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도단부대군정관찰실
역사상 중국군대와 교전해본 나라의 군대는 모두 21개이다.
신중국(중공)성립이전에 중국군대는 일찍 일본군, 영국군과 싸운 바 있다.
6.25전쟁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네덜란드, 카나다, 필리핀, 터어키, 태국, 남아공, 그리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뉴질랜드로 구성된 UN군과 한국군등 모두 17개국 부대와 싸운 바 있다.
1960년대이후, 다시 인도군, 미군, 베트남군, 소련군, 통일베트남군과 싸운 바 있다.
1. 미국군대
인민해방군의 역사상 미군과는 세 차례의 교전을 겪었다. 제1차는 6.25전쟁이고, 제2차는 월남전쟁이며, 제3차는 라오스전쟁이다.
6.25전쟁은 미군과 인민해방군이 처음으로 부닥친 전쟁이었다. 1950년 10월 19일, 팽덕회는 지원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향했다. UN군과 3년에 걸친 피로 얼룩진 전투를 전개했다. 전체 6.25전쟁기간중에 미군은 162,708명의 인명손상이 있었는데, 그중 전사가 54,246명, 부상이 103,284명이었고, 실종,포로가 5178명이었다. 그 사망자수는 UN군 총사망자수의 95%에 이르렀다. UN이 공포한 숫자는 미군의 사상이 14만여명으로 일일 평균사상자수가 제2차세계대전을 초과했다.
인민해방군과 미군의 제2차전투는 1965년 6월부터 1973년 8월까지의 월남전쟁이었다. 인민해방군은 먼저 고사포부대를 다섯 차례로 나누어 월남에 돌아가며 파견했고, 공정부대를 대동한 고사포부대는 모두 16개 지대, 63개 대대 및 일부 독립연대, 고사기관총연대, 근무분대등 합계 15만명이었다. 미군과 작전을 하면서 인민해방군은 대공작전을 모두 2153차례 하였고, 미군기 1707대를 격추시켰으며, 1605대를 손상입혔다. 미군비행기조종사 42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와 동시에 인민해방군은 철도병, 공정병부대 10여만명을 투입해서 월남이 미군의 폭격에 무너진 교량, 철도, 도로, 동굴등을 보수하는데 도와주었다. 월남전쟁에서 인민해방군은 참중한 대가를 치른다. 4200여명이 부상당하고 1100여명이 희생된다.
인민해방군과 미군의 제3차전투는 1969년부터 1973년까지의 라오스지원전투였다. 라오스에 파병한 기간동안 인민해방군은 95차의 대공작전을 펼치고, 비행기 35대를 격추시키고, 24대에 손상을 입혔다. 인민해방군은 269명이 사망하였고, 그중 211명은 라오스의 열사능원에 안장되어 있다.
2. 일본군대
인민해방군의 8년항전기간동안 유명한 승리는 세 번 있었다.
첫째, 평형관전투는 팔로군이 처음으로 일본군과 대규모로 교전한 것이면서 중국인의 기세를 드높인 전투이다. 평형관전투에서 팔로군 115사단의 적수는 "육군의 꽃"이라고 불리우던 일본군 제5사단 21여단이었다. 평형관대첩은 국내외를 놀라게 하였고, 팔로군의 명성을 크게 떨친 전투였다. 평형관대첩은 "황군불패"의 신화를 깨뜨렸으며, 모택동은 아주 기뻐하며 "우리 군의 첫번째 승리를 경하한다"는 축전을 보냈다.
둘째, 양명보야습이다. 1937년 10월 19일 밤, 팔로군 129사단 769단은 산서 대현의 양명보에 있는 일본군 비행장을 야간에 급습한다. 비행장의 24대의 비행기를 파괴시키고, 일본군의 공항내 100여명의 군인을 전멸시킨다. 이 전투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으며, 일본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셋째, 황토령전투이다. 여기에서 일본의 독립혼성여단을 격파하고, 일본군여단장이면서 "명장의 꽃"이라고 불리우던 아베(阿部規秀)를 죽였다. 아베는 팔로군이 항일전투에서 사살한 일본군 최고위 장군이다.
