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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중국의 명소 (북부)

심양고궁(瀋陽故宮)

by 중은우시 2006. 12. 12.

심양고궁의 원래 이름은 성경궁궐(盛京宮闕)이었고, 이후에는 봉천행궁(奉天行宮)으로 불리웠다. 이 곳은 청나라가 북경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의 황궁이었고, 애신각라씨가 흥기한 땅이다. 380년전에 청나라의 창시자는 바로 여기에서 중원을 향한 마지막 발걸음을 내디딜 준비를 하고 있었다.

 

380여년이 지는 지금 중국의 저명한 학자들이 심양고궁의 창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학술세미나를 개최하였는데, 사료가 부족하여 심양고궁에 관한 많은 사실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수수께기 1 : 누르하치는 왜 황급하게 심양으로 천도하였는가?

 

1621년, 누르하치는 팔기병을 이끌고 날카로운 기세로 요양(遼陽)을 점령하였다. 요양은 요동의 중요진지였고, 누르하치는 도성을 허투아라(赫圖阿拉)에서 요양으로 옮기고, 토목공사를 진행하고 궁궐을 지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하게, 1625년 3월 3일 아침조회때, 누르하치는 돌연 중신과 패륵들을 불러모은 후 성경(심양)으로 천도할 것을 제안했다. 여러 친왕, 신하들은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누르하치는 자기의 주장을 꺽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왜 황급하게 천도하기를 결정했는가? 민간에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누흐하치는 전통풍수를 믿었는데, 풍수선생이 말한 바에 따라, 동경성의 서남쪽에 낭낭묘를 만들고, 동문에는 미타사를 만들었으며, 풍령산아래에는 천불사를 만들었다. 이 세개의 절로써 용맥의 왕기를 보존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세개의 절은 그저 용두(龍頭), 용조(龍爪), 용미(龍尾)만을 누를 수 있었고, 용의 등뼈는 누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용이 허리를 한번 펴자, 바로 날아오를 수 있었고, 북쪽으로 날아서 혼하북쪽에까지 날아갔다. 누르하치는 용은 하늘의 뜻을 전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는 용이 잠수한 곳에 성과 못을 짓게 하였고, 이 새로 지은 곳을 "봉천(奉天)"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혼하의 옛이름이 심하였으므로 이 심하의 북쪽을 양(陽)이라고 불러 심양이라고도 불렀다.(풍수에서는 산의 남쪽, 강의 북쪽이 양이고, 산의 북쪽, 강의 남쪽이 음이다)

 

당연히 전설은 신기하기는 하다. 국가청사편찬위원회 위원인 이치청 교수와 심양고궁박물원연구실주임인 동열은 옛날에 수도를 정할 때 풍수를 가장 중시했었다고 한다. 심양은 혼하의 북쪽에 있는데, 위로는 요하와 통하고, 요하는 다시 바다로 연결되어 풍수길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전문가들은 동시에 이런 점도 지적한다. 누르하치가 심양으로 천도한 더 중요한 목적은 전략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먼저 심양은 사통팔달의 교통요지이다. 그의 지리적인 위치는 당시의 만주족에게 매우 중요했다. 북으로 몽고를 정벌하고, 서쪽으로 명나라를 정벌하며, 남으로 조선을 정벌하는데 아주 유리한 위치였다. 다음으로 원래의 도성인 요양은 만주족과 한족의 갈등이 매우 심했다. 그러나, 심양은 당시 중규모의 도시여서 인구가 적었고, 관리가 쉬었다. 그래서 만주족과 한족의 모순이 격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수수께끼 2: 심양고궁은 도대체 언제부터 짓기 시작했는가?

 

사료에는 아무런 명문의 기재도 없다. 심양고궁이 도대체 언제부터 지어졌는지는 역사상의 하나의 현안이고, 역사학자들이 논쟁을 벌이는 촛점이기도 하다.

