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서달(徐達)은 왜 원나라 마지막 황제를 붙잡지 않았는가?

중은우시 2006. 11. 19. 21:17

홍무원년(1368년), 중원에는 농민반란군이 사방에서 일어났고, 원나라 관군과의 전투에서 계속 연승했다. 그러나, 원나라는 각지의 장군들이 병권을 장악하고 내부에서 다툼이 심하였다. 원나라 조정은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었다. 역사의 저울은 농민반란군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였고, 주원장쪽으로 가장 많이 기울었다.

 

비록 이런 상황이기는 하더라도, 원나라 관군은 아직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전국각지에 흩어져 있고, 각자 따로 활동했고, 서로 호응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주원장은 휘하의 대장 서달이 제안한 임청(臨淸, 현재의 산동성내)에서 직접 대도(大都, 지금의 북경)로 진격하는 안에 동의했다. 그리고 친히 작성한 "정진진도(征進陳圖)"를 서달에게 주었다.

 

윤7월1일, 서달은 20만군대를 이끌고 중란(中欒, 하남성 봉구의 서남)에서 황하를 건넜고, 어하(御河, 지금의 衛河), 임청, 장로(長蘆, 지금의 하북성 경현), 통주(通州, 지금의 북경시 통현)으로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갔다. 아무도 막지 못했으며 바로 대도성 아래에 까지 이르렀다.

 

원순제(元順帝) 투환테무르는 대세가 기울었음을 보고는 청녕전에서 삼궁후비와 태자 애추식리달랍을 불러서 몽고의 옛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시켰다. 환관인 백안불화는 "폐하께서 수도를 지키시겠다면 신들은 병사를 모집하여 성을 나가 싸우겠나이다"라고 하여도 원순제는 듣지 않았따. 백안불화는 크게 통곡을 하면서 "천하는 세조의 천하입니다. 폐하께서는 마땅히 죽음으로 지켜야 합니다. 어찌 가벼이 버리시나이까"라고 하였다. 원순제는 불쾌해하며 소매를 떨치고 나가버렸다.

 

7월 28일 밤에 원순제는 태자, 후비를 데리고 건덕문을 빠져나가, 거용관을 통해서 상도 개평(開平, 현재의 몽고 다륜의 서북)으로 도망친다. 이로써 원나라는 중원에서 물러나게 된다.

 

8월 2일, 서달은 군사를 이끌고 대도로 들어간다. 제화문(齊化門)에 이르러 도랑을 막고 성을 넘어 들어간다. 서달 본인은 친히 제화문의 문루에 올라. 원나라의 감국인 종실 회왕 테무르불화와 우상 장강백등을 죽인다. 그리고 원나라 왕자 6명을 포로로 잡는다. 이로써 원나라의 중원통치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서달은 안휘 봉양사람으로 주원장과 같은 고향출신이다. 집안이 가난했으나 성격은 강인하였고, 일을 하에 있어서 머리회전이 빨랐다. 지정13년(1353년) 6월, 당시 홍건적 수령 곽자흥에 예속되어 있던 주원장이 고향에 돌아와 병사를 모집할 때, 22세인 서달은 그를 따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주원장을 따라 남정북전의 병영생황을 시작한다. 지정15년(1355년), 서달은 전공으로 진무에 승진한다. 오래지 않아 농민반란군내에서 화주사변(和州事變)이 발생한다. 홍건적 수령중 하나인 손덕애(孫德崖)는 자기 부대에 군량미가 없자, 주원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주원장은 대국을 중시해서 손덕애의 부대를 받아주었다. 곽자흥과 손덕애는 일찌기 마찰이 있었으므로, 이를 알고는 나중에 화를 내고, 친히 화주로 와서 주원장을 훈계한다. 손덕애는 이를 듣고 두려워 몰래 도망치려고 하다가 곽자흥이 보낸 자에게 체포된다. 손덕애의 부하들은 이를 듣고 분개하여, 내분이 발생한 것이다. 이 때 주원장이 마침 손덕애를 마중하려 손덕애의 군중에 있었으므로 손덕애의 부장들이 주원장을 체포하고 주원장을 죽여서 원한을 풀겠다고 말했다. 서달은 성에서 주원장이 손덕애의 부하들에게 인질로 잡혔다는 말을 들었다. 중간에서 조정역할을 해서, 손덕애와 주원장이 모두 무사히 풀려나게 되어 위기는 평정된다. 이 화주사변때 서달이 몸을 아끼지 않고 주원장을 구하기 위하여 노력한 것으로 인하여 주원장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게 된다. 서달은 항상 장수들중 최고의 위치를 차지했으며,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우는데 개세의 공을 세운다. 그래서 명나라의 "개국공신제일"이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서달의 대군은 왜 7월 25일에 통주에 도착하였으면서 즉시 군사를 몰아 겨우 몇십리 떨어진 대도성을 공격하지 않고, 통주에 머무르다가 8월 2일이 되어서야 대도에 들어가고, 이로 인하여 "원순제를 도망치게 놔두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서달이 진군속도를 늦춤으로 인하여 원순제는 순조롭게 도망칠 수 있어서 당시 조야에 의론이 분분했다. 즉, 서달이 고의로 적을 놓아준 것이라고 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명나라 때의 서정경이 전승야문이라는 글에서 기록한 바에 의하면, 서달과 또다른 장수 상우춘이 함께 원순제를 쫓을 때, 거의 따라잡았을 때, 서달이 돌연 명을 내려 군사를 돌렸다고 한다. 상우춘이 대노하여 즉시 주원장에게 고해바쳤다. 주원장은 이로 인하여 서달을 의심하여 사람을 보내 서달을 입조하게 한 후 체포하려고 하였다. 서달은 주원장을 만나고서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바로 도망쳐버렸다. 주원장이 사람을 보내어 그의 죄를 사면하겠다고 하였으나, 서달은 전혀 듣지 않았다. 부득이, 주원장이 친히 찾아가고 난 다음에야 두 사람은 화해를 할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한 기록은 많다. 서달이 고의로 모반을 하고자 한 것이라고 한다든지, 아니면 서달이 원순제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든지 하는 등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전부 정사가 아니다. 사실, 서달은 총명하면서도 신중한 성격이어서, 고의로 원순제를 풀어주었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후세의 사가인 조익은 서달이 원나라를 멸망시키는 주요한 의사결정을 함에 있어서 스스로 모든 것은 독단적으로 처리하지는 않았따는 것이다. 그 말은 원순제를 도망치도록 시간을 준 것이 주원장의 의사에 따른 것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명태조실록"에도 기록이 남아 있다. <<명태조실록.권32>>에는 서달과 주원장의 대화가 실려있다. 서달이 "신은 병사를 이끌고 같을 때, 북쪽으로 도망칠 것이 걱정됩니다. 후환을 남기는 것이 될 것이니 끝까지 추격해야겠습니다"라고 하자, 주원장은 "원나라는 삭방(朔方)에서 일어났고, 세조때부터 중하(中夏)로 왔다. 기운이 성한 것을 탔으므로 당연히 흥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기운은 이미 끝나갔으니 당연히 쇠할 것이다. 성공하고 실패하고는 하늘에 달려있다. 만일 북쪽으로 도망친다고 하더라도, 하늘이 그들을 멸망시킬 것이고, 그들 스스로 망할 것이다. 굳이 궁병을 추격할 필요가 없다(不必窮兵追之), 그러나 변방으로 도망친 후에는 변방의 방어를 강화하여 그들의 침략은 막아야 할 것이다" 이것을 보면 서달이 굳이 원순제를 추격하여 잡으려 하지 않은 것은 주원장의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