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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성씨

왕(王)씨가 왜 많은가?

by 중은우시 2007. 5. 9.

글: 관정상방(關鄭尙芳)

 

2007년 4월 24일에 공안부 치안관리국은 최신호적통계를 발표했다. 중국의 성씨중 2천만명이상인 것은 모두 10개로 "왕장이유진(王張李劉陳), 양황조오주(楊黃趙吳周)"이다. 1천만명이상인 것은 모두 12개로 "서손마주호곽(徐孫馬朱胡郭), 하고림나정량(何高林羅鄭梁)"이다. 그중 왕씨는 9288만명으로 1위이고,이씨가 9207만명으로 2위, 장씨가 8750만명으로 3위이다.

 

옛날의 백가성(百家姓)은 송나라초에 절강사람이 만들었고, 438개의 성씨를 수록했다. 당시 황제의 성은 조(趙)씨이고, 절강의 오월왕의 성씨가 전(錢)씨여서, 당시의 고귀한 순서에 따라, "조전손리(趙錢孫李), 주오정왕(周吳鄭王)"으로 적었었다. 이것은 인구순서대로 나열한 것이 아니다. 만일 복건 사람이 인구순으로 편찬했다면 "진림(陳林)"이 머리를 차지할 것이다. 왜냐하면 복건에는 이런 말이 있기 때문이다: "천하에 진림이 절반을 차지한다"

 

이씨, 장씨가 많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느끼고 있는 바다. 중국에서 어떤 어떤 사람이라고 얘기할 때 종종 "장삼이사(張三李四)"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생각도 못하게 왕씨가 더 많았다.

 

왜 왕씨는 이렇게 많은가? 송나라때 정초(鄭樵)가 쓴 <<통지. 씨족략(通誌. 氏族略)>>에서 이미 설명하고 있다.

 

<<통지. 씨족략 4>>: "왕씨는 천자의 후예이다. 기원은 하나가 아니다: 희(姬)성의 왕도 있고, 규()성의 왕도 있고, 자(子)성의 왕도 있고, 노(虜)성의 왕도 있다." 원래 왕씨는 한족 제왕의 후손 이외에 적지 않은 다른 소수민족에서 왕을 칭한 사람으로부터 유래하기도 했다.

 

이 책에서는 먼저 주(周)나라의 왕인 희(姬)성에서 온 일파를 설명하고 있는데, 3가지 정도의 기원이 있다: "낭야(琅邪), 태원(太原)의 왕씨는 주영왕(周靈王) 태자 진(晋)이 직간하다가 서인으로 폐해졌는데, 그 아들인 종공(宗恭)이 사도가 되었고, 사람들이 왕가라고 불렀다; 경조(京兆), 하간(河間)의 왕씨는 주문왕의 15째아들인 필공고(畢公高)의 후손인 필만(畢萬)이 위(魏)에 봉해지고, 나중에 진(晋)을 분봉받았다. 진나라에 멸망되어 자손이 분산되었는데, 세상 사람들이 왕가라고 불렀다; 위나라의 소왕동이 무기를 낳았는데, 신릉군이 되었고, 신릉군이 간우를 낳고, 간우가 비자를 낳았다. 진나라가 위나라를 멸망시키자 비자는 태산으로 도망갔다. 한고조가 그를 중견으로 불러 난릉후에 봉했다. 세상사람들은 그가 왕족이었으므로, 왕가라고 불렀다. 이들은 모두 희씨에서 유래된 왕씨들이다"

 

또한 우순(虞舜)의 규()씨에서 유래된 경우에 대하여는 "북해(北海), 진류(陳留)에서 사는 사람들은 모두 순임금의 후손이다. 그의 선조인 제나라의 전씨는 진나라에 멸망당했는데, 제나라사람들이 왕가라고 불렀으므로 규씨성이 왕씨가 되었다"

 

또한 은상(殷商) 왕족인 자(子)씨에서 유래된 경우에 대하여는 "급군(汲郡)에 사는 사람은 왕자 비간(比干)의 후손이다. 이것이 자씨성의 왕씨이다."

 

이런 씨족들은 모두 진나라이전의 조상들이 왕을 지낸 적이 있어, 세상사람들이 '왕가(王家)"라고 불러서 왕씨가 되었다는 것이다. 진나라이후의 최고통치자는 황제이므로 더이상 '왕가'라는 칭호는 없게 되었다. 그러나, 적지 않은 한족이 아닌 왕씨들이 추가된다.

 

"하남(河南)에 사는 왕씨는 가류(可類)씨이다; 풍익(馮翊)에 사는 사람은 겸이족(鉗耳族)이다; 영주(營州)에 사는 사람은 원래 고려(高麗)에서 왔다; 안동(安東)에 사는 사람은 원래 아포사(阿布思)이다. 이들은 모두 오랑캐성(虜姓)에서 온 사람들이다"  

 

"왕씨는 기원이 아주 다양하며, 그래서 왕씨의 족속은 가장 번성하다"

 

백가성의 각성에는 망(望, 우리나라의 본관에 해당)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이 성이 기원한 것으로 본다. 사실은 여기에 주석을 달아놓은 것은 가장 주요한 것 또는 가장 유명한 곳을 얘기해놓았는데, 왕씨에 대하여는 "태원(太原)"만을 언급하고 있다. 사실 <<광운. 양운>>에는 왕씨에 21개의 망이 있다고 적고 있다.

 

1. 태원, 낭야 ; 주영왕의 태자진의 후예

2. 북해, 진류; 제왕 전화의 후예

3. 동해; 희(姬)성에서 유래

4. 고평, 경조; 위나라 신릉군의 후예

5. 천수, 동평, 신채, 신야, 산양, 중산, 장무, 동래, 하동; 은왕자 비간의 후예

6. 금성, 광한, 장사, 당읍, 하남.

모두 합쳐서 21개망이다.

 

이외에도 사성(賜姓)을 받은 경우도 있고, 왕씨성을 사칭하는 경우도 있다. 한나라때의 연왕 단의 현손인 가는 왕망에 의하여 왕씨성을 받았다. 오대때의 유거비(劉去非)는 자기마음대로 성을 고쳐서 왕보의로 개명했다.

 

다른 민족에서 성을 바꾼 경우도 많다. <<통지>>에는 네가지 예를 들고 있다: 가류씨는 실제로 서위의 기빈씨의 조상인 왕웅을 가르킨다; 겸이족은 서강의 겸의씨의 조상인 왕계를 가리킨다; 고려는 왕씨고려의 개국왕인 왕건을 가리킨다; 아포사는 당나라번진의 성덕군절도사인 왕정주를 가르키는데, 원래 회흘의 아포사의 후예이다.

 

사실 이외에 아주 유명한 수나라때의 왕세충도 원래의 성은 지(支)씨로 월지국 사람이며, 인도유럽족에 속하는 백인이다. 부친이 왕찬의 양자로 들어가서 왕씨가 되었다. 수당시대에 스스로 정왕, 정제(鄭帝)를 칭했다.

 

돈황의 사본에는 <<백가성>>외에 <<성씨서>>의 잔본이 남아 있다. 첫구는 "장왕이조(張王李趙)"로 시작한다. 아마도 이것은 더욱 원시적인 백가성이 아닐까 싶다. 이곳의 장왕리는 모두 가장 앞에 놓여 있다. 한나라 응소의 <<풍속통의>>의 '성씨편'에도 이미 "장왕이조는 황제의 사성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장왕리조가 자고이래로 대성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