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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요광효(姚廣孝) : 대명제일기인(大明第一奇人)

by 중은우시 2006. 10. 31.

요광효(1335-1418)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간승(奸僧, 간악한 승려)이나 음모가로 부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정치가나 군사가로 부르기도 한다. 어떻게 부르든간에 그가 권모술수에 아주 능한 고승이었고, 명나라 초기의 정치에 많은 영향을 남겼다.

 

역사상 요광효는 여러가지 괴이한 행적을 남겼다. 그는 의원집안에서 태어났으면서, 권모술수에 능했고; 그는 생활이 힘들지도 않으면서 어려서 출가하여 중이 되었고; 불문에 들어갔으면서도 정치에 아주 관심이 많았고; 홍무제, 건문제를 모시지 않고, 연왕(주체, 나중의 영락제)를 모셨으며; 별달리 고생을 겪지도 않으면서 <<영락대전>>을 주편했다. 그는 모르는 책이 없었으며, 모르는 것이 없었다.

 

요광효는 1335년 강소성 소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의원이었으며, 조부와 부친은 모두 시골의 의원이었다. 요광효가 태어날 때는 집안이 약간 몰락하여, 생활이 조금 힘들기는 하였으나, 조부때부터 불사를 많이 하고 덕을 쌓아 동네에서 존경받는 집안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책을 읽기는 하였으나, 관리가 되려고 하지도 않았고, 의원이 되려고 하지도 않고, 큰 일을 벌이려고 하였다. 14세때부터 불학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17세때 항주의 묘지암에서 출가했다. 법명은 도연(道衍)이다. 스스로 도허자(逃虛子)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도연화상이라고 불렀다.

 

불문에 몸을 담고도 원말의 유명한 도사인 석응진을 스승으로 모셔 주역, 방술, 포진법, 용병술등을 배웠다. 그는 우암대사에게서는 내외전적을 배웠고, 불, 유 두가지에 모두 능통했다. 그는 당시의 저명한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송렴, 고계등과 교우했다.

 

명나라가 들어선 후, 요광효가 소림사에서 친구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에, 당시 관상을 가장 잘보기로 소문난 원공을 만난다. 원공은 그를 보자 깜짝 놀라면서 "현재 천하는 이미 태평해졌는데, 어떻게 이렇게 관상이 기이한 중이 있단 말인가? 이 한 쌍의 삼각눈은 궤이하기 그지없고, 얼굴은 병이든 호랑이같으며, 뼛속에서는 살기가 느껴지니 이는 분명 권모술수에 정통한 고인이다. 앞으로 분명히 천추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요광효는 이 말을 듣고 화를 내기는 커녕 껄껄 웃으면서 좋아하였고, 원공과 친구가 되었다.

 

홍무15년(1382년), 요광효는 이미 47세가 되었다. 이해에 홍무제 주원장의 마황후가 사망하고, 주원장은 천하의 고승을 모아서 각 황자들에게 분배하였으며, 고승들이 각 황자들을 위하여 절을 짓고 독경하여 마황후를 위하여 복을 기도하도록 하였다. 요광효는 추천을 받아 고승의 대열에 끼었다. 그리고 황자들을 만났을 때, 한 눈에 4황자 주체(朱체, 이후 영락제)를 마음에 둔다.

 

요광효는 주체를 보자마자 스스로 그를 따르기로 한다. 주체는 그가 삼각눈에 몸이 뚱뚱하여 별로 그를 반가워하지는 않는다. 요광효는 주체의 곁으로 가서 "빈승이 전하에게 쓰여진다면, 당신에게 하얀 모자를 바쳐드릴 수 있습니다"라고 작은 소리로 말한다. 주체는 그의 말 속에 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왕(王)에 흰(白)모자를 씌우면 황(皇)이 되지 않는가? 그래서 그를 붙잡아 끌고는 내실로 들어간다. 요광효는 고금을 논하고, 시국을 분석하는데, 말마다 옳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주체는 주원장에게 청하여 요광효를 자신에게 달라고 하게 된다.

 

이후 얼마되지 않아 요광효는 연왕을 따라 북경으로 온다. 명의상으로는 경수사의 주지였지만, 실제로는 항상 연왕부를 드나들었고, 연왕의 가장 중요한 참모이자 심복이 되었다.

