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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이홍장)

의화단과 이홍장: 누가 더 애국자인가?

by 중은우시 2006. 4. 21.

애국이라는 깃발아래서 의화단(義和團)과 이홍장(李鴻章)을 비교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코메디처럼 들릴 것이다. 의화단은 역사가 공인한 애국운동이고, 이홍장은 대중이 이를 가는 매국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들어 사상이 점차 개방되고, 사람들이 과거에 이미 결론이 난 것처럼 보였던 인물이나 사건에 대하여도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고, 역사적인 진실을 존중하는 기초위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으며, 새로운 견해나 결론을 얻게 되었다. 의화단과 이홍장도 이처럼 새롭게 바라보는 시야에 들었으며, 일부 학자들은 새로운 견해를 내놓았다. 비록 이러한 견해는 여전히 더 논의할 필요가 있지만.

 

먼저 우리가 지적해야할 것은, 의화단운동과 이홍장 개인은 모두 동일한 시대 즉, 청나라말기에 속한다는 점이다.  그들 간에는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나는 "부청멸양(扶淸滅洋, 청나라를 도와 서양인을 타도하자)"는 구호하에 조정의 지지를 받아 서양인에 반대한 군중무장운동이었고, 하나는 조정의 주화파(主和派)의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써, 서양인에 대하여 참고 양보하면서 온전하게 보전하자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이홍장은 의화단에 의하여 "한간(漢奸, 중국을 팔아먹는 사람)"으로 죽이고자 하는 사람의 명단에 올랐다. 특히, 의화단의 난으로 인하여 "팔국연합군"이 중국을 침공하고, 북경이 위기에 처했을 때, 이홍장은 한편으로는 조칙을 받아 병사를 출동시키지 아니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정국을 수습했다. 그리고는 중국을 대표하여 <<신축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은 이홍장이 중국을 대표하여 체결한 여러 불평등조약중의 하나이다.

 

중국인들이 계속하여 알고 있었던 것은 중국근대사상의 굴욕이나 불공정한 일들 예를 들어 "화친을 주장하고 전쟁을 거부한 일", "갑오전쟁에서 패한 일", "적국에 사신으로 간 일", "땅을 떼어주고 배상금을 지급한 일", "국권을 잃고 나라가 수모를 당한 일"등등 모든 매국적인 일은 이홍장이 나서서 하였으며, 심지어는 그가 혼자서 다 했다는 것이었다.

 

세상사람들에게 의화단의 애국과 이홍장의 매국은 바로 이 점에 있다는 인식을 주었다.

 

일부의 학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홍장은 실제로는 애국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방식으로 애국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가 더 애국적이 아니었다고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의화단보다는 국가에 더 공헌하였다고 말하여야 한다.

 

티비드라마 <<주향공화>>는 이홍장에 대하여 새로운 면모를 보여줬다. 그러나 더욱 전면적이고, 더욱 진실하고, 더욱 깊이있게 이홍장의 원래의 면모를 반영한 것은 금년 4월에 <<남방주말>>에 발표된 왕수증(王樹增) 선생의 글 <<이홍장의 죽음>>이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 글의 내용은 이홍장이 애국하였다는 것이며, 아래와 같은 몇가지를 이유로 삼는다.

 

