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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제96

중국 고대의 "은자(銀子)"는 어떻게 사용되었을까? 글: 장금(張嶔) 많은 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고전명저'의 매매장면에는 '쇄은자(碎銀子)'를 사용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예를 들어, 에서 주인공이 몸에 지니고 다니는 돈은 왕왕 "몇 량(兩)의 산쇄은자(散碎銀子)이다. 나중에 '화괴(花魁)를 독점하는 매유랑(賣油郞)은 처음에 1년간 고생하며 청루(靑樓)의 '입문비(入門費)로 16량의 산쇄은자를 모았다. 의 왕의안(王義安)은 두 명의 수재에게 붙잡혀 두들겨 맞다가, '세냥칠전의 쇄은자를 주고' 비로소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를 보면, 이 '쇄은자'는 일상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에서 불경을 가지러 가는 당승 사도도 '쇄은자를 사용하는데' 있어서는 속됨을 면하지 못했다. 3명의 사제중 그래도 마음씀씀이가 가장 세심한 저팔계(猪八.. 2021. 3. 24.
점간처(粘杆處): 옹정제가 만들고, 가경제가 없앤 신비의 특무조직 글: 양우모초(样雨慕初) 이전에 의 자매편 시리즈를 볼 때, 옹정이 가장 의지하던 기구의 명칭이 '점간처'라고 있던 것을 기억한다. 왜냐하면, 이름을 너무 성의없이 지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그건 작가가 무신경해서라고 생각했다. 인식 속에서 고대의 각 부문의 명칭은 장엄하였다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역사에 관심을 가지다보니 원래 '점간처'가 역사상 진짜 존재했던 것이고, 옹정제때 영향력이 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점간처"라는 명칭은 겉으로 보기에 별 것이 없어 보이지만, 아주 실질적인 지하특무기관이었다. 명나라때의 동창, 서창과 금의위에 해당한다. 주요작용은 정보를 수집하고, 백관을 감찰하는 것이다. 이는 황제에게 적지 않은 편의와 정보를 제공하게 되고, 황제가 전면적으로 조정을 장악.. 2021. 2. 9.
건륭제는 왜 재덕을 겸비한 황십일자(皇十一子) 영성(永瑆)에게 황위를 물려주지 않았을까?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강희제 말년의 구자탈적(九子奪嫡)과 비교하면, 건륭제 말년의 후계자선택은 범위가 넓지 않았다. 그가 너무 오래 살아서, 대다수의 황자는 이미 사망했다. 17명의 황자들 중에서 겨우 4명만 남았다. 바로 황팔자(皇八子) 영선(永璇), 황십일자 영성, 황십오자 영염(永琰) 그리고 황십칠자 영린(永璘)이다. 이 네 명의 황자들 중에서, 황팔자 영선은 다리에 장애가 있었고, 황십칠자 영린은 나이가 너무 어렸다. 그래서 두 사람은 후계자에서 제외된다. 결국 남는 것은 영성과 영염의 두 황자이다. 재능으로 따지면 영성은 서화(書畵)에 모두 뛰어났다. 옹방강(翁方綱), 유용(劉鏞), 철보(鐵保)와 함께 건륭조 4대서예가로 꼽힐 정도이다. 명실상부한 대재자(大才子)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재.. 2021. 2. 7.
유통훈(劉統勛): 청나라의 보기 드문 청백리 글: 청림지청(靑林知靑) 그의 아들 유라과(劉羅鍋, 劉鏞)과 비교하면 유통훈의 명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 그러나, 건륭제 시절을 묘사하려면, 소설이건 드라마이건 그를 빠트릴 수는 없다. 필자가 보기에 그의 일생의 공적은 아들 유라과보다 훨씬 크다. 청왕조때 12명의 황제가 있었는데, 모두 8명의 문신들만이 최고영예의 시호인 "문정(文正)"을 받았다. 거기에 유통훈이 들어 있다. 당연히 이 8명 중에서는 대부분 자격미달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탕빈(湯斌)과 두수전(杜受田)같은 사람을 몇 사람이나 알고 있는가? 가장 명실상부한 사람은 유통훈 외에 오직 증국번(曾國藩)이 있을 뿐이다. 심지어 종묘에 배향된 장정옥(張廷玉)이나 '표호장(裱糊匠)' 이홍장(李鴻章)조차도 '문정'의 영예는 받지 못했다. 유통훈.. 2021. 1. 18.
