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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후)

중국의 Star Wars 계획

by 중은우시 2007. 7. 9.

작자: 미상(www.7story.com)

 

중국의 미사일방어계획과 위성전투계획은 시간적으로 3단계로 나눠볼 수 있다.

 

1. 1960년대의 "640공정"

2. 1980년대의 "863공정" : 주로 기초기술의 F/S와 기술축적을 진행하였음.

3. 미국의 TMD 및 NMD의 위협에 직면하여, 현단계에서는 주로 미국의 미사일방어계획에 대항하는 F/S와 방안계획을 진행하고 있음.

 

포부가 컸던 모택동 주석은 'NMD'를 제안한 바 있고, 또한 핵잠수함을 얘기한 바 있다. 사람들이 잘 알다시피 "일만년"이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당시의 중국은 분명히 힘이 없었다. 원자탄 하나를 개발하는데 200억인민폐를 들였고, 국가의 자금은 부족했다. 그러나, 당시 국가안전을 고려하여 제안한 내용들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레이건의 스타워즈도 현실적이지는 못했다. 그래도 미국인들은 지금도 레이건을 좋아하지 않는가.

 

1967년 1월, "640"공정회의를 개최했다. 그리고 5개의 하부 시스템번호, 각 연구단위와 전체시스템의 연구개발을 확정했다. 요격미사일, 핵탄두사일요격등의 연구개발을 하고, 1973-1975년사이에 실험하기로 계획했다.

 

1969년 8월 14일, 주은래는 칠기부(七機部) 이원(二院)이 제안한 "반미사일, 반위성종합연구원"을 비준했고, 이원은 64년부터 조직을 준비해왔다.

 

1970년부터 반위성계획에 대한 F/S를 시작했다.

 

진보도사건(소련과의 충돌)이후, 방공동을 파는 이외에 탄도미사일을 요격하는 기술이 시급했다. 개발시간을 앞당기기 위하여, 먼저 "반격2호"에 대한 저층요격시험을 시행했다. 1971년10월-1972년 4월에 6번의 1:5 모형시험을 시행했다. 5번 성공하였다. 계획은 1973년에 중단된다.

 

1974년 5월-6월, 칠기부와 이원은 "반격3호"의 고층요격계획에 대한 F/S 검토에 들어간다.

"반격3호"계획은 1977년에 중단된다. 당시 이미 2호위성계획과 "반위성1호"시스템에 대한 전체설계와 부분설비연구개발시험이 끝난 상태였고, 모두 성공했었다.

"반격1호" 저청고초음속요격탄이 1979년 8월-9월 두번에 거친 모형탄비행을 마친다.

1980년 3월 "반격1호"는 연구개발을 중단한다. 오래지 않아, 등소평은 "640공정"을 중단시킨다.

 

"640공정"전략예비경보기는 7010레이다로 1970년 5월에 연구개발한다. 1972년 일부 실험적으로 장착시키고, 1974년에 사용한다. 1976년에 전면적으로 장착하고 1977년에 완성한다. 레이다는 연속으로 10개이상의 목표를 추적할 수 있다.

110추격레이다는 1966년에 연구개발하여, 1977년부터 사용한다.

 

이상의 내용은 획득한 직접자료이다. 계획이 민감하고 복잡하므로 이러한 자료를 찾은 것만으로도 필자는 만족했다. 문혁때는 너무 혼란스러웠고, 대형계획도 왔다갔다했으며, 기술, 자금, 관리, 정치에 따라 움직였다. 현재까지도 당사자들은 말하기를 꺼려하고 있어,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 아주 힘들었다.

 

기술적으로, 측면에서 유도탄방어계획을 살펴볼 수 있다. 유도탄방어계획은 방대한 시스템공정이다. 정찰, 지휘, 통제, 정보의 요건상 반드시 군사우주계획으로 진행해야 한다. 반유도탄, 반위성은 실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주항공, 우주전쟁, 미사일, 핵무기, 레이다, 정보망, 방공시스템, 지면설비등 모두 연구해야할 분야이고, 당연히 DEW(Directed Enwrgy Weapon, 지향성에너지무기)시스템과도 관련이 있다.

