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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중국의 부동산

충칭(重慶)의 "알박기(釘子戶)" 사건

by 중은우시 2007. 4. 16.

 

 

글: 오기(吳琪). <<삼련생활주간>> 기자

 

깊이 파인 구덩이에 높이 솟아 있는 2층의 외로운 작은 집, 굴삭기의 굉음에 둘러싸여 있다. 사방의 빛나는 상업빌딩을 배경으로 하여, 이 그림은 중국도시의 "철거"와 "건설"을 상징하는 모습이 되었다.

 

최초의 사건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하여 설왕설래한 후, 더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의 적극적인 의의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했다: 오평(吳萍)일가의 반대로 작은 집이 2년간 강제철거당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철거사상 큰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오평 본인, 개발상, 구룡파구정부(九龍坡區政府)는 공개적으로 각자의 목소리를 충분히 냈다. 중경시정부 계획협회회장, 시계획국 전 부국장인 진재주는 이렇게 말했다. "이전에 정부부서는 도시계획을 기술적인 일로 생각했다. 현재는 그것이 공공정책의 선택이라는 점을 더욱 더 인식하게 되었다" "개인이익은 경시되어서는 안되고, 사적권리와 공공이익의 가운데에서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오평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오평의 진정한 신분

 

기자가 방문한 오래된 이웃집사람은 오평이 일찌기 양가평백화공사(楊家坪百貨公司)에서 판매원을 했었다고 한다. 양가평백가공사의 기록에 의하면, 오평은 1957년생이고, 중경 구룡파구 이가타 고정만의 사람이다. 집안에는 자녀로는 딸이 하나 있고, 이외에 형 하나와 동생 하나가 있다. 그녀는 1975년 고등학교졸업후, 집안에서 2년간 쉬다가 1977년, 추천을 받아 첫번째 직장을 갖게 되었고, 바로 이가타백화공사(李家百貨公司)에 소속된 마왕평백화상점(馬王坪百貨商店)의 영업원이었다. 주요 업무는 베(布)를 파는 것이었다.

 

1981년 9월, 오평은 양가평백화공사에 입사했다. 오평이 양가평백화공사에 입사한 자료에 따르면, 그의 부친은 중경시 종축창(種畜廠)의 퇴직노동자이고, 모친은 이가타음식서비스공사에서 일을 했다. 양가평백화의 진서기에 따르면, 1980년대중반 오평은 질병으로인한 퇴직절차를 신청했고, 이때부터 양가평백화에 출근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사관계는 회사에 남겨두었고, 이 곳에서 질병으로 퇴직한 직원의 대우를 받아 급여를 받았다.

 

기자가 오평의 출생지인 이가타의 고정만에 갔을 때, 이가타음식서비스공사의 오래된 직원인 조모는 오평의 모친인 김정용(金正蓉)은 확실히 그 곳의 퇴직직원이라고 하였다. "그녀의 부친도 중경시 종축공장에서 일했다. 그들 둘은 모두 하급간부이며 사무실에서 일을 하였다. 지금은 두 사람 다 돌아가셨다" 이가타는 구룡파구의 중심지이고, 국영의 큰 공장들이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 중경시면방6공장, 모방공장, 수륜기공장, 종축공장등이 모두 이 곳에 있다. 나중에 이가타는 파남구(巴南區)로 획정되었고, 구룡파구의 중심은 양가평으로 바뀌었다. 그리하여 이가타부근은 양가평만큼 번성하지 못하였다.

 

50여세된 장모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의 여동생이 오평과 같은 반에서 공부했다고 하였다. "중경시 34중학을 졸업하였다. 오평은 중학교정도의 학력수준이다. 그 때 그녀는 마르고 키가 컸으며 그저 보통이라고 느꼈다" 양무가 오평이 일찌기 강남일지화(江南一枝花)라고 불리웠다는 데 대하여 조모와 장모는 모두 입을 삐죽였다. "누가 그녀를 일지화라고 불렀단 말인가? 중경의 여자들은 모두 예쁘다. 그녀의 반에도 그녀보다 예쁜 여자들이 수두룩했다. 이곳의 모방공장, 사공장에도 예쁜 여자는 널렸다"

 

