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경21

장헌충살인고(张献忠杀人考) (1) 글: 장굉걸(张宏杰) ​ 1 ​ 숭정17년(1644년) 육월 이십일일, 중경 통원문 바깥의 광장에 3만7천명의 명군이 집결해 있었다. 그들은 110개의 긴 줄로 늘어서서 차례로 앞으로 나아갔고, 그들은 앞에 놓인 나무탁자 위로 오른손을 내밀어 탁자 위에 놓았다. 나무탁자 앞에 서 있는 사병은 칼을 내리쳤고, 손은 잘려나갔다. ​ 이는 명나라말기 농민군 장헌충의 부대가 포로로 잡은 명군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육월 이십일, 장헌충은 중경성을 함락시킨다. 이는 그가 사천에 들어간 후 거둔 최초의 대승전이었고, 전군은 위에서 아래까지 기뻐 날뛰었다. 장헌충은 특별지시를 내린다. 비록 명군이 완강하게 저항하였지만, '팔대왕(八大王, 장헌충 자신을 가리킴)'은 이번에 관대함을 베풀어 포로들은 한명도 죽이지 않고, .. 2024. 1. 15.
중화민국의 12개 직할시(直轄市) 글: 민초사운(民初思韻) "직할(直轄)"은 고대에 "직예(直隸)"라고 불렀다. '직예제'는 송(宋)나라때부터 시작되었다. 북송은 "로(路)"를 성급(省級)행정단위로 삼았다. 23로(路)를 설치하는 외에 중앙정부가 직접 관할하는 부(府)가 있었다. 예를 들면 북경의 수도인 개봉부(開封府)이다. 1946년, 국민정부는 '헌법'에서 여러번 '직할시'를 언급한다. 그러나, 제11장의 '지방제도'에는 단지 '성(省)', '현(縣)'만 있고, 직할시와 지방(서장)에 관한 규정은 없었다. 그리고 그후 공문서에서는 "원할시(院轄市)"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리하여, 직할시는 직접 사용되지 않는다. 1921년 7월 북경정부가 반포한 에서 경도시(京都市)는 내무부가 직접 감독한다고 규정했다. 이는 중앙정부가 직접 감독하는.. 2023. 7. 6.
대일항전시기 3차례의 위기순간 글: 양천석(楊天石) 첫번째 위기순간은 송호(淞滬)전투에서 패배하고 남경(南京)이 함락된 때였다. 국민당 고위층의 대다수가 주화파(主和派)였다. 송호항전은 1937년 8월 13일부터 시작한다. 국민정부는 75만의 군대를 모아서 3개월간 전투를 벌인다. 국민정부로서는 당시에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동원한 것이다. 전국각지에서 군대를 상해로 보내 일본군과 혈전을 벌인다. 그러나 결정이 성급하게 이루어졌고, 지휘가 체계적이지 못하여 결국 패전하고 만다. 일본군은 군사상식을 뛰어넘어 혈전을 벌인 후, 전혀 쉬지 않고, 빠른 속도로 남경으로 진격한다. 12월 13일 남경을 점령하여, 국민정부는 수도가 함락된다. 12월 15일, 국민정부는 고급간부회의를 소집한다. 회의에서는 주화파와 주전파가 격렬하게 논쟁을 .. 2023. 4. 19.
장한수(張恨水): 3명의 부인, 13명의 자식, 민국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작가 글: 습문화(拾文化) 장한수가 평생 가장 자랑스러워한 것은 바로 글솜씨이다. 양으로 따지자면 그는 민국시대 작가들 중에서 절대로 첫손에 꼽힐 것이다. 50여년간 집필하면서 3000여만자를 썼다. 동시에 여러 소설을 연재하는 것도 다반사였다. 최고기록은 동시에 7편의 장편소설을 연재한 것이다. 그렇게 많은 스토리라인, 그렇게 많은 인물이 있지만, 한번도 헷갈리지 않았고, 한번 글을 쓰면 고치지도 않았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가 한손으로 소설을 쓰면서, 다른 한손으로는 마작을 했는데, 둘 다 실수없이 해냈다는 것이다. 질로 따져도 그는 팬들사이에서는 대가중의 대가이다. 진인각(陳寅恪)이 두 눈이 멀고 나서, 매일 친구 오복(吳宓)에게 부탁해서 장한수의 소설 을 읽어달라고 부탁해서 병상의 무료함을 달랬다고 한.. 2023. 2. 22.
