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사회/중국의 의학

백년간 중의(中醫)에 대한 세차례의 논쟁

by 중은우시 2007. 2. 16.

글: 최경염(崔京艶) 중국중의과학원 박사

 

중의(中醫, 한국에서는 韓醫라고 부르며, 예전에는 漢醫라고 불렀었다)라고 얘기하면, 머리에는 먼저 고희의 노인이 바람이 나부끼는데 절룩이며 다가와서 아주 조심스럽게 기구한 운명의 다리를 만지작거리는 것이 떠오른다.

 

최근들어, 중남대학 과기및사회연구소 교수인 장공요(張功曜)는 '중의를 취소하자'는 서명을시작했고, 짧은 며칠내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일찌기 "중화민족의 보배"로 인식되던 중의가, 사람들의 성토하는 목소리에 다시 한번 곤경에 빠져들고 있다. 이 노인은 다시 한번 '병이 위중하다는 통지'를 받게 된 것이다.

 

이 글에서 중의의 역사를 회고해보는 것은, 객관적인 언어로 이 노인(즉, 중의)의 비바람이 가득한 역정을 되돌아보려는 것이 목적이다.

 

20세기전의 일지독수(一枝獨秀)

 

중의의 역사를 거슬러올라가보면, 원고(遠古)시대로 올라가야 할 것이다. 일찌기, 우리의 조상은 음식물을 찾는 과정에서 점차로 어떤 음식물은 아픈 것을 제거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석기를 사용할 때는 골침요법을 개발했다. 이를 기초로 점차 침을 놓는 기술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후 수천년간, <<황제내경>>에서 명나라때 이시진의 <<본초강목>>까지 중화민족의 보배로 일컬어지던 중의는 순조롭게 발전하였고, 천하통일의 국면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는 말처럼, 아편전쟁후, 특히 20세기들어, 서의(西醫, 우리나라의 소위 洋醫)가 대거 진입한 후 중국인들의 서의에 대한 태도는 회의에서 신뢰로 바뀌었고, 중의는 아주 엄준한 도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제1차논쟁: 중의패배

 

1912년 북양정부의 통치시기에, 당시의 정부는 중서의는 "치난겸채(致難兼采)"를 이유로 새로반포한 학제와 학교조례에서 전문적인 서의학교만을 제창하였을 뿐, 중의는 문밖에 쫓아버렸다. 이것이 바로 근대역사상 유명한 "교육시스템의 중의 누락사건"인 것이다.

 

소식이 일단 전파되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양주중서의학연구회의 창시자인 원계생은 먼저 의견을 제시했다. "교육부의 규장에 중의학교의 과정에서 중의과목을 빼버렸는데, 이것을 참는다면 또 참을 것이 뭐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로써 중서의의 제1차논쟁이 시작되었다.

 

1913년, 북양정부의 교육총장인 왕대섭은 다시 공개적으로 중의중약을 폐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후, 교육부에서 공포한 교육과정에는 모두 중의를 교육체계바깥으로 몰아냈다.

 

그래서, 상해의 "신주의학총회" 회장인 여백도등은 전국의 19개성시의 중의계 및 동인당, 서학당등 약업인사들과 연합하여, "의약구망청원단"을 조직하였고, 중의를 의학계통에 포함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압력에 의하여, 정부는 그저 한편으로는 중의를 폐지하는 정책은 실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중의를 교육계획에 넣는 것을 거절했다. 중의계의 제1차투쟁은 이렇게 실패로 끝났다.

 

서의의 양계초 오진

 

제1차중의논쟁에서 양계초는 서의측에 섰었다. 그러나, 1926년, 그의 병은 중의지지자들에게 서의에 대하여 반격을 할 수 있는 유력한 근거를 제공했다.

 

3월 8일, 양계초는 요독증으로 북경협화의원에 입원했다. X선검사를 거쳐 의사는 암이라고 진단했다. 양계초의 동생인 양중책은 의사에게 "확실히 암이냐"고 물었다. 의사는 "암이 아닐리가 없다"라고 대답했다.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라고 물으니, "전부 잘라내야 한다"라고 하였다. 수술후에 신장을 해부해보니, 과연 앵두크기의 검은 점이 있었다. 그러나, 암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병자의 오줌에 피가 섞여 나오는데, 병원에서는 그 이유를 알아내지를 못했다.

