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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징기스칸)

징기스칸의 서로 다른 세 가지 이미지

by 중은우시 2007. 3. 4.

 

 

이슬람문화, 몽고문화, 유가문화는 동방역사상 영향이 깊은 삼대문화이며, 현재 인류문명의 형성과 발전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세계문명사상에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고금의 중외학자들이 모두 이를 중시하는 것이다. 몽고문화는 크게 보면 중국유가문화의 한 갈래이다. 그러나, 내용으로 보면 그것은 중국의 유가문화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한 징기스칸을 놓고, 이슬람문화, 몽고문화, 유가문화에서 서로 다른 세가지 역사적 이미지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1. <<집사(集史, 중국에서는 史集이라고 함)>>의 진주지검(眞主之劍)

 

징기스칸의 손자인 욱렬올(旭烈兀)은 1256년 목자이국(木刺夷國)을 멸망시켰고, 이란 영토전부를 정복하였다. 이어서, 1258년, 바그다드를 함락시키며, 이슬람교의 하리파 압바스조를 멸망시킨다. 이란을 위주로한 서아시아지구에서 몽고대제국판도내의 일한국이 건립된 것이다. 일 한국의 건립이후 반세기가 지난 후 욱렬올의 증손자인 제7대 일 칸인 화찬(和贊)은 징기스칸가족을 위시한 몽고통치계급의 역사를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이슬람교력700년(서기1300년 9월 15일-1301년 9월 5일) 그의 재상인 라시드 앗 딘에 상세한 몽고역사를 편찬하니 그 이름이 <<집사>>이다. 이 책은 내용이 풍부하고, 범위가 넓은 역사거작이다. 여기에는 중세기 각국, 각민족의 역사가 포함되어 있다. 몽고사를 연구하고 북방유목민족사를 연구하는데 아주 가치있는 자료이다.

 

라시드 앗 딘은 몽코 칸을 모시던 많은 이란관리들과 마찬가지로, 이슬람교도이다. 그의 <<집사>>에는 여러차례 "진주(眞主, 알라신)", "알라", "최고진리"등의 징기스칸을 찬미하는 글자들이 나타난다. 이슬람문화에서 <<코란>>은 이슬람교법의 기초이고, 알라의 뜻에 따라 나왔다는 신성입법사상이 확립되어 있으며, 알라의 최고의지를 확립하고 있다. 통치계급의 언행은 알라의 계시이므로 신앙자들이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며, "모든 계시는 반드시 준수하여야 하는 알라의 명"이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그가 보기에, 알라는 바로 신이고, 알라의 한마디 한마디는 그것의 선악에도 불구하고 모두 신의 계시가 되는 것이다. 모두 그들 교도들의 행복을 위하여 하는 것이다. <<집사>> 제1부의 서언에서는 라시드 앗 딘은 특별히 아브라함은 알라의 꿈속에서의 계시에 따라, 아들을 죽여 알라에게 제사지낼 결심을 하고, 알라는 아브라함의 성의를 찬양하여 그에게 부를 내려 주었다고 적고 있으며, 그의 후예들이 번성하며 많은 선지자, 성현, 군주가 나오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이로써 사람들은 아무런 동요없이 이런 신의 말을 믿어야 한다고 하였고, 그렇게 해야만 후손들이 흥성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라시드 앗 딘은 그의 저작 <<집사>>에서 대량의 화려한 수사를 동원하여 계속하여 징기스칸과 그의 후예를 우두머리로 한 몽고귀족을 찬양하고 있다. 징기스칸은 일한국의 "진주(眞主)"라고 하고, "최고진리"의 집행자라고 한다. 그는 징기스칸이 한 행위는 모두 진주의 의지의 체현이라고 한다. "그의 신분이 고귀하고, 그의 본성이 아름답고 마치 보석중 드물게 보는 진주와 같아서 그는 모든 민족의 위에 자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지배자와 최고통치자가 되었따" 동시에 그는 징기스칸이 부딛친 역경은 알라가 그를 단련시키기 위하여 특별히 설정한 것으로 본다. "징기스칸은 여러차례 역경에 부딛쳤는데...최고진리는 역경중에서 그를 구했다. 최고의 주의 의지가 일찌감치 징기스칸을 세계의 군주로 예정하였으므로, 그는 점점 발전했고, 그로 하여금 천신만고를 겪게 하였으며, 그에게 중임을 맡기기 위하여 단련시켰다" 또 다른 측면에서, 그는 사실기록의 방식으로 징기스칸등의 사람들의 모든 행위를 아무런 거리낌없이 기술하였다. 이 사서의 속에서 라시드 앗 딘은 여러 차례 징기스칸의 군사행동과 정책을 언급한다.