 

항공우주계획도 사람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당시의 계획에는 정찰위성, 유인우주선, 반위성등이 있었다. CZ-1(장정1호) 로켓은 DF-4미사일의 기초에서 발전한 것이다. DF-5미사일은 CZ-2와 FB-1(풍폭1호) 로켓으로 발전했다. FB-1은 재난을 많이 겪었고, 2급으로 고친 엔진이 실패했다. 그래서 CZ-2의 엔진을 사용했다. 1980년에는 아예 CZ-2의 2급을 사용했다. FB-1은 군용로켓이었고, 2급로켓의 기동성은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리하여 쓸모없는 프로젝트로 변해버렸다. 1982년에는 FB-1의 사용을 중단한다. CZ-2는 1971년 처음 비행을 시작한다. 1974년 11월 5일에는 "첨병1호"를 발사하나 위성을 회수하는데 실패한다. 이후에는 모두 성공한다. 1978년, CZ-2와 회수위성기술은 이미 어느 정도 성숙되었다.

 

FB-1저궤도 1.5톤적재로 1969년에 연구개발한다. 701의 중형위성공정이었다.

1972년 8월 10일, 장공1호기술시험위성이 실패하다.

1973년 9월 18일, 기술시험위성이 실패하다.

1974년 7월 12일, 기술시험위성이 실패하다.

1974년이후 FB-1 고밀도발사는 한편으로는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1974년의 계획조정으로 인해서, "640공정"등의 공정속도가 완만해 졌다. FB-1은 9번 발사에 4번 성공의 기록을 세운다. 상해항천국은 이후의 모델에서 지금까지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이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다. 정치적인 면을 제외하고 기술적인 요구사항이 너무 높았던 것같다.

 

FB-1의 기술시험위성은 1톤여의 무게를 제외하고 아무런 자료가 없다. 그러나, CZ-2발사위성은 모두 조사할 자료가 있다. "반위1호"는 발사되지 않은 것같다. 기술검증은 이미 기술시험위성에서 진행한 것같다. "실천2호을"위성의 용도는 불명이다. 1981년 하나의 로켓에 3개의 위성을 싣는데, 유도탄다탄두기술시험만은 아닌 것같다. 분명히 반위성기술시험이다. 1로켓 3위성은 "실천2호"의 갑, 을 모델이 있다. 실천2호의 근지점은 237킬로미터이고 원지점은 1622킬로미터이다. 3위성의 궤도는 서로 가깝다. 실천2호는 공간적외선특징측량을 하였는데, 지면정찰위성에 기술을 제공하기 위하여, 당시 미사일적위선경보위성계획이 아닌가 한다. 1974년 9월에 방안이 완성되었다. 실천2호는 250킬로그램이고, 설계수명은 반년이었다. 그러나, 회전이 너무 빨라서, 12일이후에 통제를 상실했다. 실천2호갑은 500킬로그램이고 전리층측량을 한다. 계획으로는 1974년이후에 을형과 동시에 활성화하기로 되어 있었다. 실천2호을은 "광학추적관측법"에 의지하였다. 이것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자료이다. 이상한 것은 실천2호을이다. 이것은 예비용인가? 궤도변경기동을 진행했는가? 자살위성기술시험을 했는가? 기본적으로 실천2호을은 작은 위성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640공정"을 그대로 한 것이 "TMD"이다. 광의로 말하자면, TMD는 지역방어시스템이다. "640공정"은 사실상 3개의 계획이다. "TMD", "NMD", "반위성". 필자는 당시 핵무기계획이후에, 640공정이 가장 중요한 국가계획이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국가전략의 핵심은 핵전쟁을 준비하는데 있었다. 핵무기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 후에는 중점이 "640공정"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핵무기계획의 진전이 그다지 순조롭지 못했다. 1980년에야 DF-5시험을 완성한다. 이것은 아마도 "640계획"의 진전을 순연시킨 이유일 것이다. 만일 판단이 정확하다면 당시의 위성계획등은 모두 "640계획"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반미사일용 핵탄두는 기술상으로 미국, 소련의 공법을 참고했다. 반미사일, 반위성시스템의 핵심은 중도격추탄이다. 시스템의 나머지 부분은 우주항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에 기하여 640공정의 대체적인 면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64년 1월 중앙에 제출한 "핵무기발전보고서"에 의하면 계획은 아래와 같다:

1. 2기부는 1970년대중기까지 핵미사일무기화를 이룬다.

