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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96

진시황 병마용은 왜 투구를 쓰지 않았을까?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1974년 3월, 진시황 병마용이 섬서성 임동현에서 다시 해를 보게 되었다. 규모가 거대하고, 살아있는 것같아서 병마용은 세계제8대기적이라고도 일컬어졌다. 최근 들어 일부 고고학자는 이해되지 않는 한 가지 현상을 얘기했다: "많은 사병의 머리에는 베로 만든 두.. 2018. 2. 28.
아방궁의 역사진상(6): 후화원을 먼저 지을 수는 없다 글: 진경원(陳景元) 진시황35녕에 아방궁을 건설하기 시작했다는 것에 관련된 관련 사료는 당연히 이육방선생과 그 고고팀이 아주 신뢰성있는 자료에 의하여 철저히 부정되었다. 다만, 이육방이 만일 다른 학자들이 제기한 '진혜문왕때 아방궁이 건축되기 시작했다"는 관점도 마찬가지로.. 2018. 2. 23.
아방궁의 역사진상(5): 아방궁연구의 새로운 시도 글: 진경원(陳景元) 역사상 많은 사료에서는 모두 아방궁의 규모가 엄청나게 거대하다고 했고, '삼백리아방궁'이라는 찬사를 붙였다. 그리하여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궁전건축군이라 칭한다. 이는 실제상황에 부합한다. 다만, 어떤 고고학자는 그중 과장된 성분이 너무 많다고 여긴다... 2018. 2. 23.
진시황릉의 허실(10): 여산북록에는 진시황이 묻혀 있지 않다. 글: 진경원(陳景元) 숙후가 사망하고, 유명한 조무령왕이 즉위한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상산에 자신의 능묘를 '예수'하기 시작한다. <사기.조세가>의 기록에 따르면, 조무령왕은 "3년(기원전323년)부터 능묘를 만들기 시작했다." <사기.집해>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능묘의 위치.. 2018. 2. 7.
진시황릉의 허실(6): '수은이상'은 외부오염때문이다. 글: 진경원(陳景元) <사기>에 "수은으로 강하대해를 만들었다"는 묘사가 있는데, 공사기술의 각도에서 본다면, 허구와 과장이 있지 않을가? 상용(常勇), 이동(李同) 두 선생은 1983년 제7기 <고고>잡지에 <진시황릉중 수은매장의 초보연구>라는 논문에서 "진시황릉 지궁에 대량.. 2018. 2. 7.
진시황릉의 허실(5): 묘장을 만드는데는 반드시 지하수를 막아야 한다. 글: 진경원(陳景元) 인류가 나타난 이래, 각 시대의 사회생활과 생산은 모두 물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다만 이런 관계는 반드시 일종이 균형을 이루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즉, 만일 이용할 물이 충분하지 않다면, 넓은 삼림이 존재할 수 없고, 매년 풍성하게 수확하는 농지가 있을 수 .. 2018. 2. 7.
어장검(魚腸劍) 이야기의 비밀은...? 글: 자금산(子金山) 전제(專諸)는 구운 생선을 받쳐들었다. 오왕의 시위는 전제의 온몸은 샅샅이 수색했지만, 시위가 구운 큰 생선을 자세히 살펴보긴 했지만, 아무도 감히 생선의 배를 갈라서 조사해 보지는 못했다. 공자광(公子光)의 거사가 임박했을 때, 거사를 준비했던 전제는 그러나.. 2018. 1. 8.
여권(Passport, 護照)의 역사 글: 왕린(王麟) 아주 얇은 작은 책자가 있다. 이것만 가지고 있으면 지정한 국가간을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다. 출국을 해본 사람이라면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반드시 휴대해야 한다. 일단 분실하면 상당히 골치아파진다. 이 작은 책자가 바로 "여권"이다. 기실, "호조(護照, .. 2017. 11. 2.
만청삼대협(晩淸三大俠): 곽원갑, 두심오, 여자검 글: 문사원지(文史園地) 중국인은 역사상 대체로 모두 "협객" 감정이 있다. 무엇이 협객인가? 아마도 천명이 있으면 천명 모두 협객을 서로 다르게 정의할 것이다. 태사공 사마천이 협객을 별도의 전으로 넣은 때로부터 시작한다. <사기.자객열전>에는 형가, 전제가 비로 협간의담의 .. 2017. 10. 25.
고대 칭호의 유래: "폐하(陛下)" 글: 매천일점고문화(每天一點古文化) 우리가 자주 보는 사극 드라마나 영화에서 신하들이 황제를 "폐하"라고 부르고, 황자나 친왕들을 "전하(殿下)"라고 부르는 것을 보게 된다. 고대인들이 칭호를 쓸 때 윗사람을 높이고 아랫사람을 낮추게 되는데, 왜 신하들은 "폐하", "전하"같은 칭호로.. 2017. 4.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