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경제 42

중국역사상의 태상황(太上皇) (3)

글: 장명양(張明揚) 당나라때 태상황으로서는 되돌아보기도 싫은 '완전은퇴'시대를 겪은 후, 태상황들의 운명은 송나라때부터 극적인 반전이 일어나게 된다. 송, 명, 청 3왕조에 걸쳐 모두 6명의 태상황이 배출돈다. 당나라때 유행한 '핍궁(逼宮)'과 비교하면, 이들 태상황들은 자원하여 태상황으로 물러난 경우가 많았으며, 현무문사변이나 마외지변같은 궁중투쟁장면은 연출되지 않았다. 나라가 망하게 된 송휘종(宋徽宗)과 정신이상이 온 송광종(宋光宗)을 제외하면, 이 시기의 태상황들의 은퇴생활은 아주 여유있었다. 황제의 눈치를 보지 않았을 뿐아니라, 연금생활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권력도 대부분 황제보다 컸다. 정치생활에서 왕왕 전형적인 "퇴이불휴(退而不休)"였다. 명영종(明英宗) 주기진(朱祁鎭)의 태상황생활은 그다..

"아편전쟁"의 진정한 원인은...?

글: 이대야(李大爺) 나는 "아편전쟁"이라는 말을 아주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 생각에 그것은 중국인이 근대사를 이해하는데 오도하는 경향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중국의 국문을 열어제치고 서풍동점(西風東漸)을 가져온 획기적인 이 사건은 기실 본질적으로 무역분쟁으로 인해 일어난 문명간의 충돌이고, 아편과의 관계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아편"을 가지고 이 전쟁을 정의하는 것은 극히 부정확하다. 청나라는 명나라의 정책을 이어받아 폐관쇄국정책을 유지한다. 1684년에 이르러, 해금(海禁)을 개방하고, 정점통상(定點通商, 정해진 장소에서 통상을 진행하는 것)을 허용한다. 여기에서 봉행된 것은 불평등무역이었다. 중국의 차, 자기, 비단은 너희들이 얼마든지 사가도 좋다. 다만 너는 중국시장에 마음대로 들어와..

고륜화효공주(固倫和孝公主): 건륭제가 65세에 얻은 십공주(十公主)

글: 왕옥호(王鈺浩) 고륜화효공주는 건륭제가 65세에 얻은 막내공주이다. 만일 그녀가 사내아이였다면 아마도 가경제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혼후 집안이 망하면서 고독하게 13년을 살다가 죽는다. 건륭제의 일생을 보면, 수명이 길어서 재위기간도 길고, 후비(后妃)와 자녀도 많았다. 그가 12살때, 강희제는 사람을 시켜 그의 사주팔자를 살펴보는데, 결과는 '홍복제천(洪福齊天, 하늘과 같이 큰 복을 타고났다)'이라는 말을 듣는다. 아마도 그것때문인지, 그는 팔자가 아주 셌고, 그의 후비, 자녀는 대부분 그보다 먼저 죽는다. 십공주가 태어나기 전에 그는 이미 26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런데, 그가 65세가 되던 해 살아있는 자녀는 겨우 11명이었다. 아들중 가장 어린 황자는 열살이었고, 딸들은 일찌감치 시집을..

"명청시기폐관쇄국문제신탐": '자주한관'정책의 한계성

6. '자주한관' 정책의 한계성 비록 명청정부의 '자주한관'정책은 외래침략을 방어하는 일면이 있고, 중외교류를 가로막지는 않았지만, 이 정책이 완전히 정확했다는 말은 아니다. 반대로, 그 한계성은 아주 분명하다. 주로 두 가지 방면에서 나타난다: 한편으로, 소극적인 방어가 주도적인 지위를 점한다. 16-19세기 서방식민침략세력이 물밀듯이 밀려오면서 계속 중국의 대문을 박차고 들어오는데, 명청통치자들은 이 역사적 대변국에 대한 깊이있는 분석이나 과학적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오히려 전통의 조공체계에 만족하면서, '천조상국(天朝上國)'으로 자처했고, 마음 속으로 대외왕래를 제한하거나 감소시키면 천하태평이 올 것이라는 환상에 젖어 있었다. '일구통상'이후 거대한 이익을 얻었던 것과 비교해보면, 해금을 실시한 ..

천리교(天理敎)의 난: 자금성까지 쳐들어가다.

글: 호연문사(浩然文史) 청나라의 용상이 가경제(嘉慶帝)에게까지 전해졌을 때, 국세는 이미 강옹건(강희, 옹정, 건륭)시대처럼 대단하지는 않았다. 가경제때의 백련교(白蓮敎)의 난은 5개 성에 화가 미쳤고 8년간이나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런 동란에도 가경제를 비롯한 청나라조정에서는 그다지 큰 일로 인식하지 않았다. 다만 통상적인 농민반란으로 치부하며 처리했다. 그러나 몇년후인 가경18년(1813년) 천리교의 난이 발생하고, 이들은 자금성내까지 쳐들어와서 직도황룡(直搗黃龍)의 기세를 보이게 된다. 비록 천리교의 난도 몇달내에 평정되었지만, 청나라조정은 극도로 놀라서, 가경제는 죄기조(罪己詔, 황제가 스스로의 잘못을 반성하는 조서)를 내리고, 청나라는 사교에 대한 단속을 전면적으로 강화하게 된다. 가경원년,..

