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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9

유표(劉表) 수하의 팔대맹장 글: 정회역사(情懷歷史) 유표(142-208), 자는 경승(景升), 산양군 고평현(지금의 산동성 미산) 사람이다. 동한말기의 종실, 명사이고 한말 군웅중 한 명이다. 서한 노공왕(魯恭王) 유여(劉餘)의 후손이다. 동한말기, 유표는 진남장군, 형주목, 가절에 임명되고, 성무후(成武侯)에 봉해진다. 형.. 2019. 1. 13.
제갈량이 염두에 둔 군사후계자는 누구였을까" 글: 정정(丁丁) 제갈량의 임종전에, 개인의 후사에 대한 내용은 얼마 되지 않고, 많은 것은 촉한의 인사안배였다. 정치 방면의 후계자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 제갈량이 지정한 사람은 장완(蔣琓), 비위(費褘)이고, 사실상 동윤(董允)도 있다. 이들 3명은 제갈량과 더불어 "촉한사상(蜀漢.. 2017. 1. 28.
장완(蔣琬)의 기도(氣度) 글: 유건명(劉建明) 소위 "기도"는 기실 인품(人品)이다. 비판하는 의견을 들어주지 않고, 자신보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 일단 권력을 잡게 되면 그 결과는 심히 우려될 수밖에 없다. 장완은 삼국시대의 걸출한 정치가이자 군사가이다. 그는 승상으로 12년간 재임.. 2015. 4. 25.
제갈량은 왜 위연을 싫어했을까? 글: 조단양(趙丹陽) 육출기산(六出祁山)하면서 영토는 조금도 얻지 못한 제갈량은 오장원에서 피로와 수치가 겹치면서, 병세가 침중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하직할 때, 장사(長史) 양의(楊儀), 장군 위연에게 여러가지로 해석가능한 정치적 유언을 남긴다. 이 유언은 양의가 보기에 자신.. 2015. 2. 12.
제갈량은 위연을 어떻게 배척하고 탄압했는가? 글: 호각조(胡覺照) 위연은 유비집단의 철간(鐵杆)중 하나이다. 일찌기 유비가 탁주(涿州)에서 무장을 조직하여 황건적의 난을 진압할 때, 위연은 바로 그 중의 한 명이었다. 즉 유비집단의 철간중 한 명이다. 이는 유비의 임명에서도 엿볼 수 있다. 219년, 유비는 스스로 한중왕(漢中王).. 2015. 1. 14.
제갈량이 건립한 형주적(荊州籍) 방파체계 글: 호각조(胡覺照) 형주(荊州)의 패배와 이릉(夷陵)의 패배라는 두 번의 타격을 입은 후, 서촉(西蜀)은 인재결핍이 더욱 두드러진다. 제갈량이 국가를 운영하는 초기에 이로 인하여 골머리를 앓는다. <화양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서촉은 일찌기 성도의 남쪽에 높은 누대를 지어 사방.. 2014. 12. 16.
기원223년: 공명향좌(孔明向左), 위연향우(魏延向右) 글: 조염(趙炎) 제갈량과 위연이 불화했다는 증거는 주로 <삼국연의>의 '반골설(反骨說)'과 정사에 나오는 '자오곡기모(子午谷奇謀)'를 제갈량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역사인물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소설가의 말에 의존할 수는 없다. 유한한 사료도 제갈량이 도량좁.. 2012. 7. 14.
제갈량의 유언 작자: 미상 위연(魏延)의 죽음은 촉(蜀)의 가장 큰 원안(寃案, 원통한 사건)이다. 이 원안은 바로 제갈량의 유언에서 비롯된다. <<삼국지>>에 따르면, "(제갈)량의 병이 중해지자, 장사 양의, 사마 비위, 호군 강유등과 그가 죽은 후에 군대를 퇴각하고 통제하는 것에 대하여 비밀리에 논의하여, (.. 2008. 7. 21.
제갈량과 위연의 북벌방안 비교 글: 손옥량(孫玉良) 유비가 죽은 후, 제갈량은 선제가 남긴 유훈에 따라, 일찌가 6번이나 북벌을 시도하여 중원을 통일하고자 했다. 당시 어떻게 병사를 진격시키느냐에 대하여 두 가지 다른 의견이 있었다. 하나는 제갈량의 계책으로 농우(隴右)의 평탄한 길을 따라 기산(祁山)으로 나가서, 진공하는 .. 2007. 11.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