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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영진10

항전말기 중공의 10대원수는 어디에 있었는가? 글: 문사망(文史網) 연안정풍(延安整風)이 진행된 1942년부터 1945년기간은 대일항전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이며, 동시에 최후의 승리를 거둔 시기이다. 그 때 신중국건립후의 10대원수중 8명의 "원수"는 전선의 자기 부대를 떠나 연안으로 돌아가 정풍운동에 참가했다. 1938년 3월, 임표(林彪)는 산서(山西) 습현(隰縣)에서 염석산(閻錫山)부대의 초병에게 오인사격으로 부상을 입은 후, 연안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고 있었다. 이때부터 다시는 항일전선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해 연말 처 유신민(劉新民, 張梅)을 데리고 소련의 모스크바로 가서 치료받고 휴양했다. 1942년 2월 소련에서 연안으로 돌아와 중앙당교 부교장이 된다. 1945년 8월 25일, 임표, 유백승(劉伯承), 진의(陳毅), 등소평(鄧小.. 2023. 7. 7.
모안영(毛岸英)의 죽음과 팽덕회(彭德懷)의 관계 글: 안창해(顔昌海) 오랫동안 중국당국의 공식 선전내용은 이러했다: 모택동은 "항미원조(한국전쟁)"를 위하여, 자진하여 장남 모안영을 중국인민지원군에 참가시켰고, 모안영은 한국전쟁에서 희생되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역사자료들이 공개되면서 진상이 드러나고 있다: 공식 선전내용의 모택동이 자신하여 장남을 한국전쟁에 보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고, 모안영이 인민지원군에 들어간 것은 조직의 안배에 따른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죽음과 팽덕회는 관련이 있을까? 사건의 내막은 이러하다: 1950년 10월 3일, 모택동은 김일성으로부터 다급한 도움요청서신을 받는다: "....중국인민해방군이 직접 출동해서 아군의 작전을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0월 5일, 모택동은 한반도에 출병하여 지원하기로 결정한다. 10.. 2023. 5. 25.
남창폭동(南昌暴動): 참가한 지도자들의 서열은? 글: 고벌림(高伐林) 중국의 정치와 문화전통은 역대이래로 존비유서(尊卑有序), 즉 위계질서를 중시하며 강상(綱常)을 어지럽히지 않아야 한다. 봉건등급에 반대하고, 사람은 평등하다는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킨 중국공산당도 권력을 잡은 후에는 역시 존비유서를 따졌다. 여기에서 필자는 유방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천하를 차지한 후 논공행상을 벌이는데, 문신과 무신들이 서로 취한 상태에서 공을 다퉜다. 서로 소리치고, 검을 뽑아 탁자를 베고, 기둥을 쳤다. 유방은 그런 것이 꼴보기 싫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때 숙손통(叔孫通)이 유방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하여, 등급제도, 예악규장을 제정하여 신하들을 교욱하고 백성들을 따르게 한다. 다시 조회를 개최하자 신하들은 황공해 하면서 법도를 따랐다. 유방은 그제서야 .. 2023. 2. 9.
팽덕회(彭德懷) 죽음의 배후 글: 임휘(林輝) 1974년 12월 17일, 한 구의 시신이 301병원에서 비밀리에 화장장으로 보내어져 화장된다. 화장신청서에 쓰인 것으로는 "신청인: 왕규(王奎), 주소: 301, 사망자와의 관계: 부자, 사망자성명: 왕천(王川), 남, 76세, 번호: 0012690" 사실상, 이 왕천이라는 이름의 인물이 바로 중국의 전 국방부장, 원수 팽덕회였다. 중공내부에서 팽덕회는 성격이 솔직하고, 충동적이며, 감히 직언을 마다하지 않고 정의감이 넘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찌기 항전시기, 팽덕회는 중공의 적극항전을 주장했다. 서북의 구석에 숨어서 병력과 힘을 비축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가 주도한 "백단대전(百團大戰)"은 바로 모택동의 '마작전'만 하라는 지도사상을 어기면서 진행한 것이다. 이 전투는 중.. 2023. 1. 31.
임표(林彪)는 왜 한국전쟁 참전에 반대했을까? 글: 봉황역사(鳳凰歷史) 중공 고위층이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할 때, 모택동(毛澤東)과 임표(林彪)는 견해가 달랐다. 당시, 모택동은 확실히 임표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한국전쟁체 참가하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임표는 몸이 좋지 않아서 참전하지 않았고, 나중에 팽덕회(彭德懷)가 총사령관을 맡아서 참전한다. 나중에 이 문제에 대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특히 "9.13"사건이후, 대다수의 견해는 이러했다: "임표는 한국전쟁문제에서 소극적이었고, 병을 핑계로 참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의 진상은 그렇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모택동은 동북지방이 전쟁의 위협을 받고 있고, 또한 동북지구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라는 것을 고려하여 당중앙에 동북변방군(東北邊防軍)을 설립할 것을 건의했다. 모택동의 .. 2022. 10. 26.
국공합작시기 인민해방군 장군들이 국민정부에서 받은 계급은...? 글: 왕국동(王國棟) 항일전쟁이 전면발발한 후, 국공합작으로 국민정부는 1937년 9월(일부는 1938년에 수여) 인민해방군의 간부들에게 계급을 부여한다. 아래에서는 소장이상의 계급을 받았던 군사간부들이다. 상장(上將) 1인 주덕(朱德) 제2전구부사령 겸 제18집단군 총사령, 상장계급수여 .. 2018. 8. 11.
모택동은 신중국의 수도로 어느 도시를 생각했는가? 글: 문사열독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은 천안문의 성루 위에서 격앙한 목소리로 <중화인민공화국중앙인민정부공고>를 읽었다. 북경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로서 이미 6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정식으로 북평(北平)에 수도를 두기로 결정한 것은 1949년 3월에 개최된 중공 제7기 2.. 2014. 4. 29.
10대원수 계급부여시의 군내파벌균형 글: 복녕객(福寧客) 1955년, 중국인민해방군은 최초로 계급제를 실시한다. 중남해 회인당에서 모택동은 주덕등 10대원수에게 계급장을 수여하고, 주은래는 속유(粟裕)등 10대대장에게 계급장을 수여했다. 중국군대의 저명한 십대원수, 십대대장은 이렇게 확립된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이 .. 2013. 6. 10.
개국10대원수의 개명과정 글: 정세강(程世剛) 1. 주덕(朱德) 주덕이 태어났을 때, 모친은 그를 잘 자라라고 아명으로 "구아(狗兒)"라고 불렀다. 가끔, 주씨집안사람들은 사천북부의 습속에 따라, 그를 "구왜자(狗娃子)"라고 불렀다. 4살이 되어 부친은 주씨집안의 항열에 따라 그에게 "주대진(朱代珍)"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1895.. 2011. 9. 15.
장정(長征)중의 사도적수(四渡赤水) 작자: 삼지야(三支野) 전사쌍각주천하(戰士雙脚走天下) 전사의 두 다리는 천하를 다니고 사도적수출기병(四渡赤水出奇兵) 네번 적수하를 넘으면서 기이한 병법을 썼으니 모주석용병진여신(毛主席用兵眞如神) 모주석의 용병술은 정말 신과 같구나 1960년대 대강남북에 울려퍼진 노래가 있었으니, 바로.. 2007. 1.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