 

징기스칸이 한 도시를 포위공격할 때, 도시에서 약간이라도 저항하면, 징기스칸의 보복을 받았다. 징기스칸은 불화랄성(不花剌城)을 공격할 때, 저항에 부딛쳤다. 결과적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남자들을 3만여명 죽였고, 부인과 아이들은 노예로 삼았다. 징기스칸이 화랄자모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후 성내의 사람들의 저항에 골치아팠으므로 주민들을 전부 야외로 쫓아보내고, 그들중 수십만가량의 장인들은 따로 나누어 동방으로 압송한다. 청년과 부녀, 아이들은 포로가 되었고, 남은 사람들은 군대에서 도살했다. 사료에 따르면, 오만여 몽고병은 한 사람당 24명을 배분받았다. 이 정책에 의하여 성을 지키던 자들은 그저 투항해야 용서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투항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징기스칸의 병사들이 파리흑성의 아래에 주둔할 때 현지의 지도자는 투항하겠다고 청했고, 각종 식품과 예물을 바쳤다. 이어, 징기스칸의 부대는 인구점검을 핑계삼아 파리흑주민전부를 야외로 내보낸다. 이후 관례에 따라 병사들에게 나누어 살해하도록 한다. 이후 그들은 성앞의 언덕과 성벽을 부수고, 집과 거리를 불태운다. 이로써 파리흑성은 완전히 파괴된다.

 

여기에 징기스칸은 완전히 거친 영웅의 인상이다. 그러나, 라시드 앗 딘은 그렇게 묘사하지 않았다. 그는 징기스칸의 정벌전쟁은 "그는 집의 동량을 준비하고 이 건축을 강화하려년 무한한 노력과 비범한 박력을 가지고, 재난의 국토를 청소하고, 악적들의 나쁜 행적과 마귀가 만든 죄를 소멸시켰으며, 그가 강철검을 들어 내리치자, 악적들이 남긴 때는 떨어져 나갔다" 이로써 볼 때, 이슬람문화에서 알라를 믿지 않는 악마에 대하여 징벌을 가한 것이고 이것은 알라의 의지에 부합하는 것이다. 즉 정의의 검으로 악을 징벌한 것이다. 이 원칙에 기하여, 그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징기스칸이 행한 야만적인 모든 수단을 그대로 기록하였다.

 

2. <<몽고비사(蒙古秘史, 元朝秘史라고도 함)>>안의 강자

 

<<몽고비사>>의 원명은 Monggolvn Ni'uca Tobca'an(몽고륜 뉴차 톱카안)이다. 13세기 몽고제국이 몽고국의 역사를 기재한 역사적 거작이다. 주로 몽고문자로 기재한 궁중비사이다. 이에는 몽고 각 씨족 부락의 기원, 징기스칸의 조상족보와 본인의 평생, 오고타이칸의 통치전기의 일부활동을 기재하고 있다. 그리하여 몽고국의 건립전후의 사회조직, 정치군사, 경제생활, 부락전쟁등의 각방면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이다. <<몽고비사>>에는 징기스칸이 통일국가를 건립하기 위하여 한 활동외에 징기스칸의 모든 행위를 조금도 감춤이 없이 당시의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유목민족은 장기간 자연과 싸우면서, 간고한 환경에서 생활했다. 그리하여 충분한 모험정신과 진취적인 민족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들의 문명의 개화정도는 높지 않아서, 그들은 다른 문명의 도덕관이나 윤리관은 적었다. 유목민족으로서, 자원과 수요공급이 아주 타이트한 환경하에서, 잔혹한 생존경쟁을 거쳐 잔혹한 강자만이 성공적으로 살아남았다. 이런 '강력한 힘"만이 생존에 유리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을 숭상하지만, 이 "자연"은 우수한 자가 살아남고 그렇지 않으면 도태되며, 적자생존이라는 관념이 강하다. 즉 유목민족의 사냥물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관념하에, 징기스칸의 행위는 몽고인들이 보기에 정당하고 칭송받을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의 선조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아무런 거리낌없이 객관적으로 그러한 사실들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했을 뿐아니라, 그들은 심지어 실패자를 잔혹하게 대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러한 것도 영웅적인 행위로 칭송받았다. 마치, 자신들이 실패자라면, 승리자들도 그들에게 똑같이 할 것이라는 것처럼. 그래서 그들은 강자의 논리를 최고기준으로 하여 자신의 역사를 합리화했다. 이것은 "강력함" 그 자체가 몽고문화에서 칭송받는 긍정적인 가치로 인정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관념하에, <<몽고비사>>에서는 라시드 앗 딘의 <<집사>>에서 기재한 징기스칸의 도시도살행위가 여러차례 나타난다. 이뿐아니라, <<몽고비사>>에는 일부 개인사건을 통하여, 징기스칸의 잔폭한 행위도 기록하고 있다. 책안에는 징기스칸의 적수 주르친에게서 투항해온 불리발활(不里孛闊)과 징기스칸의 형제 별륵고태(別勒古台)의 씨름사건도 좋은 예이다.