2. 7기부는 DF미사일은 1972년 완성한다. 액체가 우선이고, DF-5를 로켓에 장착한다.

3. 6기부

4. 중앙과학원위성계획.

 

중앙은 1965년에 이를 비준한다. 이후 "제3차5개년계획"의 국방계획이 기본적으로 완성된다.

1971-1975년 "제4차5개년계획"의 국방계획이 제안된다. 세계수준을 "앞의 3년간 따라잡고, 나중의 2년간 초과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5년내에 14종의 우주선을 하늘로 쏘아올리고, 하늘에 9개의 위성을 둔다는 계획이다.

1971년 9월 13일이후 계획을 조정한다.

1974년 비림비공(임표와 공자를 비판)이후 계획을 수정한다. 새로운 핵무기, 유도탄, 반위성 및 시험위성이 포함되었다. 장애평이 국방과학위원회 주임을 맡고 있을 때, 7기부로 가서 현장에서 업무를 보았다. 6월 30일, 모택동은 "7기부문제를 해결하는데 관한 보고서"를 비준했고, 각 부서를 정리정돈했다. 7월에 유도탄공업총국이 설립되었다.

1975년 1월에 조정이 있었다. 미사일핵무기와 "331공정"의 동2성에 포함되었고, JL-1이 가속화 되었다.

 

이상은 역사책에 나와 있는 것인데, 혼란스럽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파악하는 것이 빠를 것으로 보인다.

반미사일레인지는 불명확하다. 미사일시험장은 1970년 주천(酒泉)의 서북기지에 완성했고, 전략유도탄시험을 했다. 1966년 화북기지가 건설되었다. 중급유도탄전체비행, 대륙간 및 고체유도탄시험을 했다. 1967년 3월 동북기지가 건설되었다. 중거리원거리유도탄전체비행시험을 했다. 1975년 5월 태원기지가 건설되었다.

 

반유도탄핵탄두는 자료가 없다. 1972년 1월 7일, Q-5공중수소폭탄투하를 했다. Q-5표준적재량은 1톤이다. 이미 소형화를 실현한 것같다. 이후의 원자탄시험은 1976년 1월 23일 20000톤급으로 진행하고, 보도에 따르면 탄두소형화를 완성했다. 2000톤급이다. 핵탄두는 아마도 100만톤 수소폭단이었을 것이다. 국외의 자료에 보면 이런 규모의 시험은 여러번의 실험실패가 있었을 것이다. 시간적으로 1973년이후 핵실험의 중점은 장비용실험과 동풍계의 열탄두개선과 장비시험이다. 반유도탄핵탄두를 시험했는지 여부는 자료가 없다.

 

위성측량통제망은 1965년에 시작되었다. 동1성의 "710공정"에 이용되어, 1970년에 1단계가 완성된다.

1. 궤도측정. 154-II을탄 맥충레이다. 701-5 무원인도레이다, 다보륵빈이측속의(多譜勒頻移測速儀), 비상간섭의(比相干涉儀), 광각망원경, 160전영경위기, 150광학경위기.

2. 마이크로파 요측(遙測)

3. 930시스템

4. 717계산기 데이터처리

5. 통제센터, 108을 계산기

 

1970년대중기, 중,저궤도측정통제의 2단계가 완성되었다.

"원망"선은 새로운 180 레이다, 331레이저전영경위의, 120마이크로파 요측, 쌍빈측속설비를 갖추었다.