첫째는 이홍장은 국가의 현상과 앞날에 대하여 보다 분명하고 보다 개방적이며 보다 절실하게 인식하였다는 것이다. 청나라말기의 내우외환, 정치부패, 경제낙후, 가난하고 약자들이 많은 사회배경하에서 이홍장은 "밖으로는 화친하고, 안으로는 부강을 도모하면, 아마도 점차로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조정에 올린 상소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청나라는 이미 어떤 의미에서는 절대적으로 봉쇄된 국방을 가지고 있지 않다. 서방새력은 문화적으로 중국을 침식할 뿐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중국을 점령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그 수단은 한 나라가 일을 벌이면, 여러나라가 선동하는 것이고, 열강의 우호와 야욕은 항상 같이 따라다니는 것이므로 청나라는 이에 대하여 경계하여야 한다. 세계가 오늘까지 발전하여, 한 나라는 이미 쇄국을 통하여 안전하게 생존할 수 없게 되었다. 청나라가 나라의 문을 열고 세계의 상품경제와 거래한다면, 스스로를 부강하게 할 수 있을 뿐아니라, 무역은 쌍방적이므로, 다른 사람을 제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제약하는 것이 심지어는 무력보다 강할 수 있고, 모든 지구촌의 국가가 중국으로 몰려들 것이다. 왕수증은 감탄한다. 이러한 인식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백년전의 중국에서는 정말 드물 뿐아니라, 현재의 중국에서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대외개방에서, 이홍장은 개방과 주권의 두가지를 견지했다. 이홍장이 미국을 방문할 때, 기자들의 물음에 이렇게 답하였다. 청나라정부는 어떤 자본주의국가가 중국에 와서 투자하는 것도 기꺼이 환영한다. 반드시 구미의 자본을 청나라에 들여와서 현대화된 공업기업을 건설하고, 청나라 인민들이 본국의 풍부한 자연자원을 개발하는 것을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기업의 자주권은 당연히 청나라정부의 수중에 장악되어야 한다. 우리는 너희가 중국에 와서 투자하는 것을 환영한다. 자금과 기술은 너희가 제공하여라. 그러나, 철로, 전신등의 업무는 우리가 스스로 통제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국가주권을 보호해야 한다. 이러한 견해는 정말 선견지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홍장은 언론자유에 대하여도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기자회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따. 청나라는 신문을 만든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청나라의 편집인들은 독자들에게 진실을 얘기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당신들의 신문처럼 진실을 얘기하지 않는다. 청나라의 편집인들은 진실을 얘기하는데 매우 인색하다. 그들은 부분적으로만 진실을 얘기한다. 그리고 그들은 당신들의 신문들처럼 대량의 발행부수를 가지고 있지 않다. 성실하게 진실을 설명하지 않으므로, 우리의 신문은 신문 원래의 고귀한 가치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널리 문명을 전파하는 방법이 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말은 이홍장이 죽은 100년후에 읽어도 놀라울 뿐이다.

 

둘째는 이홍장은 중국근대화에 대하여 중요한 영향을 미친 양무운동의 중견이자 지도자의 하나였다. 이홍장이 주재하고 참여하였으므로 양무파는 중국근대의 첫번째 철로, 첫번째 강철공장, 첫번째 기계제조공장, 첫번째 근대화된 군사학교, 첫번째의 근대화된 해군함대, 첫번째의 전보케이블선을 가질 수 있었다. 이홍장은 청나라의 근대화를 위하여 기초를 쌓은 모든 사업을 함으로써 후대의 사람들이 그 덕을 볼 수 있게 하였다.

 

셋째는 국가가 위급할 때, 이홍장은 다른 사람과는 다른 견해와 심지어 대역무도하리만치 용감하게 행위하였고, 중국의 기본적인 이익을 보호하였다. 그가 갑오해전(청일전쟁)전에 조야에서 모두 일본은 작은 나라이므로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말하였고, 전쟁을 주장하였지만, 이홍장만은 일본이 강성함을 알았으므로, 이홍장은 전쟁보다는 화친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조정상하의 반대에 부딪쳐 어쩔 수 없이 전투를 하게 되었고, 결국 자칭 세계6위라던 중국의 북양해군은 전멸하게 되었다. 이홍장의 개인의견이 받아들여졌었다면, 일본의 야욕을 깨부시지는 못했을지 몰라도, 적어도 이처럼 큰 손실을 입지는 않았을 것이다.

 

1900년 6월, 팔국연합군이 천진을 침범하고 북경으로 진격하였다. 위급한 청나라 조정은 전보를 보내어 각 성은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서양군대와 싸우라고 지시하였다. 양광총독을 맡고 있던 그는 "만일 자신의 역량을 모르고 가볍게 일을 벌인다면, 아마도 수천년의 문화를 지닌 국가는 그날로 끝장날 것이다"라고 하고, 조정의 북상하여 황제를 보호하라는 명령에 대하여 "이것은 어지러운 명령이다. 광동광서는 따를 수 없다"고 회신한다. 이홍장의 이러한 입장표명에 따라, 양강총독 유곤일, 호광총독 장지동, 민절총독 허흥, 사천총독 규준등이 모두 공동으로 동남을 서로 보호하는 원칙을 확정하고 조정의 지시를 거부한다. 비록 이에 대하여 "민족이익을 팔아먹은 부끄럼을 모르는 무리들"이라는 욕을 먹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1900년의 대란중에서 그들은 청나라의 남쪽 강산은 온전하게 보존하게 된다.

