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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조약6

"아편전쟁"의 진정한 원인은...? 글: 이대야(李大爺) 나는 "아편전쟁"이라는 말을 아주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 생각에 그것은 중국인이 근대사를 이해하는데 오도하는 경향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중국의 국문을 열어제치고 서풍동점(西風東漸)을 가져온 획기적인 이 사건은 기실 본질적으로 무역분쟁으로 인해 일어난 문명간의 충돌이고, 아편과의 관계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아편"을 가지고 이 전쟁을 정의하는 것은 극히 부정확하다. 청나라는 명나라의 정책을 이어받아 폐관쇄국정책을 유지한다. 1684년에 이르러, 해금(海禁)을 개방하고, 정점통상(定點通商, 정해진 장소에서 통상을 진행하는 것)을 허용한다. 여기에서 봉행된 것은 불평등무역이었다. 중국의 차, 자기, 비단은 너희들이 얼마든지 사가도 좋다. 다만 너는 중국시장에 마음대로 들어와.. 2023. 4. 17.
아편전쟁(阿片戰爭)때의 중국인 글: 노패악곤(老牌惡棍) 1840년 7월 5일, 자금성(紫禁城)은 다른 날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이 날, 상처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도광제(道光帝)는 조제가법(祖制家法)에 따라 기춘원(綺春園)으로 가서 황태후에게 문안을 드렸고, 그후 몇 건의 일상적인 공문을 처리했다. 이 근검절약하기로 유명한 황제는 이때 알지 못하고 있었다. 천리 밖의 절강(浙江) 정해(定海)에서 중국에 “천년동안 없었던 대변국(千年未有之大變局)”의 전쟁이 소리없이 개시되고 있었다는 것을. 이때의 청나라는 역대왕조와 마찬가지로, 그저 “천하”만 알았지, “세계”는 몰랐다. 도광제도 역대제왕들과 마찬가지로 화이(華夷)만 알았지, 중외(中外)는 몰랐던 것이다. 비록 부친과 조부인 가경제(嘉慶帝)와 건륭제(乾隆帝)떄, 전후로 매카트니와 .. 2022. 6. 10.
중국근대사상의 번역문제 글: 풍학영(馮學營) 초기 중국의 외국과의 교류를 보면 번역인재가 큰 문제였다. 예를 들어, 중국과 러시아의 <네르친스크조약>은 3개의 언어본으로 체결되었다: 만주어, 러시아어, 그리고 라틴어. 그리고 "라틴어가 우선한다." 대청국과 제정러시아가 조약을 체결하면서 모두 제3국언.. 2013. 4. 13.
매국(賣國)과 보황(保皇) 글: 항려(伉儷) 양계초(梁啓超, 량치차오)는 미국 보스톤의 모습을 보고는 중국의 "오구통상(五口通商)"은 불행이었다고 탄식했다. 통상때문이 아니라, 통상에 부가된 매국조항때문이었다. 정상적인 국가무역이라면 '오구통상'은 당연한 것이고 매국이라 할 수가 없다. 패전국인 청나라는.. 2012. 3. 3.
오병감(伍秉鑒)과 임칙서(林則徐)의 은원 작자: 미상 세계최고부호 오병감의 마지막 인생 그는 일찌기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 2600만냥 백은의 가산이든, 3품벼슬이든 모두 그로 하여금 대청왕조와 서구열강의 틈에 끼어서 편안히 살 수 없도록 하였고, 더더구나 전쟁과 청나라의 몰락을 막을 수가 없었다. 2001년, 미국의 월스트.. 2008. 5. 22.
역사책에서 볼 수 없는 아편전쟁 이야기 (II) 4. 임칙서와 Elliot 한가지 재미있는 일은 제1차아편전쟁을 지휘했던 영국정부의 전권대표인 Charles Elliot는 본인이 바로 절대적인 아편무역반대자였다는 점이다. 그는 원래 영국령 기아나의 의료선 <<노예수호신>>호의 함장이었다. 전임 영국-중국연락관인 로빈슨도 아편무역의 반대자였다. 그.. 2007. 3.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