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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기록63

<이십사사(二十四史)>중 왜 뒤의 20사는 유명하지 않을까? 글: 하목역사군(夏目历史君) ​ 정사(正史)를 얘기하자면 우리는 아마도 모두 공인된 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에 무엇이 들어가는지를 묻는다면 완벽하게 답안을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리고 언급하는 것은 개략 혹은 일 것이다. ​ 이 4사는 중에서 "전사사(前四史)"라고 불린다. 모두 개인적으로 편찬한 사서이다. 이런 상황은 기이하다고 여겨질 수밖에 없다. 모든 시기의 역사는 다 중요한데, 왜 이후의 사서들은 이들 전사서에 비하여 명성이 높지 못한 것일까? ​ 와 의 큰 차이점 ​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얘기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가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 처음에 는 ""로 불렸다. 여기에 포함되는 것은 , , 이다. 당나라에 이르러, 는 점차 유실되고, 는 로 .. 2024. 4. 18.
<죽서기년(竹書紀年)> vs <사기(史記)> : 어느 기록이 더 믿을만할까? 글: 독서문사(讀書文史) 중국역사상 이런 기서(奇書)가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역사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버렸고, 그리하여 봉건정통완조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의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그 존재조차 모르고 있다. 그것은 도대체 어떤 책인가? 이 책을 얘기하자면, 먼저 전설적인 사건부터 시작해야 한다. 1. 의 출토: 도굴꾼과 관련이 있다. 태강2년(281년) 하내군(河內郡) 급현(汲縣, 지금의 하남성 위휘시)에서 중국역사상 중요한 영향이 있는 사건이 발생한다. 부준(不準)이라는 도굴꾼이 교외지역의 한 고묘를 도굴했다. 아마도 그는 묘를 파헤친 후 새카만 묘실에서 가지고 온 횃불이 금방 다 타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묘실에는 대량의 죽간(竹簡)이 쌓여 .. 2022. 5. 1.
중국역사상의 사대천부(四大天府) 작자: 미상 중국역사상 모두 4개의 천부(天府)가 나타났다: 응천부(應天府), 순천부(順天府), 승천부(承天府), 봉천부(奉天府). "천"은 "천자"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천부"는 제왕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곳이거나, 혹은 칭제이전에 출생하거나, 칭제이전의 봉지이거나 칭제이전에 발상지이다. 간단히 말해서, 어느 군왕의 용흥지지(龍興之地)라는 뜻이다. 이 사대천부는 왕조에 따라 각각 설립했다. 어떤 경우에는 대응하는 곳이 한 곳이 아니다. 응천부(상구/남경), 순천부(북경), 승천부(종상/대만/월남), 봉천부(무강/심양)이다. 왜 이렇게 같은 이름의 천부가 여러 곳에 나타났을까? 이는 그 도시와 관련있는 군왕의 성장과 관련이 있다. 1. 응천부 송나라와 명나라때 응천부를 두었다. 송나라의 응천부는 하남.. 2022. 1. 17.
중국 고대의 "은자(銀子)"는 어떻게 사용되었을까? 글: 장금(張嶔) 많은 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고전명저'의 매매장면에는 '쇄은자(碎銀子)'를 사용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예를 들어, 에서 주인공이 몸에 지니고 다니는 돈은 왕왕 "몇 량(兩)의 산쇄은자(散碎銀子)이다. 나중에 '화괴(花魁)를 독점하는 매유랑(賣油郞)은 처음에 1년간 고생하며 청루(靑樓)의 '입문비(入門費)로 16량의 산쇄은자를 모았다. 의 왕의안(王義安)은 두 명의 수재에게 붙잡혀 두들겨 맞다가, '세냥칠전의 쇄은자를 주고' 비로소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를 보면, 이 '쇄은자'는 일상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에서 불경을 가지러 가는 당승 사도도 '쇄은자를 사용하는데' 있어서는 속됨을 면하지 못했다. 3명의 사제중 그래도 마음씀씀이가 가장 세심한 저팔계(猪八.. 2021. 3. 24.
