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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고창국왕 국문태(麴文泰): 현장(玄奘)의 서역취경을 도운 인물...

by 중은우시 2025. 5. 21.

글: 맹헌실(孟憲實)

국문태(麴文泰)는 역사상 소인물(小人物)이다. 그는 당태종(唐太宗)에 의해 멸망한 고창국(高昌國)의 국왕이고, 이 조그마한 나라의 영토는 광활한 판도를 지닌 당나라와 비교하여 360분의 1에 불과하였다. 당나라는 고창국을 멸망시키고 인구 37,738명을 얻는다. 이것이 국문태의 모든 국민이다. 당나라때 이는 중간급의 주(州) 수준이다. 당나라 현장(玄奘)의 사적은 여러 사서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국문태는 오직 대당이 서역을 경영하는 위대한 전쟁때 비로소 언급된다. 그리고 이미지도 그다지 위대한 것으로 그려지지는 않았다. 통상적으로 사람들은 위대한 인물간의 관계를 주목하고, 소인물과의 관계는 주목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현장과 당태종의 관게는 <중국대백과전서> 당나라 현장 항목(楊廷福 작성)에서 당현종과 그의 업적을 소개하는 외에 당태종과의 관계를 별도로 언급했다. 그러나 국문태는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당태종과 현장의 관계를 얘기하는 글이 너무 많지만, 당고종과 현장의 관계도 의미가 있다고 여겨 별도로 글을 써서 논증하기도 했다.

국문태와 현장의 관계가 완전히 무시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중국대백과전서:종교권>의 당현장 항목(高揚 작성)에서는 당현장이 "고창왕 국문태의 예우(禮遇)를 받았다"라는 말로 그들의 관계를 개괄했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예우"라는 말 하나로 개괄할 수 있을까? 현장의 이야기를 쓴 글은 매우 많다. 개략 현장의 개인의지를 강조하기 위하여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국문태가 현장을 도와준 점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거나 축소하여 얘기한다. 가장 많은 경우는 <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慈恩寺三藏法師傳)>의 기록을 사실대로 기술한 것이다. 당연히, 확실히 학자들은 국문태가 현장에 큰 의미를 지닌 것을 보았다. 탕용동(湯用彤) 선생은 특별히 <현장법사>를 강의하면서 고창왕 국문태의 현장에 대한 도움을 지적한 바 있다: "이는 법사가 인도에 도달할 수 있었던 가장 핵심적인 것이었다" 풍기용(馮其庸) 선생은 고창을 언급할 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현장은 "고창왕 국문태의 도움하에 계속 서행할 수 있었고, 그 성과를 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당현장의 서천취경에서 두번째 출발점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일본의 마에지마 신시(前嶋信次), 가토 규조(加藤九祚)가 편찬한 <실크로드사전(絲綢之路事典)>의 현장 항목(마에지마 신지 작성)에서 국문태의 현장에 대한 여러가지 도움을 언급할 때 이렇게 말했다: "현장이 인도에서 여러 해동안 공부하고 그렇게 많은 경서를 가지고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국문태의 지지때문이다." 여러 학자들은 모두 국문태와 현장의 관계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다만 더욱 자세한 토론은 여전히 여지가 있다.

현장이 서역으로 가겠다는 의지가 굳건한 것은 자주 언급되고 있어서, 여기에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마땅히 설명해야 할 것은 현장의 개인계획에서 원래 고창을 지나가는 것은 없었다는 것이다. <대자은사삼장법사전>(이하 <자은전>) 제1권에는 현장이 구사일생으로 이오(伊吾, 지금의 신강 합밀시(哈密市))에 도착한다. 고창왕 국문태는 그 소식을 들은 후, "즉시 사람을 보내, 이오왕에게 법사를 보내달라고 하고, 말 수십필을 보내어 도중에 맞이할 준비를 한다. 십여일만에 왕이 보낸 사람이 도착하고, 왕의 뜻을 전한다. 성의를 가지고 청하자, 법사는 원래 가한부도(可汗浮圖)를 지나가려고 했으나, 고창왕이 청하자 사양하기 힘들어 고창으로 간다...." 현장의 서행계획을 우리가 모두 알 수는 없다. 다만 고창에는 가지 않는 것이었는데, 고창왕 국문태의 초청을 받았을 때 원래계획을 견지하고자 했으나, 결국은 요청을 사양하기 힘들어 고창으로 가게 된 것이다.