 

"징기스칸은 하루는 불리발활에게 명하여 별륵고태와 씨름을 하도록 했다. 불리발활은 주르친에 있을 때, 불리발활은 손만으로 별륵고태를 잡았고, 발을 이용해 쓰러뜨렸고,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눌렀었다...별륵고태와 불리발활 두 사람에게 씨름을 하도록 한 것이다. 불리발활은 원래 이겨서는 안되어서, 일부러 쓰러졌다. 별륵고태는 힘이 모자라 제압하지 못하고, 그의 어깨를 누르고, 엉덩이에 올랐다. 뒤돌아 징기스칸을 보니, 징기스칸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별륵고태는 그 뜻을 이해하고는 그의 몸에 올라서 옷깃으로 목을 조르고, 허리를 눌러 힘으로 허리를 부러뜨렸다. 불리발활은 허리 부러지면서 말하기를 "나는 원래 별륵고태에게 패한 것이 아니다. 칸을 두려워했을 뿐이다...말을 마치자 죽었다."

 

징기스칸이 한번은 부하와 얘기를 하였는데, 거기에서도 그의 "초원영웅"의 본질이 잘 드러난다.

 

"징기스칸은 하루는 나얜부르구치에게 물었다. '인생에서 뭐가 가장 즐거운가' 그는 답했다. '봄에는 좋은 말을 타고, 손에 매를 가지고 사냥하며, 그가 싸우는 것을 보는 것이 가장 즐겁습니다.' 그러자 징기스칸은 부르구러등 여러 장수들에게 물어보았는데, 여러 장수들도 부르구치와 같이 답했다. 칸은 이렇게 말했다. '아니라. 인생에서 최대의 즐거움은 적을 이기는데 있다. 적을 쫓아가서 그의 모든 것을 빼앗고, 그의 처자들의 눈물이 얼굴 가득한 것을 보고, 그의 말을 타고, 그의 처와 딸을 취하는 것이다'"

아마도, 힘을 숭상하고 강한 자를 존중하는 것이 바로 징기스칸이 몽고영웅이 된 원인일 것이다. 바로 이런 강자에 대한 숭배, 초인에 대한 존경에서 우리는 살아있는 징기스칸의 이미지를 볼 수 있는 것이다.

 

3. <<원사(元史)>>중의 성왕

 

<<원사>>는 중국의 24사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비교적 체계적으로 원나라의 흥망을 기전체로 기록한 사서이다. 명나라 초기에 정부에서 편찬했다. 당시의 유학자인 송렴, 왕위가 총재가 되었다. "원사의 기. 지는 주로 <<원십삼조실록>>와 <<경세대전>>에서 자료를 구했다...편찬방법은 원재료를 직접 초록하는 방식을 취했고, 힘들여 가공하거나 윤색하지 않았다. 그리고 황급히 만들었으므로 오탈자가 여기저기 많이 나온다. 이로 인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은 24사중에서 가장 황당한 사서라고 부른다" 그러나, <<원사>>의 작자는 원재료에 대하여 아무런 수정을 가하지 아니항ㅆ으므로, 오히려 원재료의 면모를 볼 수 있는 곳이 많다. 그래서, <<원사>>의 신뢰성과 사료가치는 여전히 높다. 다른 사서로 대체될 수 없는 것이다. 중국사서의 편찬은 대부분 농후한 유가사상에 빠진 유가들이 만들었으므로, 중국의 사서 대부분은 일정한 정도 유가사상이 묻어난다. 이는 <<원사>>가 <<몽고비사>>, <<집사>>와 징기스칸의 행적을 기록하면서 여러군데가 다르게 된 이유이다. 이런 서로 다른 기재에서 유가문화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몽고비사>>와 <<집사>>에는 비록 '일대효웅'의 정복전쟁을 크게 찬양하였지만, 그의 야만행위에 대하여는 조금도 감추지 않았고. 진실하게 기록하였다. 놀라운 점은 유가문화의 환경에서 징기스칸의 잔혹행위에 관한 자료는 상당히 많이 여과되거나 빠졌다는 점이다. 그래서 유가의 관방기록에는 징기스칸은 더 이상 초원영웅이 아니고, 심지어 더 이상 세속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된다. 그는 이미 "경천법조"의 공능을 담당하고, "도통"의 담당자가 되어 있었다.