3. 영국군대
영국군과 인민해방군의 첫번째 교전은 1949년의 도강전투(渡江戰役, 인민해방군이 양자강을 넘어 국민당지역을 치고 내려온 전투)전인 1949년 4월 20일, 인민해방군의 도강을 저지하기 위하여, 영국군함이 인민해방군에 도발했고, 인민해방군이 즉시 반격한 건이다. 세번에 걸친 교전에서 영국함대는 크게 손상을 입었다.
1년후, 6.25전쟁때 다시 영국군과 인민해방군이 만난다.
인민해방군의 전형적인 승리는 영연방 제1사단 제28여단의 "로얄스코틀랜드부대", 영연방 제29여단의 "그로스트부대"와 "로얄중형탱크부대"의 세 '로얄'부대를 전멸시킨 것이다.
1951년 10월 3일, 한국의 마량산에서, 인민지원군 탱크제1사단과 영국군의 로얄스코틀랜드부대는 생사를 건 결투를 시작한다. 전투가 끝난 후, 로얄 스코틀랜드부내 제1영의 1701명의 사명은 시체가 곳곳에 널려 있었고, 부대장은 전사하고 살아남은 46명의 영국군인은 두 손을 들고 포로가 되었다. 전체 전투는 3시간 가량 소요되었다. 6.25기간중에 영국군의 사상, 포로, 실종자수는 4435명이었고, 마량산전투에서의 손실이 전체 손실의 39%에 이르렀다.
1951년 4월 24일 제5차전투때, 지원군 63군 187사단 560단은 살마리에서 영국군의 "그로스트부대"를 독안에 든 쥐로 만들었다. 설마리전투에서 지원군 제63군은 영국군 제29여단의 "그로스트부대"와 포병부대, 중형탱크연대를 전멸시키고, 중령계급의 부대장 이하 관병 129명을 죽였으며, 부연대장이하 459명을 포로로 잡았다. 6.25전투에서 인민해방군은 영국군포로를 모두 961명 잡았는데, 설마리전투에서 거의 절반을 붙잡았다. 이 전투에서 지원군의 전사 유광자 1명은 63명의 영국군을 붙잡아서 6.25전투중 1인이 포로를 붙잡은 최고의 기록을 세웠고, 지원군본부가 수여하는 "고담영웅(孤膽英雄)"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지원군이 섬멸시킨 세번째 영국군부대는 제29여단 "로얄중형탱크부대"였다. 6.25전쟁중에 영국군이 투입된 전장에는 두 개의 탱크부대가 있었는데, 그중 "오량중형탱크부대"는 장비가 좋았을 뿐아니라, 유명하기도 했다. 그들의 장비는 성능이 뛰어난 처칠중형탱크였고, 여러차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UN군내에서 공인된 대표적인 장갑차부대였다. 제3차전투에서 지원군 50군 149사단은 야습을 통하여 일거에 섬멸하였다.
4. 프랑스군대
인민해방군과 프랑스군대의 제1차전투는 건국초기에 월남에서 진행되었다.
1950년말, 중국고문단은 월남군대를 도와 변방전투를 시작했다. 중국경내에서 월남의 주력부대를 훈련시켰다. 변방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월남공산당중앙은 중국에 고급군사지휘관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고, 전체 전투를 조직하고 지휘해줄 것을 부탁했다. 진건은 중공중앙대표의 신분으로 월남에 갔고, 전장터를 조사한 후에 변방전투의 작전방안을 세웠고, 무원갑등 월남전선지휘부의 동의를 받아냈다. 이후 중국의 사단, 연대, 대대등의 군사고문들은 월남의 각 참전부대에 배치되었고, 월남의 각급지휘관들을 도와주었다.
진건이 세운 작전방안과 중국군사고문단의 지휘 및 월남군대의 용감한 전투로 7일밤낮의 연속된 격전 끝에 월남군은 프랑스의 두개 정예병단 3000여명을 전멸시키고, 고평(高平)을 해방시킨다. 이어 칠계(七溪)를 점령하자, 동등(同登), 양산(凉山), 정립(亭立), 안주(安州)등의 프랑스군이 도망치게 된다.
변방전투후, 진건은 귀국한다. 나중에 월남군대와 프랑스군대는 홍하전투, 동북전투, 영평전투, 서북전투, 상료전투등을 거ㅊ는데 모두 위국청(韋國淸)을 위시한 군사고문단의 협조하에 진행한 것이다. 특히 준변부전투로 프랑스는 전쟁에서 철저히 패배한다.