 

만일 보통의료사고라면 이 옛 사건을 들먹이는 것이 의미가 크지 않을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진 것은 바로 수년간 싸워오던 "중의와 서의중 누가 낫고 누가 못한가"의 문제가 다시 논쟁으로 떠올랐다는 점이다. 그래서, 양계초가 서의에 의하여 "허리를 잘못 잘렸다"는 소문이 일파만파로 번져가자 서의들은 졸지에 공적으로 되었다. 원래 양계초가 입원하기 전에 북경의 "사대명의"중의 하나인 소용우가 맥을 집어쓴데, 그는 "급증이 아니다"라고 진단했다. 오줌에 피가 섞여나오는 것은 "2,30년 그대로 흐러게 놔두어도 별 일이 없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서의들은 신장을 잘라내야 한다고 했는데, 결론은 "아무런 이유가 없는 출혈증"이라는 것이었다.

 

양중책의 <<병원필기>>에서 서의를 폄하하는 문구들이 나온다. "중의의 이상은 비록 사람을 완전히 설복하지 못하게 하지만, 서의들이 함부로 단정하는 것도 역시 중의를 설복시키지 못한다" 그리고 서지마는 <<우리가 병들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서의의 소위 과학정신이라는 것은 병자를 표본으로 보는 것이다. 네가 눈이 아파서 가면, 한 의사가 와서 보고 나가고, 다른 두 세명의 의사가 또 들어와서 보고 나가고, 도대체 누가 이 병을 책임지는지, 너는 여러군데 물어보아야 비로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두 편의 '성동격서'의 문장이 나오자, 노신은 참지를 못했다. 7월 5일, 노신은 <<마상일기>>를 발표하였다. 시작부터 창끝을 서지마등에게 겨냥했다. "서의가 양계초의 허리를 잘라낸 이후, 비난하는 소리가 바람처럼 물결처럼 일고 있다. 심지어 허리에 대하여 아무런 연구도 없던 문학가들까지 한마디씩 하고 나서는 국면이 되었다. 동시에 중의가 대단하다는 말이 연이어 나오고 있다. 허리에 병이 들면, 황기를 먹지 않느냐. 어디에 병이 들면 녹용을 먹지 않느냐" 그러나, 당시의 여론은 서의에 대한 질책과 비난이 우세를 점했다.

 

1929년의 "구의폐지안"

 

서풍이 동풍을 압도하지 못하면, 다시 동풍이 서풍을 압도한다. 5.4운동후에 중서의간의 논쟁은 갈수록 가열되었다. 지질학자인 정문강의 글에서 이런 말이 있다. "산에 오르고, 고기를 먹고, 서의를 욕한다. 나이가 들어도 마음은 늙지 않았다; 글을 쓰고, 술을 마시며, 관화를 말한다. 알기도 어렵고 행동하기도 어렵다" 이로써 볼 때 서의를 욕하는 것은 이미 지식인들의 식사후 한담의 주제였던 것같다.

 

1929년 민국정부는 '구의폐지안"을 내놓았다. 마침내 중서의간의 제2차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번 논쟁은 중의의 생사존망이 직접 관련된 것이었다.

 

1929년 2월, 국민정부 위생부는 제1기중앙위생위원회를 소집했다. '중의폐지'문제에 대하여 여운수, 저민의등은 먼저 4개항의 결의안을 내놓았고, 중의개업을 제한하고, 학교를 열수 없도록 하는 등의 방법을 열거했다. 제안이 너무 급진적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중앙위생회의는 이것저것 고려한 후에 마지막으로 중의폐지안을 내놓았다. <<구의등기안규정원칙>>이 그것인데, 실시방법에서 많이 완화시켰다. 중의폐지의 3대원칙을 규정했는데 "갑: 구의등기는 민국19년까지로 한다. 을: 구의학교를 금지한다. 병: 나머지신문잡지등에서 비과학적인 의학을 소개하거나 구의를 소개하는 것을 단속하는 것에 대하여는 위생부가 그때그때 알아서 처리한다"

 

의안이 일단 실시되자, 중의폐지는 그저 시간문제로 되어 버렸다. 이로 인하여, 의안이 막 공포되자, 먼저 상해중의계의 반발에 부딛쳤다. 3월 17일, 전국의 281명의 대표는 상해에서 전국의약단체대표대회를 개최하였고, "전국의약단체연합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청원단도 만들어, 정부가 즉시 의안을 취소하도록 요구했다. 사회여론도 중의계를 지지했다. "중의를 단속하는 것은 백성을 죽게 만드는 것이다"라는 구호가 등장했다.

