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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성7

중국역사상 "남경"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도시는...? 글: 한곤(寒鯤) 이전에 '북경'을 소개한 것과 마찬가질, '남경'이라는 명사도 처음에는 어느 소재지구와 관련된 전용지명은 아니었다. 역대왕조의 필요에 따라 서로 다른 지구에 설치된 행정색채가 충문한 '행정지명'이었다. 왕왕 '남도(南都)'와 동의어로 쓰였다. 모두 '남방의 경성, 혹은 .. 2018. 7. 15.
아방궁의 역사진상(7): 아방궁이 불질러졌다는 사료는 어디에 있는가? 글: 진경원(陳景元) <명사>의 기록에 따르면, 명성조 주체는 영락4년(1406년)에 새로운 부지를 정해 북경고궁을 건설하도록 조서를 반포한다. 영락18년(1420년)에 공사는 완공되었다고 선언한다. 왜 이렇게 규모가 큰 궁전을 짧은 14년의 기간내에 완공할 수 있었을가? 원래 이것은 그저 .. 2018. 2. 23.
최호(崔浩): 제갈량보다 뛰어나다는 북위제일모사(北魏第一謀士) 글: 개풍문사(凱風文史) 탁발제국의 수도 평성(平城), 동쪽 교외 교통요지에 방원 130보의 평지 위에 거대한 비림(碑林)이 세워졌다. 전후로 3백만인/차가 8년동안 이 거대한 공사에 동원되었다. 그들은 명을 받들어 천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기서(奇書)를 만들었고, 제국의 영광스러운 창.. 2016. 6. 18.
[황자쟁위술] 차도살인술(借刀殺人術) 승기타겁패(乘機打劫牌) 탁발순(拓跋恂)편 탁발순(拓跋恂, 元恂)은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 탁발굉(拓跋宏, 元宏)의 장남으로 태화17년(493년) 황태자에 오르나 나중에 폐위되고 그의 동생 탁발각(拓跋恪, 元恪)이 황태자에 올라 선무제(宣武帝)가 된다. 둘은 모두 태화7년(483년) 윤사월에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래 북위는 .. 2015. 11. 1.
권력이 없었다면 여후는 행복했을까? 글: 후홍빈(侯虹斌) 1 여후는 정치세력의 투쟁과 후계자 다툼에서 잠시 승리한다. 그러나 국가관리층면에서 여후는 여러가지 곤경에 빠진다. 그것도 이상할 것은 없다. 농촌에서 농사나 짓던 출신의 여인이 어찌 나라를 다스리는 교육을 받아보았겠는가? 실제로, 여후의 집정기간동안 중.. 2015. 4. 25.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 (III) 비극인생 척발굉은 선비족의 일원으로, 그의 혈관에는 척발씨의 혈액이 흐른다. 본민족문화에 대하여 자연히 가깝게 느껴지고 호감을 지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한민족의 유가문화의 훈도와 영향을 받아, 두 가지 서로 다른 문화인자가 그의 마음 속에 동시에 존재했다. 분명히 서로 충.. 2008. 9. 3.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 (II) 486년, 효문제의 나이가 만 20세가 되었다. 이미 성인이 된 것이다. 정리나 상황으로 보아, 풍태후가 계속하여 임조칭제하기는 힘들었다. 그녀는 부득이 권력을 척발굉에게 넘겨준다. 그리하여, 황제는 비로소 곤룡포와 면류관을 하고 친히 자신이 조서를 쓰게 되는 것이다. 탁발굉이 친정을 시작한 후.. 2008. 9.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