아편전쟁(阿片戰爭)때의 중국인

글: 노패악곤(老牌惡棍) 1840년 7월 5일, 자금성(紫禁城)은 다른 날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이 날, 상처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도광제(道光帝)는 조제가법(祖制家法)에 따라 기춘원(綺春園)으로 가서 황태후에게 문안을 드렸고, 그후 몇 건의 일상적인 공문을 처리했다. 이 근검절약하기로 유명한 황제는 이때 알지 못하고 있었다. 천리 밖의 절강(浙江) 정해(定海)에서 중국에 “천년동안 없었던 대변국(千年未有之大變局)”의 전쟁이 소리없이 개시되고 있었다는 것을. 이때의 청나라는 역대왕조와 마찬가지로, 그저 “천하”만 알았지, “세계”는 몰랐다. 도광제도 역대제왕들과 마찬가지로 화이(華夷)만 알았지, 중외(中外)는 몰랐던 것이다. 비록 부친과 조부인 가경제(嘉慶帝)와 건륭제(乾隆帝)떄, 전후로 매카트니와 ..

계유지변(癸酉之變): 가경제 암살미수사건

글: 시습사사(時拾史事) 10여년전에 라는 TV드라마가 있었다. 후징(胡靜), 황웨이더(黃維德), 훠쓰얜(霍思燕)이 주연을 했는데, 드라마 첫편에서 가경18년에 발생한 계유지변을 얘기한다. 화면에는 천리교(天理敎) 신자의 수가 아주 많아서, 시커멓다. 최소 천명은 넘을 것같다. 모두가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비첨주벽(飛檐走壁)하며 가볍게 오문(午門)을 뚫고 들어가 대내고수(大內高手)들과 격렬한 전투를 벌인다. 자막으로 가경황제는 소식을 듣고 밤을 새워 승덕의 피서산장으로 도망갔다고 적어놓았다. 이아거(二阿哥, 둘째황자) 민녕(旻寧)은 하마터면 위험할 뻔했으나, 측푸진(側福晋, 푸진은 부인이라는 뜻임)이 남장을 하고 추격병을 따돌려서 겨우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사태가 평정된 후, 가경제는 심신이 피폐..

점간처(粘杆處): 옹정제가 만들고, 가경제가 없앤 신비의 특무조직

글: 양우모초(样雨慕初) 이전에 의 자매편 시리즈를 볼 때, 옹정이 가장 의지하던 기구의 명칭이 '점간처'라고 있던 것을 기억한다. 왜냐하면, 이름을 너무 성의없이 지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그건 작가가 무신경해서라고 생각했다. 인식 속에서 고대의 각 부문의 명칭은 장엄하였다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역사에 관심을 가지다보니 원래 '점간처'가 역사상 진짜 존재했던 것이고, 옹정제때 영향력이 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점간처"라는 명칭은 겉으로 보기에 별 것이 없어 보이지만, 아주 실질적인 지하특무기관이었다. 명나라때의 동창, 서창과 금의위에 해당한다. 주요작용은 정보를 수집하고, 백관을 감찰하는 것이다. 이는 황제에게 적지 않은 편의와 정보를 제공하게 되고, 황제가 전면적으로 조정을 장악..

가경(嘉慶)연간, 좋은 인재가 많았는데 왜 점점 쇠퇴했을까?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청나라는 아마 건륭제만이 자칭 천조상방(天朝上邦)이라 자처할 자격이 있을 것이다. 모두 어느 정도 알고 있겠지만, 강건성세(康乾盛世)이후 청나라는 아주 명확하게 쇠퇴현상을 보인다. 역사의 철칙을 보면, 한편으로 그럴 시간이 된 것이기도 하다. 모든 왕조는 거의 수백년의 기간동안 존속한다. 가경제때가 아마 흥성하다가 쇠퇴하는 기로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건륭연간에 건륭제는 여러번 강남을 순유하고, 여기에 관료들의 부정부패현상이 엄중해졌다. 옹정제때처럼 전심전력을 다하여 정무를 보지도 않았고, 쇄국정책을 쓴다. 번성하던 대청왕조는 이때부터 이미 쇠퇴의 화근이 심어진 것이다. 한(漢)나라의 경우를 보면, 한편으로 진나라에서 모든 힘을 쏟아서 건설한 각종 도로와 성곽으로 이미 아주 견..

가정제(嘉政帝)는 왜 엄숭(嚴嵩)을 중용했을까?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명세종(明世宗) 가정제는 논쟁이 많은 황제이다. 어떤 사람은 그가 영명하여 명태조 주원장에 비견할 만하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가 혼용무능(昏庸無能)하여 연단(煉丹)에만 빠져있었다고 본다. 다만, 부인할 수 없는 점이 있다. 명세종은 즉위초기의 몇년간 확실히 잘 통치했었다는 것을 설사 후기에는 일년내내 수도에 빠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조정을 완전히 내팽개쳐둔 것은 아니었다. 명세종은 지극히 총명하고 자신감이 넘치던 황제이다. 그리고 약간은 과대망상이 있었다. 자신과 얘기할 자격이 있는 것은 엄숭과 같은 관료사회의 노련한 인물들만이라고 여긴다. 결국 명세종은 무능한 혼군이 아니었다. 엄숭(嚴嵩)을 살펴보자. 엄숭은 명나라때 강서(江西) 분의(分宜) 사람이다. 자는 유중(惟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