6.25기간중에 인민해방군은 프랑스군과 맞닥뜨리는데, 이제는 고문단을 통한 간접적인 조우가 아니라, 양군이 직접 실탄과 총을 들고 맞부딛치는 것이었다.
1950년 7월 22일, 프랑스는 구축함을 한국에 파견하여, "UN군"의 해군에 가담시킨다. 8월 25일, 1개의 독립부대를 만들어 "UN군 프랑스부대"라고 칭하며, 라이미르 중위가 부대장이었다.
전체 6.25전쟁기간중에 프랑스군은 262명이 전사하고, 1127명이 부상, 실종, 포로로 되어, 합계 1389명의 병력손실이 있었다.
5. 한국군대
6.25전쟁중에 인민해방군은 한국군대와 가장 많이 싸웠다. 6.25에서 첫번째 전투도 한국군과 싸운 것이었다. 6.25에서 마지막 전투인 금성전투도 역시 주로 한국군대와 싸운 것이었다.
6.25때 인민지원군은 5번의 전투와 상감령, 금성등 전투를 벌였다:
제1차전투: 지원군은 한국 제6사단, 제7사단의 대부분을 섬멸하고, 제1사단, 제3사단, 제8사단의 일부를 섬멸했다. 모두 7594명을 죽이고, 4741명을 포로로 잡았다.
제2차전투: 지원군은 한국 제7사단, 제8사단의 5962명을 죽이고, 5568명을 포로로 잡았다.
제3차전투: 지원군은 한국 제1사단, 제2사단, 제5사단의 4,593명을 죽이고, 5967명을 포로로 잡았다.
제4차전투: 지원군은 한국 제1사단, 제3사단, 제5사단, 제6사단, 제8사단 합계 8861명을 죽이고, 7769명을 포로로 잡았다.
제5차전투: 지원군은 한국 제1사단, 제3사단, 제5사단, 제6사단, 제8사단 합계 60537명을 죽이고, 5233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외에 1951년의 방어작전, 1952년의 진지공고작전, 상감령방어작전, 1953년의 반격전투등의 전투에서 지원군은 한국군 25만여명을 죽이고, 8354명을 포로로 잡았다.
전체 6.25전투에서 지원군이 죽인 한국군은 313500여명이었고, 한국군의 대표부대인 수도사단에 큰 타격을 입혔고, 수도사단의 핵심부대인 "백호부대"를 철저히 무너뜨렸으며, 그 부대깃발은 지금도 중국중앙혁명군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6. 기타 국가부대
1951년 벨기에는 보병부대를 한국으로 보냈다. 벨기에부대는 미군 제1군단에 예속되어 지휘받았다. 전체 6.25기간동안 벨기에부대는 지원군과 여러차례 전투를 벌였다. 사상자 395명, 포로 5명이었다. 신병이 계속 보충되지 않았더라면, 벨기에부대는 일찌감치 사라졌을 것이다.
6.25기간동안 터키는 보병1개여단을 파병했고, 미군제1군단에 예속되었다. 지원군과 터키군은 십여차례 전투를 벌였는데, 터키여단의 사상, 포로, 실종은 모두 3216명이었다. 병력손실은 UN군내에서 세번째로 많았다.
태국육군21단은 태국에서 정예를 뽑아서 만든 혼성부대였다. 미국식 장비, 미국식 훈련을 받고, 철원서쪽 190고지전투에서 지원군에게 패배한다. 이후에도 연전연패하여 모두 1273명의 병력손실이 있었는데, 최초에 한국에 온 1057명을 초과하는 숫자이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육,해,공군의 삼군으로 구성된 정예부대를 UN군에 보냈다. 두개의 보병부대, 3척의 구축함, 1개의 전투기중대와 1개의 공수중대가 포함되어 있었고, 병력수에서는 UN군내에서 다섯번째이다. UN군에는 5개국가가 6.25때 육,해,공군을 모두 출동시켰는데, 오스트레일리아가 그 중의 한 나라이다. 나머지 4개국가는 미국, 영국, 카나다, 태국이다. 오스트레일리아는 미국의 주장을 쫓아 38선을 돌파하고 북조선을 없애자고 주장한 9개나라중의 하나이다. 나머지 8개나라는 각각 영국, 카나다, 필리핀, 네덜란드, 노르웨이, 브라질, 파키스탄, 쿠바였다. 6.25전쟁기간중에 오스트레일리아군은 746명의 전사, 부상실종포로가 1112명 합계 1416명의 병력손실을 겪었다.