중국고대전쟁에서 전사병사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였을까? 글: 뇌저(雷姐) 인류사회에 전쟁이 나타나면서, 잔혹한 전쟁터에서는 대량의 병사와 지휘관이 죽고 부상당했다. 부상당한 병사는 치료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전사하면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옛날의 의료조건은 지금처럼 좋지 못했다. 그래서 부상한 병사도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여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냉병기 시대에 병사들의 상처를 적시에 치료하지 못하면, 감염되어 죽는 경우가 많았다. 고대에 전투가 벌어지면 많은 사람이 죽었다. 적게는 수천에서 많게는 수만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병사들이 사망하면, 고대군대는 전사한 병사들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였을까? 황야에 내버려두어, 짐승의 밥이 되게 한다. 고대 전쟁터에서 양군이 교전하면 패배한 측은 전부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히거나 도망치게 된다. 그렇게 되.. 2021. 2. 17.
"오성칠망(五姓七望)": 중국역사상의 명문집안 글: 천애간점역사(天涯看點歷史) 성씨(姓氏)는 우리들 모두의 일생을 따라다니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성씨도 적지 않게 탄생하고, 적지 않은 복성(複姓)은 단성(單姓)으로 바뀌었다. 지금 통계를 내보면, 단자성과 쌍자성을 합치면 수량이 1만개에 이른다. 현재의 성씨는 이미 고대의 계급제도는 없다. 왜냐하면 고대에는 '오성칠망'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들 성씨를 가진 사람은 고대의 명문망족이었다. 이는 상류사회의 명함을 하나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나 같다. 고대의 황실조차도 '오성칠망'에 속하는 사람과 결혼할 자격이 없었다. 그렇게 보면 정말 이들 일족으로 태어나는 것은 하나의 특권이라 할 수 있다. 그중 "오성(五姓)"은 이(李), 최(崔), 노(盧), 정(鄭), 왕(王)을 .. 2020. 11. 30.
<죽서기년(竹書紀年)>: 중국고대의 비주류 사서 글: 지역사(知歷史) <죽서기년>은 위양왕(魏襄王) 시대에 저술되었다. 이 시대에 여러 나라가 나타나고, 유가(儒家)는 아직 독보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죽서기년>은 서진(西晋) 연간이고, 이 때는 <사기>가 이미 중국역사기록의 '대표브랜드'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죽서기.. 2019. 4. 22.
5천년 중국역사에 왜 "중국"이라는 명칭을 가진 왕조는 나타나지 않았을까? 글: 한정우기(閑情偶記) 중국은 세계4대문명고국중 하나이다. 5000년의 문명사를 지니고 있다고 자랑한다. 다만, 역사상 중국에서는 어느 왕조도 '중국'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았다. '중국'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서주(西周)초기 청공기 "하존(何尊)"의 명문(銘文)이다: "여기택.. 2018. 10. 26.
누가 진정한 흉노(匈奴)의 후예인가? 글: 하필(何必), 양풍(凉風) 최근 고고학계에 큰 뉴스가 하나 나왔다. 몽골국 고비성 더리거르 항아이쑤무 경내에서, 중국몽골 연합고고팀은 한문(漢文) 마애석각(摩崖石刻)을 현지조사했으며, 그것이 동한 영원원년(89년) 반고(班固)가 쓴 <봉연연산명(封燕然山銘)>이라는 것을 확인한.. 2017. 8. 19.
중국고대인들은 어떻게 욕을 했는가? 글: 퉁가액이근(佟佳額爾瑾) 지금은 두 사람이 일단 의견이 맞지 않으면, 쉽게 인터넷에서 욕을 해댄다. 욕설은 무척이나 거칠다. 기실 이건 고대인들에게 배우는게 좋다. 욕을 하면서도 거친 말을 하지 않고, 듣는 사람이 할 말없게 만들며, 그 안에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중국고대에.. 2016. 8.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