 

<<집사>>와 <<몽고비사>>에는 징기스칸이 일련의 정복전쟁을 통하여, 다른 작은 부락들을 신하로 삼았다. 그러나, <<원사>>에는 "이 때 황제의 공덕이 날로 커져서, 태적오 제부의 그 주인의 불법에 고통받고 있었는데, 황제가 인자한 것을 보고, 또한 옷과 말을 하사하자, 마음으로 기뻐하였다. 적로온, 제베, 실력가, 도랑지, 자랄, 망올등 여러 부족이 모두 의를 쫓아 투항하였다" 이를 보면, 징기스칸은 무력으로 각 부족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인의도덕'과 '웅재대략'으로 이를 실현한 것처럼 되어 있다.

 

유가문화는 항상 '글에는 도가 있어야 한다', '도를 따르지 군주를 따르지 않는다', '도통은 황통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도덕의식을 무한히 확대하여, 다른 각종 문화적인 표현을 모두 도덕과 도덕을 나타내는 도구로 취급했다. <<원사>>도 예외는 아니다. <<징기스칸본기>>에서 징기스칸의 영웅적인 이미지를 빌려서 도덕교육을 하는 공능을 알리고자 하였다.

 

중국의 고대사회에서, 하나의 왕조가 건립되는 초에는 갖은 방법으로 합법성을 표시하는 물건을 찾아서 그의 통치에 활용하려고 하였다. 이 합법성의 물건의 기원은 유가지식분자의 그에 대한 해석때문이다. 유가문화에서는 도통(道統)은 중국고대유가지식인들의 최고목표였다. '도통은 정통(政統)과 독립되어 있다'고 강조했다. 동시에 그것은 유가문화의 입신의 근본이었다. 도통이 정통과 분리되어 있으므로, 중국전통문화의 전승자인 지식인은 원나라에 합법적인 지위를 부여하기 위하여, 징기스칸이라는 개국황제의 영웅이미지를 교육할 필요가 있었고, 그를 "개명성군"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었다. "도를 따르고, 군주를 따르지 않는다"는 원칙을 따르자면 징기스칸을 유가화할 필요가 있었고, 동시에 유가문화내에는 통치자는 역사가들에 의하여 신화를 조성해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통치의 합법성을 위하여 하나의 신화를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명나라는 비록 원나라의 통치를 전복시켰지만, 원나라는 중국유가문화에서 떼어낼 수 없는 하나의 문화전통이었다. 그리하여 명나라에서 생활하던 유가지식인들은 원나라의 통치에 대하여도 합법성을 부여하고자 하였다. 사서를 편찬할 때 원나라 통치의 합법성의 원천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고, 비록 없다고 하더라도, 날조하여야 했다. 그리하여 유가의 사관들은 원나라통치의 합법성의 근원을 징기스칸에게서 찾았다. 이 과정에서 사관은 징기스칸을 '초원영웅'의 이미지를 모두 지워버릴 필요가 있었다. 조작을 통하여 징기스칸은 '성군'으로 변모했다. 유가문화는 징기스칸을 '경천법조'로 모시기 위한 작업이 완성된 것이다.

 

이 세가지 문화에서 징기스칸의 이미지를 분석하면, 우리는 쉽게 이런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서로 다른 문화배경하에서, 정치권력의 의식형태의 기초도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군왕의 이미지도 이로 인하여 서로 다르게 되는 것이다. 한 명의 징기스칸인가? 아니면 세 명의 징기스칸인가? 절대적으로 객관화된 역사가 없다면, 그저 서로 다른 문화적인 가치를 잣대로 하여 해석한 역사기록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