카나다는 UN군에 들어간 숫자는 세번째이다. 1953년 7월에 6146명을 증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카나다는 열심히 싸운 나라는 아니었다. 전투를 벌인 경우도 적다. 규모가 가장 큰 전투는 1953년 5월 2일 하물한북산에서 지원군 46군 397단의 3개부대와 싸운 일인데, 이번 전투에서 카나다군은 25여단의 3개연대가 가담하였으나, 220명이 전사한다. 또 한번은 지포리전투인데, 카나다군대는 25여단이 미군 제3사단, 제25사단과 연합하여 지원군 15군 29사단과 싸웠던 것인데 역시 패배했다. 이외에 카나다해군은 미군과 한국군의 철수시 운송을 담당하기도 했다 6.25전쟁에서 카나다군은 312명이 전사하고 부상, 실종 포로가 1244명으로 모두 1556명의 병력손실을 겪었다.
에티오피아는 1개보병부대를 참전시켰다. 미군 제9군단에 배속되었다. 6.25전쟁중에 상감령전투에서 지원군과 교전했는데, 121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부상했다. 상감령은 에티오피아군에게는 죽음의 장소가 되었다.
뉴질랜드는 보병은 파병하지 않았고, 포병16단과 두 척의 호위함을 참전시켰다. 비록 지원군과 직접 교전하지는 않았지만, 23명이 포화로 사망하고, 79명이 부상, 실종, 포로로 잡혀서, 102명의 병력손실이 있었다.
콜롬비아는 1951년 1척의 호위함, 1개의 보병부대 합계 1153명을 한반도로 파병시킨다. 지원군은 상감령전투, 노독산전투, 한강지구방어전에서 콜롬비아부대에 큰 타격을 주어 콜롬비아군인 163명이 전사하고, 476명이 부상, 실종, 포로로 잡힌다.
그리스는 로얄공군13대대와 1개의 보병부대를 파병한다. 공군은 운송을 담당하고, 보병은 미군의 제1기병사단에 배속되어 지원군과 싸운다. 192명이 전사하고 545명이 부상, 실종, 포로로 잡힌다.
필리핀은 6.25가 발발하자 미국을 따라 중국에 대하여 "봉쇄", 엠바고정책을 시행한다. 이로써 양국간에 무역은 완전히 중단된다. 1950년 10월, 필리핀은 1143명으로 구성된 보병제10연대를 UN군에 파병시킨다. 6.25에서 필리핀군은 112명전사, 356명 부상, 실종, 포로의 기록을 남긴다. 6.25이후에도 필리핀은 남사군도를 둘러싸고 중국과 대치한다.
네덜란드는 1개보병부대와 1척의 구축함 합계 총725명을 파병한다. 6.25때 인민지원군과 네덜란드군은 한강지구방어전과 상감령전투때 싸우게 되는데, 네덜란드군은 120명전사, 648명 부상, 실종, 포로의 기록을 남긴다.
룩셈부르크는 겨우 인원 44명의 보병부대를 보내어 유엔군에 들어온다. 병력은 가장 적었지만, 비율은 가장 컸다. 왜냐하면 룩셈부르크는 전체 군인의 숫자가 550명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사상자가 15명뿐이었지만, 파병자중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가장 높았다. 34%에 달하였기 때문이다.
남아공은 공군제2대대와 25대의 비행기로 UN군에 참전한다. 이 대대는 비표부대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남아공의 강력한 공군여단이었다. 6.25기간중에 남아공의 비표부대는 미군의 공군우세를 이용하였다. 그러나, 그들도 34명의 조종사가 사망하고, 8명이 낙하산으로 목숨은 구했으나, 지원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후에는 영토분쟁과 관련하여 인민해방군은 인도, 남월남, 소련, 월남군과 전투를 벌이게 된다.
인도와는 국경분쟁으로 인하여 전투를 벌이게 된다.
서사군도를 둘러싸고 인민해방군은 1974년 월남과 전투를 벌이는데, 이후에도 1979년부터 1987년까지 8년여에 걸친 전투를 계속하게 된다.
소련군과는 진보도사건에서 맞부닥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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