오평이 자기의 부친이 검찰관이라고 하고, 모친이 감사계통에서 일하였다고 한 데 대하여도, 오평의 이웃은 명확히 말했다. "불가능하다. 네가 어디가든 물어보면 알 수 있다" 오래된 이웃은 이곳은 국영공장이 집중된 곳이고, 오평의 부친은 확실히 배운 것이 많은 편이었다. 그리고 얻너 사람은 오평의 부친이 해방전에 변호사업무를 한 적이 있다고도 말했다. 오씨집안은 자녀가 적었고, 부모는 모두 국영기업의 하급간부였다. "우리 이 지역에서는 가정환경이 괜찮은 편이었다" 오평이 피아노를 칠 줄 안다는데 대하여는 이웃들은 다시 입을 삐죽이면서 아니라는 태도를 나타냈다. "우리는 모두 그녀의 집에 가보았다. 무슨 피아노냐. 그녀는 피아노칠 줄 모른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녀는 마왕평백화에서 판매원을 할 때, 현지의 시내버스회사 기사인 대(戴)모와 결혼했다고 한다. 나중에 대모는 상해로 일하러 가고, 오평은 양가평백화로 옮겨서 일하게 되면서 두 사람은 이혼했다. 대모의 동료인 장모는 이렇게 말한다. 오평이 그 때 다른 사람들에게 남긴 이미지는 "책보는 것을 아주 좋아했고, 성격이 아주 불같았으며, 말을 잘했고, 법률도 알았다"는 것이다. 오평이 법률에 대하여 비교적 잘 안다는 얘기에 대하여 이웃들은 이렇게 추측한다. "그녀의 옛날 올케가 구룡파구법원의 서기였다. 오씨집안은 예전에 소송을 한 적이 있는데, 시중급법원까지 간 적이 있따. 그녀들은 우리 보통사람들과 비교한다면 법률을 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오평과 오건(吳健)은 모두 오평은 크게 장사를 했었다고 말한 바 있다. 양가평의 이웃들은 이를 듣고는 그저 "허허"하고 웃고 만다.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고? 그 술집이 무슨 이름이고, 전국에서 무슨 무역을 했는지 그녀에게 확실히 말해보라고 해라" 이웃들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오건은 일찌기 이가타의 오금공사(五金公司)에서 일했다. 나중에 혼자 나와서 장사를 했는데, 한때는 백만위안까지 자산이 늘었었다. "동풍찬청(東風餐廳)"은 1980년대말 오씨집안이 국영기업을 도급받아 운영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실제로 오건이 투자한 것이라고 한다. "아마도 계속 손실을 보았을 것이다. 그때 양가평은 지금처럼 번화하지도 않았고, 와서 식사하는 사람들도 가지각색이었으며, 밥먹고 돈을 내지 않는 경우도 많아서 식당영업은 그다지 잘되지 않았었다" 양무(楊武)가 철거를 거부한 옛날 집을 최근들어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어 "옛맛 철장화과"를 열었는데, 임대료가 3000위안이다. 오평이 말한 것처럼, 그녀가 전국에 무역을 하던 큰 장사꾼은 아니었던 것이다. 오평의 이야기에는 그녀가 아마도 오빠의 이야기, 부친의 이야기를 모두 묶어서 자신이 한 것처럼 말한 것같다.

 

양가평백화의 노동조합 섭주석에 따르면, 현재 오평의 매월 급여는 650위안이라고 한다. 관련 공과금을 공제하면, 매월 300여위안을 받아간다. 2,3개월에 한번씩 오평은 찾아와서 찾아가는데, 가장 최근은 올해 구정 며칠 전이었다고 한다.

 

"알박기"의 원가와 거는 것

 

학흥로(鶴興路)의 이전부지는 대문이 잠겨있다. 오평이 사람들이 문앞에 모이기를 기다리고 있다. 광주, 성도등지에서 오평을 성원하러 오는 사람들이다. 대문앞에는 표어를 붙여 사람들에게 자기는 '억울'하다고 밝히고 있다. 백여명의 기자들도 날개를 펼치고 기다리고 있다. 길입구를 바라보며 오평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3월 29일부터, 오평은 이전처럼 매일 오후 공사현장에 나타나서 '기자회견'을 열지 않았다. 이때 매체의 보도는 오평에게 완전히 유리하게 나가지는 않았다. 오평의 소령통(小靈通, 우리나라의 시티폰과 비슷한 휴대전화)은 보통 연결되지 않는다. 아주 드물게 연결되더라도 그녀는 기자인터뷰를 거절한다. 그리고는 "좀있다 건너가겠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오평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이 매우 적고, 그녀는 한번도 자신의 현재 주소를 밝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기자들이 찾아오는 것을 극력 막고 있다. 오평이 법원에 제공한 주소는 그저 철거되는 옛날 집일 뿐이다. 현재 오평이 받아들인 인터뷰에서는 그녀가 정보를 공개하는 것을 확실히 통제하고 있다.