 

넷째는, 이홍장은 여러차례 국가가 존망위기에 처했을 때, "내가 지옥에 들어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들어가겠는가"라는 생각을 가지고, 나서서 국면을 수습하곤 하였다. 외국의 열강과 담판하고, 은인자중하며, 개인의 지혜와 재능을 이용하여 중국을 위하여 당시 조건하에서는 최대의 이익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갑오전쟁(청일전쟁)에서 패배한 후, 이홍장은 일본으로 가서 화의조약을 협의한다. 이홍장은 일본의 시모노세키에서 한명의 자객에게 총을 맞아 그의 왼쪽 눈아래 박혔다. 의사도 감히 거기에 수술칼을 대지 못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이홍장이 조정에 보낸 전보는 딱 6글자였다. "다친 곳이 아프다, 총탄은 꺼내기 어렵다" 일본인으로부터 요녕, 대만, 팽호를 할양하고, 3억냥백은을 배상금으로 달라는 요구를 받은 상태에서 조정은 이홍장이 알아서 처리하라는 태도만을 보이고 있었다. 일본수상 이등박문과 설전을 벌여가며, 자기의 암살사건을 활용하여, 전쟁배상금을 1억냥 삭감하고, 할양지역도 손해가 적은 지역으로 하여,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한다

 

팔국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였을 때, 조정은 놀라서 도망치기 바빴다. 어쩔 수 없이 이홍장을 광동에서 북경으로 불러 담판을 하도록 요청했다. 이홍장은 집안 사람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열강들과 협의하고 절충하였으며, 국가체제를 보전하는 전제하에서 열강들과 <<신축조약>>을 체결한다. 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피를 토하고 죽었다.

 

왕수증선생은 "이홍장은 청나라의 가장 어둡고 어지러운 시대에 태어나서, 그가 매번 나타날 때는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해있을 때였고, 청나라는 그에게 사람으로서 가장 하기싫은 일을 맡도록 하였다. 1895년 4월 <<시모노세키조약>>와 얼굴에 붕대를 감고 귀국한 이홍장은 그가 온 나라의 '공적'으로 된 것을 알게 되었다. 조정은 그가 힘을 다하지 않았다고 질책했고, 민간에서는 그가 일본인의 돈을 받았다고 하였으며, 어떤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그를 죽임으로써 분을 풀겠다고 했다. 그는 이로 인하여 직위를 박탈당한다.

 

중국인은 19세기와 20세기가 교차하는 시기에 마침내 악의 근원을 찾아낸 것이다. 중국인들은 그들이 받은 굴욕과 수모와 분노를 이홍장을 욕하면서 풀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길게 글을 쓰면서 이홍장의 사적을 인용한 것은 한가지 이러한 견해를 밝히기 위함이다. 즉, 19세기와 20세기가 교차하는 시점은 중국이 낙후하여 얻어맞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싸우면 반드시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며, 지면 반드시 땅을 주고 배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며, 땅을 주고 배상하려면 조약에 서명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홍장은 바로 이 낙후한 국가의 필연적인 운명을 대표하는 상징이다. 그러나, 만일 이홍장이 없었고, 다른 사람이 그러한 역할을 맡았다면, 중국은 더 많이 잃었을 것이다. 여기서 인용하는 하나의 견해는 비록 모두 애국적이지만, 우리는 동기를 볼 것이 아니라 결과를 보고 누가 국가의 운명과 앞날에 대하여 더욱 유익한 행위를 했는지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홍장이 "애국"하였다는 것은 이홍장이 도덕군자였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그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말도 아니다. 서태후에 의하여 "나이가 들어서 나라를 도모할 만한 인물"로 인정받은 그는 여러차례 실패를 하였다. 그는 일찌기 러시아와 연합하여 일본에 대응하고자 하였는데, 결과적으로 러시아의 계교에 말려들었다. 역사적인 필연성으로 보면, 이홍장이 사랑했던 국가는 단지 "청나라"였고, 부패한 봉건제국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토론하는 "애국"은 도덕적인 평판은 아니다. 그래서 이홍장 개인에 대한 전면적인 평가까지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제 우리는 의화단에 대하여도 말해보아야 할 때가 왔다.

 

의화단의 애국열정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처럼 "부청멸양"의 목적을 가지고, 민간에서 기원한 군중성 무장운동은 청나라말기 중국인민의 애국주의의 하나의 산물이다. 그리고 인민군중이 역량을 보여주고 역사창조에 참여한 하나의 생생한 사례이다.

 

그러나, 의화단의 행동특징과 결과는 매우 좋지 못하였다.

 

의화단운동의 사상은 간단하고 우매했으며, 행위는 과격했고, 야만스러웠다. 일체의 서양인들을 죽여버리고자 하였다. 산동에서 발원하고, 하북까지 만연한 봉건미신을 이용한 반동적인 회, 도, 문의 형식으로 조직한 운동은 구호상으로 "의화명교, 불약동심, 부청멸양, 도창불입"이었는데, 이러한 구호는 당시의 시대와 전혀 맞지 않았다. 당시는 이미 과학기술이 발달한 시대였는데, 그들은 이처럼 귀신과 부적을 믿고 칼과 총이 몸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믿었으며, 완전히 조폭조직과 비슷했다.

