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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의학

20세기의 중의(中醫)-서의(西醫) 논쟁

by 중은우시 2006. 12. 1.

작자: 최경염(崔京艶) : 중국중의과학원 박사

 

[참고: 우리나라에서 한의(韓醫) 또는 한의(漢醫)로 부르는 것을 중국에서는 중의(中醫)로, 우리나라에서 양의(洋醫)로 부르는 것은 중국에서 서의(西醫)로 부르고 있음]

 

20세기 이전까지 일지독수(一枝獨秀)

 

중의의 역사를 소급해올라가면, 아마도 상고시대부터 얘기해야 할 것이다. 그 때부터 일찌감치 우리의 조상들은 먹는 음식을 찾는 과정에서 점차 어떤 음식이 병이나 아픈 것을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석기를 사용할 때, 골침요법을 창조했고, 이것을 기초로 침술을 발전시켰다.

 

이후 수천년간, <<황제내경>>에서 명나라때 이시진의 <<본초강목>>까지, 중화민종의 보배로 불리우던 중의는 순조로운 환경하에서 발전해고 "천하통일"의 국면을 형성했었다.

 

그러나, 물극필반(物極必反, 사물은 한 방향으로 끝까지 가게 되면 반드시 돌아오게 된다)이라는 말이 있듯이 아편전쟁이후, 특히 20세기에 들어서, 서의가 대규모로 중국에 진입하고 나서는 중국인들이 서의에 대한 태도들 회의에서 믿음으로 전환하면서, 중의는 엄중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제1차논쟁: 중의의 패배

 

1912년, 북양정부의 통치시기에, 당시의 정부는 중서의 "겸비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새로 반포한 학제 및 학교조례에서, 서의학교만을 제창하였고, 중의는 배제시켰다. 바로 근대사상 유명한 "교육계통에서 중의를 포함시키지 않는 사건"이다.

 

이 소식이 전파되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양주중서의학연구회의 창시자인 원계생은 솔선하여 글을 발표했다. "교육부에서 규장을 정하면서 중의학교의 과정에 중의과목을 빼버렸는데, 이것을 참으면 또 못참을 것이 뭐가 더 있겠는가?"라고 썼다. 이후 중서의학의 제1차 논쟁이 개시되었다.

 

1913년, 북양정부의 교육총장 왕대섭은 다시 한번 공개적으로 중의, 중약을 폐지할 것을 제출한다. 이후, 교육부의 교육과정은 모두 중의를 교육체계외로 방치한다.

 

그래서, 상해의 "신주의학총회" 회장인 여백도등은 전국 19개성시의 중의계와 동인당, 서학년당등 약업계의 인사를 모아 "의약구망청원단"을 만들어 중의를 의학계통에 포함시켜줄 것을 요청한다. 압력에 밀려, 정부는 한편으로는 중의를 폐지하는 정책을 실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중의를 교육계획에 넣는 것을 여전히 거절한다. 중의학계의 제1차투쟁은 이렇게 실패로 끝난다.

 

서의의 양계초 오진사건

 

제1차 중서의학논쟁에서, 양계초는 서의의 편에 선다. 그러나, 1926년, 그의 병은 중의지지자들로 하여금 서의에 대하여 반공을 가할 유력할 무기가 된다.

 

