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영초 5

모택동은 준의회의(遵義會議)에서 중국공산당 최고지도자의 지위를 확립했는가?

글: 원빈(袁斌) 준의회의에서 모택동의 전당 및 전군의 최고지도자지위를 확립했다는 것이 중공의 일관된 설명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역사학자들은 장정역사연구를 통해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밝혔다. 현존하는 자료와 학자 허팡(何方)등의 연구에 따르면, 준의회의는 중공이 장정으로 도망하는 도중에 귀주 준의에서 거행한 중공중앙정치국확대회의이다. 주로 박고, 주른애, 이덕이 장정에서 통솔하던 군사노선의 잘못을 반성한 것이다. 그때 중앙홍군의 장정을 통솔한 사람은 소위 "삼인단"(총서기 박고, 정치국상위 주은래 및 코민테른 대표 이덕)이다. 회의에서 박고는 5차에 걸친 포위소탕에 대한 총괄보고를 했고, 주은래는 부보고(副報告)를 했다. 정치국상위 장문천(張聞天)은 '반보고(反報告)'를 하여, 삼인단의 군사노선의 ..

주은래는 왜 후손을 두지 못했는가

1924년 7월 고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떠난 주은래는 , 9월 광주에 도착했다. 비록 귀국전에 등영초(鄧穎超)와 서신을 통하여 사랑을 확인하였지만, 귀국후 반년동안 등영초와 한번도 만나지를 못했다. 1925년 1월, 주을내는 북방구위원회 위원 고군우에게 부탁하여 멀리 천진에서 천진지방위원회 부녀부장..

주은래(周恩來)의 육무(六無)

주은래(쩌우언라이)는 중국 인민의 가슴 속에 영원한 총리로 남아 있다. 그와 관련한 얘기나 그의 영향은 중국 곳곳에 남아 있지만, 그러나 그는 또한 다른 사람이 가진 여러 가지를 가지지 않고 있다. 첫째, 사불유회(死不留灰) 죽어서 유골을 남기지 않았다. 주은래가 사망한 시점은 역사의 격변기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