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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지리

역사상 "방원팔백리"의 양산박(梁山泊)이 존재했는가?

by 중은우시 2007. 4. 4.

글: 오월(吳越)

 

<<수호전(水滸傳)>>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모두 "수박양산(水泊梁山)"을 알 것이다. 그곳은 108명의 호걸들이 모였던 곳이다.

 

산동성에 예전에는 양산현(梁山縣)이 없었다. 현재의 양산현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설치한 것이다. 이 양산현내에는 확실히 양산(梁山)이라는 산이 있다. 그러나, 이 산은 겨우 해발 197.9미터의 작은 산으로 웅장하지도 않고, 험준하지도 않다. 절대 <<수호전>>에서 말하는 모양처럼 "사방이 높은 산이고, 중간은 평지이며, 완자성, 충의당과 6관8채를 두고, 산의 아래에는 금사탄, 압취탄, 요아와가 있으며 산의 주위는 방원팔백리인 양산박"이 있는 그런 곳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방원팔백리"의 양산박은 도대체 있기는 한 것인가?

 

<<수호전>>보다 빠른 원나라의 잡극에 나오는 양산의 기세도 보통은 아니다. 고문수의 <<흑선풍쌍헌공>>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채의 이름은 수호이고, 박의 이름은 양산인데, 종횡으로 강과 항구가 1천개이고, 사방이 방원 팔백리이다. 동으로는 바다에 연결되고, 서로는 제양에 접하며, 남으로는 거야, 금향과 통하고, 북으로는 청(靑), 제(濟), 곤(衮), 운()에 닿아있으며, 72개의 하항(河港)이 있고, 톤수백의 전선이 있다. 36개의 연태루에는 백만군마의 양식과 풀이 모여있다" 고문수는 동평부(지금의 산동성 동평현) 사람이다. 양산박은 바로 동평부의 관할하에 있었으므로, 현지인으로서 그는 어느 정도 문학적인 과장은 했겠지만, 이렇게 사실과 어긋나게 쓸 수야 있었겠는가?

 

<<수호전>>은 원나라 잡극보다 늦게 나타났다. 소위 "방원팔백리의 양산박"은 바로 원잡극의 '방원팔백리"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현재의 동정호(洞庭湖)의 직경이 1백리가 되지 않고, 태호(太湖)의 직경도 1백리가 되지 않는다. 중국과 러시아가 공유하고 있는 흥개호(興凱湖)의 남북최장도 2백리가 되지 않는다. 만일 양산박의 원주율로 계산한다면 방원8백리는 직경도 2백리이상이어야 한다. 만일 그렇다면, 중국제일호수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기 때문에 청나라때 <<수호전>>을 연구한 학자는 대부분 이것이 사실이라고 믿지 않고 그저 작자가 과장하여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송강의 이야기의 핵심장소를 양산박에 둔 것은 작자가 어느날 흥이 일어서 한 것이거나 아무렇게 배치한 것은 아니다. 송나라때에는 그 곳에 분명히 큰 호수가 있었고, 확실히 도적이 출몰하는 곳이었다.

 

양산일대는 산동의 서남쪽과 하남의 동쪽이 된다. 양산현은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된 이후에 설치된 것이고, 그 이전에는 수장(壽長), 동평(東平), 문상(汶上), 양곡(陽谷), 운성(鄆城)등의 관할을 받았다.  실제로는 이 다섯곳의 어느 곳도 관할하지 않는 결과를 낳았고, 오랫동안 비적들이 많이 출몰하게 되었다. <<송사. 포종맹전>>에 의하면 "양산박에는 예로부터 도적이 많았다"는 기록이 있다.