민국시대의 12개 직할시 글: 역사망(歷史網) "직할(直轄)"을 고대에는 "직예(直隸)"라고 불렀다. 직예제도는 송나라때부터 시작된다. 북송은 "로(路)"를 설치하여 현재의 성급행정구역으로 삼는다. 23로외에 중앙정부가 직접 관할하는 부(府)가 있었다. 예를 들어 북송의 경사소재지인 개봉부(開封府)이다. 1946년 민국정부에서 통과된 '헌법'에는 여러번 '직할시'가 언급되어 있다. 다만 제11장 '지방제도'에는 단지 '성(省)', '현(縣)'만 규정되어 있고, 직할시나 지방(서장)에 대한 규정은 없었다. 그리고 이후의 공문에서도 여전히 "원할시(院轄市)"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직할시"라는 명칭이 직접 시행되지는 못했다. 국민정부에는 일찌기 12개의 직할시가 있었다. 1921년 북경정부가 반포한 에는 경도시(京都市)를 내무부가 직.. 2021. 12. 24.
장개석의 사무실에는 왜 책이 한권도 놓여 있지 않았을가? 글: 진관임(陳冠任) 지도자로서 장개석의 사무실은 세계각국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안에서 책 한권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사무실에 책을 한권도 놓아둔 적이 없다. 3,4십년대 중경(重慶)에 있을 때, 장개석은 두 개의 사무실이 있었다. 하나는 군사위원회(軍事委員會), 다른 하.. 2019. 3. 21.
조어성(釣魚城): 몽골철기가 36년간 함락시키지 못한 산성. 글: 삼창(森彰) 1234년 송(宋)-몽골(蒙)연합군이 금(金)을 멸망시킨 후, 남송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다. 다음 해, 몽골칸 오고타이가 서로는 천섬(川陝)에서 동으로는 회하(淮河)하류에 이르는 수천리전선에서 동시에 남송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다. 송-몽골전쟁이 전면적으로 발발한 것이다.. 2018. 12. 15.
중국고대에 도성(都城)이었던 도시들은 어디인가? 직할시 1. 북경(北京), 현재 수도. 4대직할시의 으뜸. 일찌기 연(燕), 원(元), 명(明), 청(淸)등의 도성 2. 중경(重慶), 현재 4대직할시의 하나. 중화민국의 배도(陪都) 부성급(副省級) 성회(省會)도시 3. 남경(南京), 현재 강소성회(江蘇省會), 일찌기 삼국오(吳), 동진(東晋), 남조송제양진(宋齊梁.. 2018. 2. 26.
왕정위의 논리와 운명 글: 풍학영(馮學榮) 왕정위는 부정적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부정적인 점은 인품이 아니라, 국면에 대한 오판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왕정위라는 사람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그는 확실히 길을 잘못 선택했다. 만일 왕정위를 삶을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기꺼이 노예가 되고자 했던 겁.. 2016. 5. 19.
장개석은 어떻게 성도(成都)에서 대만(臺灣)으로 도망갔는가? ㅠ상,글: 왕풍(王豊) 장개석이 처음 사천에 온 것은 1935년 3월 2일이다. 그가 사천에 간 목적은 첫째가 독군(督軍)이다. "공비토벌" 전선을 시찰하기 위함이다. 장개석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전력을 다하여 사천성정부가 사천을 건설하는 것을 돕고, 사천동포의 고통을 해소시켜 주겠다고, .. 2015. 1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