 

깊이 조사하자, 기자는 재미있는 현상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오평을 알고 있는 사람일수록, 오평의 '알박기'행위에 대하여 냉정하고 방관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뉴스를 통하여 오평을 아는 사람일수록 아무런 유보없이 그녀를 지지한다는 것이다. 매체가 벌떼처럼 몰려들 때, 양무는 가스파이프와 생활용품을 들고,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았으며, 집이 없어지면 사람도 없다는 결심을 나타내는 득했다. 그러나,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전에 2년정도 그들은 이미 이 곳에 살지 않았다"

 

개발상과 오평이 제공한 정보를 종합하면, 몇 가지 기본사실은 확인된다. 2004년 여름 철거를 시작한 이래로, 평가가격으로 하면 오평의 집의 가격은 247만위안이다. 비록 오평이 "나는 한번도 돈을 받고 이사갈 생각을 한 적이 없고, 개발상에게 돈얘기를 한 적이 없다"고 얘기하지만, 개발상이 내놓은 350만위안의 최고배상을 거절한 후, 작년 9월, 오평은 두가지 합계 500만위안의 배상을 요구한 바 있다.

 

그녀가 요구한 배상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2004년 10월 5일 철거기간만료후 2006년 9월 14일까지 합계 23개월간 매평방미터당 200위안/월씩하여 100.74만위안(임시과도점포의 평균가격으로 계산). 그리고 이 기간동안 이주자들은 물, 전기의 공급이 끊겼고, 교통도 끊겼으므로, 그들은 영업을 할 수 없었다. 이리하여 거대한 경제손실을 입었으므로, 1993년 3월부터 2004년 10월까지 합게 138개월동안 매월직접 경제손실 3만위안 합계 414만위안이 그것이다.

 

2006년 9월 18일, 쌍방은 제2차협상을 시작했다. 오평은 다시 "옥상 10평방미터의 물탱크, 85평방미터의 불법건축물에 대한 보상, 도난물건보상 12만위안, 인테리어보상 18만위안"을 요구했다. 그리고 빠른 시일내에 동일한 면적의 과도점포를 제공해줄 것을 요구했다.

 

금년 1월 11일, 구룡파구 가옥관리부서는 행정재결서를 하달했는데, 양무로 하여금 15일내에 스스로 이주하도록 한 것이다. 이후 제3차협상에서 개발상은 다시 양보하여, 철거경계선내와 동일한 면적의 거리와 접한 점포와 이층을 제공하기로 하였는데, 이것은 원래의 철거방안에서는 없는 것이고, 오평의 요구에 따라 제공하기로 한 것이다. 동시에 오평이 제3차협상에서 제출한 요구에 대하여 72만위안의 배상을 제공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평이 지급하여야 하는 새집과 옛집의 사이에는 약70만위안의 차액이 있었다.

 

오래된 주민 모철은 이렇게 말한다. 이주한 집에는 공용건물도 있고, 사용건물도 있다. 중경구룡파중의약, 구룡파가옥관리소, 음식서비스공사등도 모두 이주했다. 구룡파중의약은 700-800평방미터의 5층집을 이주했는데, 최종적으로 800여만위안의 철거비를 받아갔다. 대다수의 사용건물은 모두 1940년대에 건축한 나무기둥구조이어서 아주 낡았고 위험했다. "5,60세된 남자라도, 집을 밀면 흔들릴 정도였다" 오평은 1993년에 다시 벽돌혼합구조의 2층집을 다시 지었는데, 사용건물중에서는 가장 좋은 편이었다.

 

평가기관의 개입으로 양가평의 철거보상가격은 법률적인 확인을 받게 된다. 중경금지자산평가유한공사의 당시 법인대표인 이일병은 이렇게 말한다. 회사는 국가의 관련규정에 따라 평가가격을 제출했다. "우리는 독립적으로 이 가격에 대하여 법률책임을 질 것이다" 2004년 1월 1일부터 <<중경시가옥철거평가규정>>이 실시되었다. "평가기관의 득표수량이 투표수량의 50%를 넘으면, 그 프로젝트의 평가기관으로 직접 확정된다"는 규정이 있다. 그러나 철거평가의 목적은 "피철거되는 가옥의 화폐보상금액을 확정하기 위하여 그 부동산시장가격을 평가하는 것이다"