 

의화단은 권력자들에게 이용당하였다. 의화단의 최초의 구호는 "반청멸양"이었다. 나중에 청나라 통치자들이 의화단을 이용하고자 하면서, 의화단은 자기의 구호를 "부청멸양"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의화단은 스스로의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청나라의 부패한 통치자들이 맹목적으로 외세를 배격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청나라정부에 회유된 의화단은 산동에서 성당을 불지르고, 서양인을 죽였을 뿐아니라 1900년 북상하여 서양에 항거하였다. 그들은 북경으로 향했고, 북경과 천진지역에서 횡행하였으며, 길가에서 사람을 만나면 문관은 가마에서 내리게 하고, 무관은 말에서 내리게 하고, 모자를 벗고 길가에 서있게 하였다. 말을 듣지 않으면 바로 죽였다. 제목을 입은 학생을 보면 바로 죽여버렸다.

 

의화단은 북경에서도 성당과 대사관을 공격해서 서양주택 134채, 교회 18곳, 약방 12곳, 의원 8곳를 불태웠고, 전도사와 교인을 죽였다. 전문에서는 노덕기서약방을 불태워서 북경에 큰 불이 일어났고, 민간주택 천여간이 타버렸다. 동복상의 감군과 신기영도 산적들과 같았다. 일본대사관의 비서 생삼산빈을 사지를 가르고, 북경외교계의 지도자인 독일공사 크린덕을 총으로 죽였으며, 조정에는 크린덕이 먼저 총을 쏘았다고 허위보고를 하였다. 서태후는 이어 열강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마침내 팔국연합군이 북경으로 진격했다.

 

의화단은 완전히 협소한 민족주의에서 출발하여, 봉건미신을 무기로, 맹목적인 군중운동이었다. 군중의 협소함에 통치자의 우매함을 더하여, 서양인을 죽이고, 대사관을 불사르는 거친 행동을 함으로써 서양열감의 침입을 초래하였고, 중국은 이로 인하여 아주 엄중한 대가를 치루어야만 하였다. 이로써 중국근대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한페이지를 쓸 수밖에 없게 하였다. 의화단의 행동은 국가의 존망위기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을 뿐아니라 엄청난 화만 불러왔다.

 

우리는 여기에서 망해가는 나라를 살리고 보존하며, 국운을 진흥시키려는 동일한 임무에 대하여 두 개의 서로 완전히 다른 생각과 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도광양회(韜光養晦), 은인자중하며 절대 가볍게 일을 벌이지 않고, 십년을 모으고, 십년을 배우며, 대외적으로 개방하고, 서양인의 장기를 배우고, 서서히 국가를 발전시키며, 국가가 강성하기를 기다려, 다시 열강과 싸우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분기를 참지 못하고 일어서서, 깃발을 들어 군중을 모으고, 함부로 죽임으로써 화를 풀고, 일시적인 통쾌함만을 생각하고, 결과는 고민하지 않으며, 최후에는 불을 불러 자신의 몸을 태우고 그 멸망을 가속화하는 것이다.

 

신해혁명의 선구자인 추용선생은 1903년에 쓴 유명한 격문 <<혁명군>>에서 "야만의 혁명이 있고, 문명의 혁명이 있다" "야만의 혁명은 파괴가 있고, 건설이 없으며 횡포하고 자행하는 것이며 공포의 시대를 만드는 것인데, 예를 들어 경자년의 의화단...이며, 국민에게 화와 난을 초래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역사를 거울로 삼으면, 흥망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중국의 국력과 국제정치의 지위는 자연히 그 때의 청나라말기와 동일시할 수 없다. 그러나, 중국이 부닥친 복잡한 국제환경과 대만문제, 여기에 국제적인 충돌과 국내사회문제의 교차는 더욱 복잡한 국면으로 이끌고 있다. 여기에서 두개의 문제가 우리의 주의를 끈다. 하나는 인민민중의 민족주의, 애국주의가 너무 편협되거나 극단적이 되어서는 안되며 의화단식의 맹목적인 운동을 형성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통치자는 사회적인 모순이 첨예할 때, 애국주의와 민족주의의 깃발과 구호를 내세워 대외전쟁을 일으킴으로써 이러한 모순을 전이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사실, 중국의 국력, 군사력은 이러한 전쟁을 일으킬 수준은 아니다. 특히 이러한 전쟁은 중국현대화를 중단하는 것을 대가로 지급하여야 한다.

 

1895년 3월 24일, 이홍장은 일본의 시모노세키에서 협상중에 자객의 공격을 받았다. 그는 수행원에게 바꿔입은 피묻은 옷을 보관해달라고 하고, 혈흔을 씻지말도록 한다. 점점이 박혀있는 혈흔을 보면서 73세의 이홍장은 탄식했다. "이 피로서 나라에 보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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