3월 8일, 양계초는 요독증으로 북경협화의원에 입원한다. X선검사를 거쳐, 의사는 암으로 진단한다. 양계초의 동생인 양중책이 의사에게 "암이 확실하지는 않지 않은가"라고 말하자, 의사는 "암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하지 않다". 양중책이 다시 "어떻게 치료할 거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전부 잘라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수술후에 신장을 해부하니, 과연 앵두만한 크기의 검은 점이 보였다. 그러나, 암은 아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병자의 오줌에 피가 섞여 나오는 것에 대하여 그 원인을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만일 단순한 보통의 의료사고였다면, 이 사건을 다시 들먹이는 것은 의미가 적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진 것은 여러해동안 계속되었던 "중의와 서의중 누가 낫고 누가 못한가"라는 문제에 대하여 다시 한번 표결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양계초가 서의에 의하여 허리를 잘못 잘린 사건이 한번 전파되자, 서의들은 한꺼번에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원래, 양계초는 입원하기 전에 북경에서 "사대명의"중의 하나로 불리던 소광우에게 맥을 집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는 "급병이 아니라"고 진단했다. "오줌에 피가 섞여 나오지 않느냐"고 물으니, "2,30년 흐르게 놔두면 되고, 있어서 안되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서의는 바로 신장을 잘라냈고, 얻어낸 결론은 "아무런 이유없는 출혈증"이라는 것이었다.

 

양중책의 <<병원필기>>에서는 서의에 대하여 약간 불만을 표시했다. "중의의 이상은 비록 사람을 설득할만한 것에 미치지 못하지만, 서의의 무단으로 어찌 중의를 설득시킬 수 있겠는가" 서지마도 <<우리가 병들면 어찌할 것인가?>>라는 글에서 서의의 소위 "과학정신"은 원래 "환자를 표본으로 본다. 네가 네눈으로 봐라. 한 의사가 검사하고 간다. 대사 바꿔서 두 세명의 의사가 와서 본다. 도대체 누가이 병을 책임지는지, 너는 한참을 돌아서 물어본 후에야 비로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두편의 "성동격서"의 글이 등재되자, 노신이 분개했다. 7월 5일, 노신은 <<마상일기>>를 발표했다. 시작부터 창끝을 서지마등의 사람들에게 겨누었다. "서의가 양계초의 신장을 잘라낸 이후, 비난하는 소리가 바람처럼 구름처럼 일고 있다. 신장에 대하여 전혀 연구해보지 않은 문학가들까지도 이런 저런 얘기를 한다. 동시에 중의가 대단하다는 설도 나오고 있다. 신장에 병이 들면, 왜 황서를 먹지 않은가? 무슨 병이 들면 왜 녹용을 먹지 않는가" 그러나 당시의 여론은 서의에 대하여 공격하고 질책하는 것이 우세를 점하였다.

 

1929년의 "구의폐지론"

 

마치 "동풍이 서풍을 압도하지 못하면, 바로 서풍이 동풍을 압도한다"는 말처럼, 5.4운동후에 중서의간의 논쟁은 갈수록 치열해졌다. 지질학자 정문강의 책에는 이런 댓구가 있다. "산에 오르고, 고기를 먹고, 중의를 욕한다. 나이는 들어도 마음은 늙지 않았다. 글을 쓰고, 술을 마시고, 관화를 말한다. 알기도 어렵지만 행동하기도 어렵다" 이로써 볼 때 중의를 욕하는 것이 당시 서구화된 지식인들의 식사후의 운동중의 하나였던 것같다.

 

1929년, 민국정부의 "구의폐지안"이 마침내 중서의간의 제2차논쟁을 불러온다. 이번 논쟁은 직접적으로 중의의 존망과도 관련이 된다.

 

1929년, 민국정부 위생부는 제1차 중앙위생위원회를 소집하고, "중의폐지"문제를 둘어싸고, 여운수, 저민의등의 사람들이 4개항의 결의안을 제출했으며, 중의의 개업을 제한하고, 학교를 여는 등의 방법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제안이 너무 과격하다는 점을 고려하여, 중앙위생회의는 여러번 균형을 맞춘 끝에 최후로 중의폐지안을 통과시켰다. <<구의등기안원칙규정>>, 실시방법에서 많이 완화시켰다. 중의폐지의 3조의 원칙을 규정했다.

 

갑: 구의(舊醫)의 등기시한은 민국 19년까지로 한다.

을: 구의학교를 금지한다.

병: 나머지 신문잡지등이 비과학적인 의학을 선전하는 것이나 구의를 신문에 소개하는 것등을 단속하는 것은 위생부에서 힘껏 시기에 맞게 진행한다.