 

개발상은 "가옥철거허가증"을 받은 날을 "평가시점"으로 한다. 평가회사는 이 때의 철가가옥이 같은 지역 동일용도의 가옥가격과 비교하여 철거보상가격을 확정한다. 2001년 국무원이 반포한 <<도시가옥철거관리조례>>에 의하면, "가옥철거보상금액은 철가가옥의 같은 지역, 같은 용도의 신규건설상품가옥거래평균가격의 70%보다 낮아서는 안된다" 오평이 제출한 인테리어보상에 대하여 관련규정은 "실내장식은 5년을 초과하면 그 장식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실내장식이 5년이내이면, 매년 20%씩 감가상각하여 계산한다" 이일병에 의하면, 실제상황은 규정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이다. "어떤 오래된 집은 특히 낡아서, 만일 감가상각으로 계산하면, 보상금액은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같은 지역의 같은 용도의 신규건설상품방거래가격의 70%로 계산하는 것이 철거이주민들의 이익에 대한 하나의 보장이 된다는 것이다.

 

이일병은 중경에서 가장 먼저 부동산사업을 시작한 사람이다. 그녀의 기억에 의하면, 철거최초에는 정부도 경험이 없었따. 매호인구로 계산하여 건축면적을 제공했으므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친척과 친구를 호구에 집어넣어 이전될 것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나중에 거주면적에 따라 하나를 철거하면 하나를 주는 것으로 하였다. 그러다보니, 중심지역에서 교외지역으로 옮겨가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불공평했다. 비교하자만 지금 실시하는 철거보상비용평가는 이미 상대적으로 과학적인 계산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개발상의 대표인 중경정치업유한공사 부총재 요건명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철거는 매매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들이 얻은 양가평의 토지에서 8000평방미터의 용지면적을 무상으로 인프라, 도로건설에 제공한다. "경전철역, 대건로와 시내버스환승역을 건설한다. 우리는 이전에는 이런 것들을 일부러 광고선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많은 회사들이 모두 인프라, 도로에 공헌을 하기 때문이다" 매체가 여러번 언급한 <<물권법>>에 관하여도 요건명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국가, 집단, 개인의 삼자간의 이익이 균형을 맞추어야 하며, "법제사회는 하나의 권리가 지고무상이고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삼자의 권리가 평등하게 보호받고 제약받아야 하는 것이다" 요건명은 만일 회사의 이익만 본다면, 오평의 500만위안의 배상에 동의하는 것이 오히려 적합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매일 우리가 입는 이자손실만 6만위안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280호의 철거에 호응해준 사람들에게 불공평하게 된다. 누가 그들의 권리는 보장해주겠는가?"

 

철거이주민 280호의 운명은 서로 다르다. 모철의 가전유지보수가게는 경전철쳑아래의 임시점포로 옮겼다. 모철은 이에 아주 만족한다. "지금 양가평은 땅값이 금값이다. 우리 중경에서 누구라도 이런 황금해안의 십여평방미터의 점포를 가진다면, 그것은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탄자구로 이주한 양씨일가는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다. 양씨는 비록 탄자구의 십여층높이의 집에 들어가 살고 있지만, 이 집은 2005년부터 계속 수리하고 있다. 방의 바깥에는 사다리같은 것들이 많이 놓여 있다. 양씨에 의하면 건물의 품질이 너무 떨어져서, "외벽의 누수현상이 심하고, 화장실도 자주 물이 샌다. 외벽만 3번이나 수리했지만, 전혀 좋아지지 않고 있다" 철거전에 양씨는 양가평에 18평방미터의 점포를 가지고 있었고,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어 화과점을 열고 있었다. 매월 임대료가 300위안이었다. 탄자구로 이사온 후에 양씨는 임대수익을 얻을 수 없게 되었고, 40여평방미터의 저급한 새집을 가지고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게 되었다.

 

양씨는 비록 그는 평가회사에 대하여 찬성표를 던졌고, 당시 확실히 5개의 A급 평가회사가 왔었다. "그러나 우리는 무얼 알았겠는가. 모두 학력도 없었고, 어디가 좋고 어디가 나쁜지 어떻게 알겠는가?" 최종적으로 투표에 참여한 사람은 적었고, 그도 자기가 무슨 권리가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구룡파가옥관리국은 이주가 아주 어려운 문제이며, 모두 만족하는 방법을 찾기는 힘들다고 하였다. 현재 아직도 법률법규상 정부가 계획을 세우기 전에 반드시 주민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는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