 

미사일은 골치아프다. 아무런 자료가 없다. 아마도 액체연료를 사용하는 것같다. 왜냐하면 JL-1이 1978년때, 아직 엔진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고속엔진은 이 상황에서는 사치이다. 당시 DF-61등 일련의 전략미사일계획이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액체에너지를 사용했다. "반격1호" 저층고초음속요격탄, 개념은 대체로 "고무신발"의 개념이었고, M5이상의 속도였다. "반격3호" 고층요격탄은 여전히 2중요격시스템개념이었다. 당연히 중국은 아직 힘에 부쳤다. "반격2호" 저층요격탄은 S-300의 기술개념이었다. 다른 것은 모른다. "640공정"의 개념은 아주 시대를 앞서가는 것이었다. 모택동에 대하여는 뭐라고 평가할 방법이 없다. 지금의 중국의 유도탄방어계획도 이 계획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으니까.

 

HQ-2는 1970년대중기와 1980년대 중기에 시험을 진행했다. 근거리지대지탄도미사일(DF-1?)을 격추시켰다. HQ-2의 속도는 1150m/s였다. "반격2호" 저층요격탄과 HQ-3은 기술이 겹친다. 기괴한 것은 HQ-3는 1974년에 모델을 완성한 후 중단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더욱 새로운 계획, 예를 들어 HQ-4와 같은 것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HQ-3는 고체엔진으로 보조했다. 액체동력위주인 쌍방향엔진이었다.

 

"863계획"은 여전히 비밀이다. 그러나, 일부 명칭은 이미 공개되었다.

 

군용전략레이저무기의 연구개발은 아무런 자료가 없다. 중국의 레이저수준은 기본적으로 세계수준이다. 일부 기술은 첨단이다. 1979년의 월남전때, 부대는 시험적으로 레이저방어안경을 사용한 바 있었는데, 당시 미국도 없었다. 결국 기술은 간첩에 의하여 도둑맞았다. 레이저, 입자, 마이크로파무기, 지향성에너지무기는 전략의 등급에 있어서 전세계에서 아직 실용화되지 않은 것들이다. 공법연구개발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아직 요원한 미래의 일이다. 레이저기술은 전문성이 너무 강해서, 기술동태에서 얼마간의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중국의 레이저기술이 앞서가는 것은 1960년대이후 정책을 정하고 엄청난 자금을 투입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느낄만한 성과를 이루어내지는 못했다. 비록 이것이 앞날이 밝은 프로젝트이기는 하지만. 1997년 미국은 중적외선화학레이저포로 두번에 걸쳐 궤도상에서 운행하던 폐기위성을 격추시킨 적이 있다. 그러나, 실용적인 전략레이저무기는 아직 요원하다. 하나는 에너지원의 문제로 핵에너지를 써야 한다는 것과 지향성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목표를 정확히 포지셔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에너지탄을 만드는 것보다 더욱 복잡하다.

 

1999년 중국은 "640계획"의 내막을 공개했다. 그리고, "TMD"를 개시할 것을 고려하였다. 정부에서 발표한 글에 "미사일방어"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중국이 지역방공시스템의 F/S검토를 하고 있다는 점은 이미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다. 목표는 북경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아마도 주강삼각주일 것이다. 공군의 제1세대 자동화방공시스템은 1975년에 연구개발되었고, 이미 몇 가지가 알려져 있다. 그리고 수입레이다를 사용한 민용항공통제망도 있다. S-300급의 미사일을 만드는데는 이미 아무런 기술상의 제약이 없다( FT2000반복사유도탄같은 것). 그러나, 전2급(箭2級)은 아직 목표포지셔닝에 곤란을 겪고 있다. C21도 곤란하다. 전체적인 공법연구개발은 개별적인 기술을 모두 보유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TMD"는 요원한 일이다. 새로운 미사일을 개발하려면 돈이 많이 든다. 그리하여 중국에서는 지역반공시스템을 얘기하고 있고, TMD를 얘기하지 않는다. 그저 FT2000과 S-300은 분명히 중첩된다. 이유는 모르겠다. S-300기술을 이용하여 자신의 "TMD"를 개발하려는 것은 아닌지도. 공군은 "TMD"를 시작하는데 특별한 작전목표가 없다. 가난한 인도를 상대한다는 것이 아마도 유일한 현실적인 이유가 되지 않을까.

 

해군도 지역방공계획을 가지고 있다. 속도는 공군보다 빠르다. 당시에는 이상했는데, 지금은 알 것같다. 해군은 "2020계획"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