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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중국의 명소 (북부)

중국에 묻힌 필리핀 국왕

by 중은우시 2006. 11. 17.

 

 

 

중국 산동성의 덕주(德州)의 북쪽에 있는 북영촌(北營村)이라는 마을에는 고대 필리핀의 소록국(蘇祿國) 동왕(東王)의 무덤이 있고, 이 마을에는 지금도 필리핀 국왕의 후손들이 모여살고 있다.

 

소록국왕묘는 겉으로 보기에는 중국식의 모습을 하고 있다. 길다란 신도(神道), 돌로만든 패방(牌坊), 신도 양쪽에 늘어선 석인(石人), 석수(石獸), 끝에는 위엄있는 의문(儀門), 의문을 들어서면 송백이 울창하게 을 이루어 있다. 능은문, 정전, 동서배전이 차례로 서 있으며, 정전의 정중앙에는 주인이 똑바로 서 있는데, 노란 옷을 걸치고, 위엄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완전히 명나라때의 복장이다. 정전뒤의 가운데에는 커다란 원형 토총이 있다. 묘비에는 "소록국공정왕묘(蘇祿國恭定王墓)"라고 쓰여 있다. 공정왕은 명나라 영락제가 소룩국 동왕에게 내린 시호이다. 다른 왕릉과 다른 점은 소록국왕묘의 정문밖 서남쪽에 청진사(淸眞寺, 이슬람사원)이 있고, 동남쪽에는 3개의 토총이 있다. 묘비로 보면, 각각 왕비, 둘째아들 온합라(溫哈喇), 셋째아들 안덕로(安德魯)의 묘이다. 모두 소록국왕의 묘와 마찬가지로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그들의 고향 필리핀을 향한 것이다.

 

고소록국은 필리핀의 소록군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슬람교를 믿던 추장국이었다. 국내에는 동왕(東王), 서왕(西王), 동왕(峒王)의 세 왕이 있었는데, 동왕이 그 중 가장 높았다. 명나라의 정화가 동남아를 정벌할 때, 명나라왕조의 위신이 매우 높아졌고, 해외의 여러나라들이 명나라를 찾아왔다. 소록국은 당시 동왕이 파도갈팔합자(巴都葛叭哈刺), 서왕이 마합라질갈마정(麻哈喇叱葛麻丁), 동왕이 파도갈마자복(巴都葛麻刺卜)이었는데, 동왕이 가족과 관리 합계 340명여명을 이끌고 남해를 건너, 동방최강국이었던 명나라를 찾아와서 진주, 보석, 대모등을 바치고, 영락제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인곡, 습의, 관대 및 안마등의 기물을 받았다. 그를 따라왔던 사람들도 등급에 맞게 선물을 받았다. 세 사람의 국왕은 장성에 올라가서 연산을 바라보고, 영락황제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면서 27일간의 국빈방문을 마쳤다. 돌아갈 때, 영락황제는 다시 세 왕에게 황금, 백은, 옥대, 비단등을 주었고, 사람을 보내어 경항대운하를 따라 남하하여 귀국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그 때는 음력 9월이어서 이미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했다. 고소록국은 적도에 가까워 기후가 매우 더우므로,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동왕이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물이 맞지 않아서 덕주이북에 도착했을 때, 동왕은 독감이 걸려 치료를 하였으나 그만 사망하고 만다.

 

이 소식이 북경에 전해지자 영락제는 예부관리를 보내어 덕주에서 동왕을 위한 장례를 치러주고 중국의 왕의 예에 따라 덕주북부에 땅을 잡아주어 동왕의 묘를 만들어주고, 시호를 '공정왕'으로 내렸다. 지금도 남아 있는 비문에는 이러한 경과가 그대로 적혀 있다.

 

동왕의 장례를 마친 후, 동왕의 장남은 서왕, 동왕과 함께 귀국하여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왕비 갈목녕(葛木寧), 둘째아들 온합라, 셋째아들 안도로와 시종 십여명은 동왕의 묘를 지키기 위해서 중국에 남았다. 그들의 생활을 돌봐주기 위하여 명나라 정부는 땅을 내리고 세금을 거두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이슬람교를 신봉하므로 동왕묘 서남쪽에 청진사를 지어주고, 제남등지에서 세 사람의 회족(回族)을 보내주어서 그들을 돌보게 하는데 각각 마(馬), 하(夏), 진(陳)씨였다. 동왕의 후예들은 이 세 성씨와 통혼했다. 다만, 동왕의 후예들끼리는 혼인하지 않았다. 묘를 지킨지 6년이 되던 해에 그들은 필리핀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중국을 잊지 못해 그 다음해 다시 되돌아온다. 이 때부터 왕비와 두 아들은 중국에 거주했고 죽은 후에도 동왕묘의 동남쪽에 묻혔다.

 

청나라의 옹정제에 이르러 동왕의 후예들은 중국국적을 취득하도록 요청하고, 옹정황제는 이를 승인한다. "명나라때 덕주에 남아 묘를 지키도록 한 사람들의 후손은 온(溫), 안(安)의 두개 성씨로 하여 덕주에 입적시킨다" 이때부터 이들은 중국국민이 되었다. 당시에 온, 안 두 성씨는 이미 193명으로 늘어나 있었고, 그들이 모여사는 마을을 '북영촌'이라고 하게 되었다. 과거의 우대조치들은 하나하나 사라지고, 세금도 납부하게 되었으며, 그들은 일반 백성들과 동일하게 살아가게 된다. 

 

지금도 북영촌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이 온, 안의 두개 성씨이다. 그들중에는 동왕의 16대손부터 21대손까지 있다. 동네사람들에 따르면 외부에 나가사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특히 운하가 두번에 걸쳐서 범람한 적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다른 동네로 가서 삶을 모색했다고 한다. 그러나, 매년 제사때가 되면 외지에 나간 후손들도 고향을 적지 않게 찾아온다고 한다.

 

후손중 온헌(溫憲)은 건륭제때 1795년 거인(擧人)으로 지수, 영국, 휘주, 안경등의 지부(知府)를 지냈다. 동왕의 후예중 청나라때 고관을 지낸 유일한 인물이다.

 

안수덕(安樹德)은 동왕의 15세손으로 일찌기 풍옥상 장군의 아래에서 사단장을 지냈다.

 

안빈요(安賓堯)는 동왕의 16세손으로 계계(桂係)의 대표인물 백숭희의 고급고문, 소장(少將)을 지냈다.

 

안적광(安迪光)은 중국소수민족의 의학사상사를 다룬 <<중국회회의학사적>>을 편찬하였고, 세계전통의학대회 부주석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