 

중의폐지를 주장하던 여운수, 호정안등은 연이어 각 신문에 중의를 폐지하자는 주장을 펼쳤고, 중의학계는 이를 비난했다. 논쟁은 아주 가열되었고, 정치적인 이슈로까지 승급되었다.

 

이때, 남경국민정부는 중요하지 않은 일로 인하여 사회에 큰 물의가 발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당시 위생부장은 설독필이었는데, 그는 이 풍파를 가급적 빨리 종식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는 계속하여 중의를 폐지할 뜻이 없음을 밝혔다. 그리고 청원대표들에게도 "내가 부장을 하루라도 하면, 절대로 이 안건이 실시되도록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얼마되지 않아 청원단은 국민정부 문관처의 허가문건을 받아보았다: 일체중의를 금지하는 법령을 취소한다. 제2차논쟁은 중의계의 승리로 끝났다. 중의계는 3월 17일을 "중국국의절"로 지정하였다.

 

건국후의 제3차논쟁

 

건국초기, 전국위생공작회의는 중서의의 제3차논쟁의 서막이었다. 1950년, 민국시기에 중의폐지파의 대표인물인 여운수는 전국위생공작회의에서 '구의개조실시단계"라는 초안을 내놓았다. 초안에는 "폐지"를 "개조"로 바꾸었을 뿐, 중의의 머리를 자르고, 중의의 근원을 막겠다는 것이었다.

 

이번 회의에서, 해방전 의약위생조건이 낙후한 상황하에서 당중앙은 중국위생사업의 삼대방침을 정한 바 있다. 그 중의 하나는 바로 '중서의의 단결"이었다. 유감스러운 것은, 중서의단결의 정책은 집행초기에 중의를 서의로 개조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는 점이다. 정부가 거행한 중의진수학교에서 진수는 바로 현대의학을 배우는 것이었다. 청년중의도 모두 서의학교에 가서 새로 교육을 받았다. 이런 이유로 중의는 다시 한번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1950년대에 중앙정부에서는 '중서의단결'정책이 잘못 집행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즉시 상부로부터 재학습을 시켰고, 각급 지도자들과 의료종사자들에게 중의에 대한 편견을 시정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문혁'기간중에 여러가지 잘못된 정책으로, 전국의 절대다수의 중의는 비판대상이 되었고, 박해받았다. 많은 중의고적은 "사구(四舊)"의 하나로 제지공장으로 보내어 졌고, 어떤 사람은 중의의 현실을 이렇게 묘사하기도 하였다. "상련: 참, 무지, 파사구, 만마제암, 문화대혁명, 노중의조최찬(참담하다. 무지하다. 사구를 파괴한다. 모든 것이 다 어둡다. 문화대혁명. 나이든 중의들이 박해당한다; 하련: 비, 유죄, 입삼고, 일파호언, 중서의결합, 소대부피독해(슬프다. 유죄로다. 삼고를 세운다. 모두 헛소리이다. 중의의의 결합, 작은 의사들이 독해를 당한다). ;횡비: 중의위의(중의가 위급하다)"

 

'문혁'후에 중의는 비로소 위난에서 벗어나서 원기를 되찾을 수 있었따. 1982년에 반포된 헌법에서 "국가는 의료위생사업을 발전시키고, 현대의학과 중국전통의학을 발전시킨다"고 규정하였다. 이로써 비로소 중의는 서의와 동등한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1세기가 이미 지나갔다. 중서의의 충돌은 아직 완전히 결론이 난 것은 아니다. 중의의 부상과 몰락은 언제나 그칠 것인가? 서의의 협공과정에서 중의는 어떻게 살 길을 모색할 것인가? 우리는 눈을 씻고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