 

홍무31년, 주원장이 병으로 죽자, 황위는 손자인 주윤문(건문제)에게 승계된다. 요광효는 기회가 왔다고 여기고, 갖은 방법으로 주체로 하여금 자신감을 갖게 하고, 병사를 일으켜 황제위를 빼앗도록 종용한다.주체가 "현재 건문제는 민심을 잃지 않았는데, 내가 병사를 일으키면 민심을 얻지 못할 것이고 결과를 예측할 수 없지 않겠는가?"라고 하니, 요광효는 "저는 계속 천문역법을 연구했습니다. 현재의 천하는 전하의 것입니다. 천도가 우리쪽에 있으니, 민의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연왕은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요광효와 연왕이 몰래 연왕부를 나가 작은 술집에서 술을 마시면서 적적함을 풀고 있을 때, 한 노인이 다가오더니 사방을 둘러본 ㅎ 연왕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전하는 어찌 이렇게 자신을 아끼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주체는 깜짝 놀란다. 마음 속으로 전혀 모르는 자인데 어찌 여러 사람중에 나를 알아본단 말인가라고..그 자는 이어서 말했다 "소인은 성이 원이고 이름이 공입니다. 어려서부터 역리와 관상에 능했습니다. 천명을 볼 수 있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전하의 모습이 어찌 이런 평범한 옷을 입었다고 하여 가려지겠습니까?" 주체는 원공을 데리고 연왕부로 돌아오고, 자기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하게 한다. 원공은 "전하는 천자의 상을 지니셨습니다. 이후 태평천자가 될 것이오니 천하의 백성의 복입니다" 이후 연왕은 모반을 일으키려는 마음을 더욱 강하게 품게 된다. 요광효의 기획이 없었다면 연왕은 모반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고, 요광효의 책략이 없었다면 연왕의 모반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건문원년(1399) 7월, 연왕은 "청군측(淸君側, 황제의 간사한 측근을 몰아낸다)"의 핑계로 거병하니 역사상 유명한 정난지역이다. 요광효는 명을 받아 북경을 지킨다. 그러나 전쟁의 전략전술은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건문2년 연왕은 대군으로 제남성을 포위하였으나 3개월이 되도록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요광효는 즉시 사람을 보내어 연왕에게 서신을 보낸다. 잠시 전쟁을 중지하고 북경으로 돌아오라고 하였다. 요광효는 연왕과 건문제의 황제위를 놓고 싸우는 전쟁은 보통백성이나 대신들과는 큰 관계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관건은 남경을 뺏는 것이었다. 그래서, 연왕에게 병사들을 정예화한 후 크고 작은 도시들은 건너뛰고 직접 남경을 치도록 건의한다. 요광효가 건의한대로 남경을 함락시키자 바로 연왕이 황제위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영락제는 정난지역의 최고공신은 요광효라고 생각하여 그에게 도연이라는 법명을 버리고 환속하라고 요청한다. 이를 위하여 요광효에게 큰 저택을 하나 하사하고 두 명의 아리따운 여인도 내린다. 요광효는 매우 총명한 사람이어서 너무 공이 크서 군왕을 눌러서는 안된다는 도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환속을 거부하고 두 궁녀도 처다보지도 않았고, 저택에도 가보지도 않았으며, 절에서 기거했다. 영락제는 그의 태도가 분명하자 환속시키려는 생각을 거두고, 그에게 전국의 불교를 관장하게 하면서 조정에 들어와서 논의는 하도록 요청한다.

 

연왕은 황제위를 빼앗은 후, 후세의 기록을 걱정하여 요광효에게 태조실록과 건문제의 기록을 정리하도록 요청한다. 당시 75세의 고령이었던 요광효는 이 일을 맡아서 7년간 추진한다. 또한 중국역사상 최초, 최대의 백과전서인 영락대전도 편찬한다.

 

영락16년(1418년) 요광효는 병으로 사망하니 나이 84세때였다. 영락제는 2일간 조회를 보지 않았다. 그리고 요광효의 바람대로 승려의 예로 장례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