 

의안이 일단 실시되자, 중의폐지는 그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이로 인하여, 제안이 막 공포되자, 먼저 상해중의계의 반항에 부딪힌다. 3월 17일, 전국의 281명의 대표가상해에서 전국의약단체대표대회를 개최하여, "전국의약단체연합회"를 조직한다. 그리고 청원단을 만들고, 정부에서 즉시 의안을 취소할 것을 요구한다. 사회여론도 중의계를 지지했고, "중의단속은 병든 백성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다"라는 구호를 냈다.

 

중의폐지를 주장하던 여운수, 호정안등은 하나하나 신문에 중의폐지의 주장을 발표했으며, 중의학계의 바판을 받았다. 논쟁은 화약냄새가 넘쳤고, 정치적인 문제로까지 승화되었다.

 

이 때, 남경국민정부는 중요하지 않은 사안으로 사회에 혼란을 가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당시 위생부장을 맡고 있던 설독필은 이 풍파를 하루빨리 종식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계속 공개적으로 중의폐지의 뜻이 없음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청원대표단의 앞에서 "내가 부장직에 하루있으면, 절대 제안이 실행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오래지 않아, 청원단은 국민정부 문관처의 비준문건을 받았다. 중의를 금지하는 일체의 법령을 취소한다. 제2차 논쟁은 중의계의 승리로 끝났다. 중의계는 3월 17일을 중국국의절로 정했다.

 

건국후의 제3차논쟁

 

건국초기, 전국위생공작회의는 중서의계의 제3차논쟁의 서막을 연 것이었다. 1950년, 민국시기에 중의폐지파의 대표인물인 여운수는 전국위생공작회의중에 초안를 '구의개조실시단계"라는 초안을 제출했다. 초안은 "폐지"를 "개조"로 바꾸었고, 앞으로 중의의 수도를 없애고, 본원을 막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번 회의에서 해방전 의약위생조건이 낙후한 상황에서 당중앙은 중국위생공작의 3대방침을 정했는데, 그 첫번째가 "중서의의 단결"이었다. 유감스러운 것은, 중서의 단결정책은 집행초기에 중의를 서의로 개조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정부가 개최한 중의진수학교에서 진수하는 것은 현대의학이었다. 청년중의도 모두 서의학교에 가서 재학습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일련의 이유로 중의는 다시 곤경에 빠졌다.

 

1950년대에 중공중앙에서는 중서의단결정책이 잘못 집행되고 있는 것을 발견한 후, 즉시 위에서부터 아래로 학습을 전개했고, 각급 지도자들과 의무공작자들의 중의에 대한 편견을 시정하도록 했다.

 

그러나, "문혁"기간동안 각종 잘못된 방향제정으로 전국의 절대다수의 중의들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박해를 받았다. 많은 중의고서적은 '사구(四舊)'의 하나로 제지공장으로 들어갔다. 어떨 사람은 대련을 만들어 중의의 처지를 묘사했는데 상련과 하련은 다음과 같다.

상련:

"참(慘), 무지(無知), 파사구(破四舊), 만마제암(萬馬齊암),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노중의조최잔(老中醫遭최殘),

하련:

비(悲), 유죄(有罪), 입삼고(立三股), 일파호언(一派胡言), 중서의결합(中西醫結合), 소대부피독해(小大夫被毒害)

횡련:

중의위의(中醫危矣)

 

"문혁"후에 중의는 겁난에서 다시 원기를 회복할 수 있었다. 1982년에 이르러 반포한 헌법에서 "국가는 의료위생사업을 발전시킨다. 현대의약과 중국전통의약을 발전시킨다"라고 하였다. 이로써 중의는 서의와 동등한 지위를 회복하게 되었다.

 

1세기가 이미 지났다. 중서의의 충돌은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중의의 흥기와 몰락은 언제나 끝날 것인가. 서의의 협공중에서 중의는 또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우리는 눈을 씻고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