 

심양고궁박물원의 연구실주임인 동열에 따르면 이것은 아마도 황궁의 건설은 백성들을 힘들게 하고 재산을 쏟아부어야 하는 일이므로 청나라 통치자들이 떠벌이고자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궁전을 짓는 것 자체는 황제가 집을 짓는 것과 같으므로 굳이 역사서에 연도를 써 넣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수년전에 안산시 문화재국의 공무원이 발견한 <<후씨종보>>에 따르면 거기에 요양동경성과 심양성경성의 건설에 대하여 상세히 기재되어 있었다. <<후씨종보>>에 따르면, 심양고궁의 유리기와를 만드는 책임을 맡은 후진거의 가족은 천명9년에 심양으로 옮겨가고, 궁전의 용루봉궐을 만들고, 삼릉의 각 공사등에 썼다."고 되어 있다. 전문가들은 이로써 추단하기를 심양고궁은 천명9년 즉 1624년부터 건축되기 시작했다고 본다.

 

2003년 1월 15일, 심양만보는 <<심양고궁은 도대체 언제 건축되었는가?>>라는 글에서 심양고궁박물원 원장 겸 청나라 전사전문가인 지운형 연구원이 여러해동안 연구한 바에 따라, 심양고궁의 건축개시연도를 1624년(천명9년)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동열 주임은 이런 주장에 찬성하지 않았다. <<후씨종보>>에서 말하는 "천명9년"이라는 것은 후진거일가가 심양으로 이주한 시간이고, 후진거가 심양으로 이사간 후에 바로 고궁을 짓기 시작했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동열은 심양고궁은 1625년부터 짓기 시작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유는 두가지이다. 하나는 1624년에는 요양 동경성이 아직 다 짓지 못했고, 많은 패륵, 대신들이 모두 자기의 집을 짓는데 바빴다는 것이다. 누르하치가 명을 내리기 전에는 심양에서 미리 고궁을 짓기 시작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본다. 둘째, 누르하치는 성북쪽의 칸왕궁에 거주했고, 고궁에 거주하지 않았다. 만일 심양고궁이 1624년부터 지어지기 시작했다면, 누르하치가 왜 고궁안에 머물지 않고, 성옆에 따로 머물렀겠는가?

 

수수께끼 3: 누가 심양고궁의 공사책임자인가?

 

이런 청나라때 궁전들은 도대체 누가 설계하였고, 누가 지었는가? 이것은 <<후씨종보>>도 그저 빙산의 일각만을 보여준다.

 

후씨종보에는 이런 기재가 있다. "대청고황제는 군대를 이끌고 정벌하여 요양성을 얻었다. 천명7년에 팔각금전을 지었고, 유리용기와가 필요하여 증조부인 후진거에게 명하여 이를 진행하게 하였으며 천총의 직위를 내렸다. 나중에 천명9년 심양으로 이주했고, 궁전의 용루봉궐을 다시 만들었으며, 삼릉의 각공사에도 썼다. 그리고 장정 600여명을 주어 심부름하게 하였다. 증조부는 힘을 다하여 일을 했고, 공사를 잘 마쳤다. 17명의 장인들을 뽑았는데, 모두 힘을 다하여 일했다."

동열은 이 문자로 보면 후진거는 심양황궁의 건축에 관계가 깊다는 것이다. 이상의 문자로 보면, 후진거는 고궁건축의 책임자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심양고궁에 많은 건축이 만주, 몽고의 풍격을 지닌 것을 보면, 후진거는 한인으로서 설계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후진거를 제외하고 다른 설계자와 건축가가 분명히 있을 것으로 본다.

 

이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은 다른 의견을 내기도 한다. 어떤 전문가는 후진거는 그저 유리기와를 굽는 장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그는 심양고궁의 건축가는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후진거는 다른 곳에서 심양으로 이주해왔는데, <<해성현지>>의 기재에 따르면 "성동남 35리, 암산의 산록에 황와요가 있어, 황색유리기와를 만들었다"라고 되어 있다. 청나라때 공부에서 5품관리를 보내어 유리기와의 제작을 감독했다. 그리고 이 기와는 능침궁전에 사용했다. "후씨, 원적은 산서 명복현, 나중에 본 지역으로 이사옴. 청나라 초에 한군기에 예속됨. 성경오품관을 세습하고 황색기와제작을 책임짐. 후손이 번창했고, 대대로 성동남 기목성에 살았음" 이 현지는 또 "청초에 능침궁전을 지을 때, 필요한 용기와, 채색기와를 후진거 성경공부오품관...."이라고 기재하고 있다.

 

그래서 누가 심양고궁을 설계하고 만들었는지는 아직까지도 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