에 학교가 해산되면서, 옛날 중국공학으로 되돌아가기 싫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싫어서 그냥 상해에 살았다. 앞날이 막막해서 고민이 많았으며, "낭만적인 친구"들과 어울려 허송세월하고 있었다. 먹고 마시고 계집질하고 도박도 했다. 나중에 술먹고 행패를 부리다가 순사에 붙잡히기도 하였다. 이 사건은 호적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모친의 가르침을 어겼다고 생각하여 완전히 개과천선한다. 북으로 올라와서 미국유학생시험에도 붙었고, 술친구들과 멀어졌다. 이리하여 그는 "개인역사상의 암흑시대"를 종결짓는다. 당시 호적은 아주 가난했고, 부채도 있었다. 돈이 없어서 북경으로 가서 시험칠 수가 없었다. 시험에 합격하더라도 자기가 미국으로 가면 모친은 누가 돌볼 것인가? 나중에 그의 친구인 허이손이 호적보고 아무 걱정하지 말고 가서 시험보라고 권한다. 그리고 그를 위하여 경비를 마련해주겠다고 약속한다. 그의 또 다른 친구인 정락정은 호적에게 200은원을 주어 노잣돈으로 삼게 해준다. 그의 친척아저씨인 호절보는 그의 집안을 돌보아주겠다고 약속한다. 이런 사람들의 도움과 권유하에서 호적은 안심하고 두 달간 책을 읽어 순조롭게 북경으로 가고, 미국유학시험에도 참가할 수 있었다.

 

시험은 두번으로 나누어 본다. 첫번째는 국문과 영문이었다. 호적은 괜찮게 친 편이었다. 국문시험의 제목은 '불이규구불능성방원설(不以規矩不能成方圓說, 규-자-와 거-줄자-가 없으면 방-네모-과 원-동그라미-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논하라)'였다. 그는 아주 어지럽게 고증에 관한 글을 썼다. "구지작민, 불가고의, 규지작야, 기재주지말세호(矩之作民, 不可考矣, 規之作也, 其在周之末世乎, 구를 만든 것은 언제 인지 고증할 수 없다. 규를 만든 것은 주나라 말기때의 일이다)"로 시작하는 글이었다. 사실 이 것은 호적이 마음대로 고증했다고 적은 글이었는데, 마침 시험채점자인 선생은 고증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호적의 글을 아주 높이 평가했다. 그리하여 100점을 주었다. 영문은 60점을 맞았다. 그리하여 첫번째 시험은 평균 80점이라는 높은 점수였다. 두번째 시험은 이과였는데, 시험을 잘 못쳤다. 그리하여 평균은 최종적으로 59점이 되었다. 겨우 합격선을 넘어섰다. 다행히 이 해에는 유학생을 많이 뽑아서 70명을 뽑는 해였고, 시험을 잘 친 사람도 적었다. 호적은 어쨌든 운이 좋아서 55등으로 합격한 것이다.

 

호적은 시험을 쳐서 해외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 일을 매우 중시했다. 나중에 축가정으로부터 인쇄된 "제2차경재배상금미국유학생합격자명단"을 보고는 복사본을 하나 얻었다. 이오의 <<호적평전>>의 첫머리에는 조원임이 소장하고 있던 합격자명단의 사진본 5장이 실려있다. 네번째, 다섯번째 사진에는 호적이 1934년 3월 27일에 쓴 발문이 있다. 이렇게 시작한다:

 

민국23년2월 나는 남경의 축가정 선생의 집에서 그가 보존하고 있는 이 인쇄된 합격자명단을 보았다. 나는 그에게 부탁해서 다시 한부를 써서 붙여달라고 하였다. 붙여온 후, 나는 다시 장희여 선생에게 부탁해서 다시 한번 쓴 다음에 나의 일기 속에 보존했다. 중국정부가 최초에 미국유학생을 파견한 것은 4차에 걸쳐있고, 그 성명과 이력은 모두 서우지의 연보에 기재되어 있다. 나는 이 합격자명단이 오랫동안 보존되었으면 좋겠고, 나중에 후세인들의 교육사료가 되었으면 좋겠다.

 

호적선생이 전혀 생각지도 못하였을 것은, 청나라궁중의 자료관에도 합격자명단이 1부 보관되어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