가경(嘉慶)연간, 좋은 인재가 많았는데 왜 점점 쇠퇴했을까?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청나라는 아마 건륭제만이 자칭 천조상방(天朝上邦)이라 자처할 자격이 있을 것이다. 모두 어느 정도 알고 있겠지만, 강건성세(康乾盛世)이후 청나라는 아주 명확하게 쇠퇴현상을 보인다. 역사의 철칙을 보면, 한편으로 그럴 시간이 된 것이기도 하다. 모든 왕조는 거의 수백년의 기간동안 존속한다. 가경제때가 아마 흥성하다가 쇠퇴하는 기로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건륭연간에 건륭제는 여러번 강남을 순유하고, 여기에 관료들의 부정부패현상이 엄중해졌다. 옹정제때처럼 전심전력을 다하여 정무를 보지도 않았고, 쇄국정책을 쓴다. 번성하던 대청왕조는 이때부터 이미 쇠퇴의 화근이 심어진 것이다. 한(漢)나라의 경우를 보면, 한편으로 진나라에서 모든 힘을 쏟아서 건설한 각종 도로와 성곽으로 이미 아주 견.. 2020. 11. 8.
건륭의 천수연(千叟宴)이 실패작으로 끝난 이유는...? 글: 연의적서자호(漣漪的西子湖) 중국고대의 수천년 역사상 수백명의 황제가 나타났다. 그중 재위기간이 가장 길었던 황제는 강희제(康熙帝)이다. 그의 재위기간은 61년에 달한다. 강희제 본인도 자부심이 컸다. 그는 일찌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진한이래 황제를 칭한 자는 일백 구십하고도 셋이다. 재위기간이 짐만큼 오래인 경우는 없었다." 강희제는 이를 축하할 일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60세생일이 되는 해에, 천수연을 연다. 천하의 모든 65세이상의 노인을 모셔서 연회를 펼친 것이다. 역사상 강희제는 무슨 '호대희공(好大喜功)'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8살에 등극했고, 아오바이(鰲拜)를 체포하고, 삼번(三藩)을 평정하였으며, 정성공을 격패시키고, 갈단을 토벌했다. 그는 여러 곤란을 겪으며 극복해.. 2020. 8. 24.
가정제(嘉政帝)는 왜 엄숭(嚴嵩)을 중용했을까?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명세종(明世宗) 가정제는 논쟁이 많은 황제이다. 어떤 사람은 그가 영명하여 명태조 주원장에 비견할 만하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가 혼용무능(昏庸無能)하여 연단(煉丹)에만 빠져있었다고 본다. 다만, 부인할 수 없는 점이 있다. 명세종은 즉위초기의 몇년간 확실히 잘 통치했었다는 것을 설사 후기에는 일년내내 수도에 빠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조정을 완전히 내팽개쳐둔 것은 아니었다. 명세종은 지극히 총명하고 자신감이 넘치던 황제이다. 그리고 약간은 과대망상이 있었다. 자신과 얘기할 자격이 있는 것은 엄숭과 같은 관료사회의 노련한 인물들만이라고 여긴다. 결국 명세종은 무능한 혼군이 아니었다. 엄숭(嚴嵩)을 살펴보자. 엄숭은 명나라때 강서(江西) 분의(分宜) 사람이다. 자는 유중(惟中).. 2020. 6. 30.
건륭제는 왜 자질이 평범한 가경제를 후계자로 선택했을까? 글: 역사변연(歷史邊緣) 가경제(嘉慶帝)는 청나라의 제7대황제이다. 가경제는 청나라역사상 비교적 평범한 황제이다. 재위기간동안 특별한 업적도 없고, 그 이후부터 청나라는 쇠락기에 접어든다. 가겅제는 이처럼 평범했는데, 왜 건륭제(乾隆帝)는 그를 후계자로 삼아서 황위를 잇게 하.. 2020. 3. 3.
왜 청나라의 황후들은 곤녕궁(坤寧宮)에 거처하지 않았을까? 글: 역사순간(歷史瞬間) 항간에는 이런 전설이 있다. 청나라때 황후가 곤녕궁에 거처하지 않은 것은 망자(亡者)의 회기(晦氣), 즉 죽은 사람의 나쁜 기운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명나라 숭정제(崇禎帝)의 주황후(周皇后)는 이곳에서 목을 매어 자결했다. 기실 청나라가.. 2020. 2. 26.
광서제의 비극: 동년, 사업 그리고 애정 글: 풍현일(馮玄一) 광서제는 청나라의 제11대황제이다. 그의 이름은 애신각라 재첨(載㵇)인데, '첨'자는 물리 조용히 흐르는 모습을 가리킨다. 그의 성격과는 아주 잘 들어맞는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화상(畵像)을 보면, 그는 문약하고 청수(淸秀)한 청년이다. 그러나, 그의 준수한 얼굴 .. 2020. 1.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