 

송사전문가인 상해사범대학 우운남 교수에 의하면, 양산의 원명은 양산(良山)이엇다. 서한때 양효왕(梁孝王)이 이 곳에서 사냥을 한 적이 있어서 양산(梁山)으로 개칭했다. 양산의 남쪽은 원래 대야택(大野澤)이 있던 곳이고, 북쪽은 황하하류의 평원과 이어져 있다. 오대시기의 후진 개운원년(944년)에 황하가 활주(滑州, 지금의 하남성 활현 동쪽의 구활현)에서 둑이 무너져 범람했고, 강물은 동쪽 수백리를 덮쳤으며, 물이 양산을 둘러싸고 하나의 거대한 호수를 이루었다. 북송 천희3년(1019년)에 황하는 다시 활주에서 둑이 무너져 호수면적이 확대되었다. 경력7년(1047년) 한기는 운주지사를 맡았는데, 양산박을 지나면서 지은 시에 수향택국이 엄청나게 넓다고 묘사한 바 있다. 희녕10년(1077년)에 황하는 전주(州), 지금의 하남성 복양에서 다시 둑이 무너졌고, 양산박으로 강물이 흘러들어왔으며, 호수면적은 최대로 확대된다.

 

<<소씨문견후록>>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왕안석이 변법을 시행할 때, 어떤 소인이 그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양산박의 팔백리호수의 물을 빼내서, 농지로 만든다면 이익이 클 것입니다" 왕안석은 그가 황당한 말을 한다고 생각하고, 웃으면서, 천천히 말했다. "방법은 좋은데, 그러나 빼버린 물은 어디에 두지?" 그러자 옆자리에 있던 유반이 풍자적으로 말했다. "옆에 다시 팔백리짜리 호수를 파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이야기는 비록 왕안석시대에 변법에 반대하던 사람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개원원년(944년)이후 정화연간(1119-1125)까지 백여년동안 양산주위에는 호수가 있었고, "방원팔백리"가 실측한 결과는 아닐 지라고, 대체적인 추산한 숫자였으며, <<수호전>>이 묘사하는 송나라 정화연간에 양산에는 방원(주위) 수백리의 큰 호수가 있었던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로써 볼 때, 소설이 아무 근거없이 지어낸 말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사서의 기재에 의하면, 북송 선화말년과 정강연간에 어민 장영은 양산박에 배 수백을 모아서 불시로 금나라군대를 공격했다고 한다. 정강이후, 금나라가 남진하여 송을 공격하고, 양산박도 금나라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곳에는 갈대가 무성하고, 수역이 넓어, 도망쳐숨기 좋아서 체포가 힘들었다. 그래서 남송초기에 이곳은 금나라에 항거하는 무장근거지였다. 나중에 황하가 자리를 잡으면서 양산박은 점차 위축되었다. 금희종 정륭6년(1161), 금나라 황제 완안량의 송나라를 공격하는 배가 이 곳을 지나가는데, 이미 물이 말라서 진퇴유곡에 빠진다. 금세종 대정21년(1181년)의 기재에 의하면, 이곳은 이미 말라서 육지로 되었고, 현지 농민들이 임의로 곡식을 심고 있었다. 그러나, 연이은 전쟁으로 황하의 제방을 제대로 보수하지 못해서 자주 제방이 붕괴되고, 그 때마다 홍수는 양산박을 덥쳤다. 원나라말기에도 이곳은 여전히 호수였다는 기록이 있다. 명나라가 들어선 후 양산박의 육지화는 가속된다. 명대종 경태원년(1450년)을 전후하여 방원팔십리정도만 남게 된다. 경태6년, 명나라조정은 황하 사만결구를 철저하게 정비하고, 마침내 남은 방원팔십리마저 말라서 육지로 된다. 현재는 양산현 북쪽의 동평호만 남았다. 이것은 바로 양산박이 말라버린 이후의 "유적"이다. 이렇게 보면, 송원양대의 오백여년간은 양산박은 확실히 '방원수백리'의 큰 호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상 송강은 유구(流寇)이고 고정적인 근거지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은 이야기꾼들이 그의 근거지를 양산박으로 고정시켰다. 그 근거는 아마도 <<대송선화유사>>에 나오는 송강등 36명을 "태행산양산박"에 안치시켰다는 기재일 것이다. 이야기꾼들은 태행산에서는 양산박을 찾을 수 없게 되고, 마침 산동성에 이런 방원팔백리의 '양산박'이 있는 것을 보자 그쪽으로 옮긴 것이다. 그래서 원래는 회남지역에서 활동했던 송강등의 인물을 산동성으로 보내어 수호전을 완성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