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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광제32

고륜화효공주(固倫和孝公主): 건륭제가 65세에 얻은 십공주(十公主) 글: 왕옥호(王鈺浩) 고륜화효공주는 건륭제가 65세에 얻은 막내공주이다. 만일 그녀가 사내아이였다면 아마도 가경제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혼후 집안이 망하면서 고독하게 13년을 살다가 죽는다. 건륭제의 일생을 보면, 수명이 길어서 재위기간도 길고, 후비(后妃)와 자녀도 많았다. 그가 12살때, 강희제는 사람을 시켜 그의 사주팔자를 살펴보는데, 결과는 '홍복제천(洪福齊天, 하늘과 같이 큰 복을 타고났다)'이라는 말을 듣는다. 아마도 그것때문인지, 그는 팔자가 아주 셌고, 그의 후비, 자녀는 대부분 그보다 먼저 죽는다. 십공주가 태어나기 전에 그는 이미 26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런데, 그가 65세가 되던 해 살아있는 자녀는 겨우 11명이었다. 아들중 가장 어린 황자는 열살이었고, 딸들은 일찌감치 시집을.. 2023. 2. 8.
역사연구원의 "폐관쇄국유리론"을 비판한다. 글: 욱풍(郁風) 최근 이라는 제목의 글이 인터넷에 널리 퍼지고 있다. 문장의 결론은 전통적인 "폐관쇄국으로 중국이 근대에 낙후되었다"는 관점은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저 '특정시기 유럽중심주의영향하의 문화적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이 정책은 반침략, 반식민, 반해외적대세력간섭, 반문화침투의 적극적인 작용이 있었다는 것이다. 문장의 원문은 이러하다: "우리는 명청시대의 중앙정부가 취한 것은 '자주한관'의 대외정책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각도에서 보자면, 개방할 것인지 말 것인지, 어떻게 개방할 것인지, 개방범위는 얼마나 넓힐 것인지는 국가주권범위에 속한다. 국내외의 일부학자들이 간단하게 그것을 '낙후'하다고 배척하고, '야만'스럽다고 질책하며 심지어 소위 '국제법'에 위반된다고 주.. 2022. 9. 8.
"명청시기폐관쇄국문제신탐": '자주한관'정책의 한계성 6. '자주한관' 정책의 한계성 비록 명청정부의 '자주한관'정책은 외래침략을 방어하는 일면이 있고, 중외교류를 가로막지는 않았지만, 이 정책이 완전히 정확했다는 말은 아니다. 반대로, 그 한계성은 아주 분명하다. 주로 두 가지 방면에서 나타난다: 한편으로, 소극적인 방어가 주도적인 지위를 점한다. 16-19세기 서방식민침략세력이 물밀듯이 밀려오면서 계속 중국의 대문을 박차고 들어오는데, 명청통치자들은 이 역사적 대변국에 대한 깊이있는 분석이나 과학적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오히려 전통의 조공체계에 만족하면서, '천조상국(天朝上國)'으로 자처했고, 마음 속으로 대외왕래를 제한하거나 감소시키면 천하태평이 올 것이라는 환상에 젖어 있었다. '일구통상'이후 거대한 이익을 얻었던 것과 비교해보면, 해금을 실시한 .. 2022. 9. 8.
사무황제(四無皇帝) 함풍제(咸豊帝) 글: 천마행문(天馬行文) 함풍제의 본명은 애신각라(愛新覺羅) 혁저(奕詝)로 청나라의 제9대 황제이다. 그는 20살에 등극했으며, 11년간 재위하다가 31살에 병사한다. 그는 중국역사상 마지막으로 실제 통치권을 가졌던 황제이고, 청나라에서 마지막으로 비밀입저(秘密立儲)로 황위를 승계한 황제이기도 하다. 많은 사학자들은 함풍제를 "사무"황제라고 부른다. 무원견(無遠見), 무담식(無膽識), 무재능(無才能), 무작위(無作爲) 1. 무원견 함풍제가 등극했을 때, 대청의 국고는 텅 비어 있었고, 군대는 해이해져 있었으며, 정치는 부패하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농민반란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서방열강은 더더욱 호시탐탐하고 있었다. 함풍제가 재위한 11년간, 청왕조는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았다. 1851년부터 .. 2022. 8. 23.
천리교(天理敎)의 난: 자금성까지 쳐들어가다. 글: 호연문사(浩然文史) 청나라의 용상이 가경제(嘉慶帝)에게까지 전해졌을 때, 국세는 이미 강옹건(강희, 옹정, 건륭)시대처럼 대단하지는 않았다. 가경제때의 백련교(白蓮敎)의 난은 5개 성에 화가 미쳤고 8년간이나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런 동란에도 가경제를 비롯한 청나라조정에서는 그다지 큰 일로 인식하지 않았다. 다만 통상적인 농민반란으로 치부하며 처리했다. 그러나 몇년후인 가경18년(1813년) 천리교의 난이 발생하고, 이들은 자금성내까지 쳐들어와서 직도황룡(直搗黃龍)의 기세를 보이게 된다. 비록 천리교의 난도 몇달내에 평정되었지만, 청나라조정은 극도로 놀라서, 가경제는 죄기조(罪己詔, 황제가 스스로의 잘못을 반성하는 조서)를 내리고, 청나라는 사교에 대한 단속을 전면적으로 강화하게 된다. 가경원년,.. 2022. 6. 20.
아편전쟁(阿片戰爭)때의 중국인 글: 노패악곤(老牌惡棍) 1840년 7월 5일, 자금성(紫禁城)은 다른 날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이 날, 상처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도광제(道光帝)는 조제가법(祖制家法)에 따라 기춘원(綺春園)으로 가서 황태후에게 문안을 드렸고, 그후 몇 건의 일상적인 공문을 처리했다. 이 근검절약하기로 유명한 황제는 이때 알지 못하고 있었다. 천리 밖의 절강(浙江) 정해(定海)에서 중국에 “천년동안 없었던 대변국(千年未有之大變局)”의 전쟁이 소리없이 개시되고 있었다는 것을. 이때의 청나라는 역대왕조와 마찬가지로, 그저 “천하”만 알았지, “세계”는 몰랐다. 도광제도 역대제왕들과 마찬가지로 화이(華夷)만 알았지, 중외(中外)는 몰랐던 것이다. 비록 부친과 조부인 가경제(嘉慶帝)와 건륭제(乾隆帝)떄, 전후로 매카트니와 .. 2022. 6.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