만일 현장의 원래계획대로 가한부도성(지금의 신강 지무사르)으로 가고 고창으로 가지 않았다면, 현장의 서진노선은 그가 나중에 실제로 갔던 노선과 크게 달랐을 것이다. 양정복 선생의 이에 대한 판단은 이러하다; "현장은 이오에서 십여일간 머물렀고, 원래는 천산을 넘어 서쪽으로 가서 가한부도성을 지나 바로 돌궐왕정으로 향할 계획이었다. 통엽호가한(統葉護可汗)의 보호를 받아 인도북쪽국경까지 갈 생각이었다." 가한부도성으로 가는 계획은 <자은전>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다만 통엽호가한의 보호를 받는 계획은 무슨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고창을 가지 않고 가한부도성으로 갔다면, 다시 가한부도성에서 고창으로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장의 원래 계획은 개략 이오에서 가한부도성으로 가고, 다시 윤대(輪臺, 지금의 신강 우루무치시 부근)로 가고, 다시 궁월(弓月, 현재의 신강 이닝)으로 가고, 다시 쇄엽(碎葉, 서돌궐왕정)으로 가는 것일 것이다. 만일 이렇게 갔다면 현장은 천산남부의 전통적인 북도를 지나지 않았을 것이고, 언기(焉耆), 구자(龜玆), 고묵(姑墨)등은 <대당서역기>의 현재위치에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

국문태가 성의있게 요청하는 바람에 현장의 서행노선은 변경될 수밖에 없었다. 이 노선을 단서로 <대당서역기>는 비로소 지금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지나간 노선은 국문태의 영향을 받았고, 귀국노선도 마찬가지로 국문태의 영향을 받았다. 국문태는 원래 현장을 고창에 장기간 남겨 국사로 삼고자 했고, 온갖 방법을 썼지만, 현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차선책으로 결의형제를 맺는다. 돌아온 후에 고창에서 3년간 머무르기로 약속한다. 십여년후 현장은 오인도(五印度)에서 명성을 크게 떨치고 있었다. 법사가 돌아갈 뜻을 표시하자 많은 스님들이 그 말을 듣고 와서 말렸다. 그러나 현장은 귀국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계일왕(戒日王)은 현장을 붙잡으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현장에게 귀국노선을 물어본다: "법사께서 어느 길로 돌아가려고 하시는지요? 남해의 길을 택하시겠다면 사람을 보내서 배웅하겠습니다." 현장의 대답은 이러했다: "현장은 지나(支那)에서 왔습니다. 나라의 서쪽 국경지역에 고창이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 국왕은 총명하며 법을 알아서, 현장이 이곳으로 온다는 말을 듣고 깊이 기뻐하면서 자금을 풍성하게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돌아갈 때 들러주기를 청했으니, 그것을 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북로로 돌아가야 합니다." 계일왕은 그러자 글을 써서 "관리들에게 서신을 가지고 법사를 거치는 여러 나라를 지나가게 해주었으며 수레를 보내어 한(漢)의 국경까지 이르게 했다."

현장이 국문태의 영향을 받아 육로로 돌아갔기 때문에, <대당서역기>의 면모는 우리가 오늘날 볼 수 있는 것처럼 되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최소한 활국(活國) 이하로 오늘날의 중국 신강경내에 있는 타시쿠르칸, 카슈카르, 홋텐 그리고 니야고성(尼雅古城)등은 모두 <대당서역기>에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현장이 여행가로 명성을 떨친 것은 주로 <대당서역기>때문이다. <대당서역기>는 현장의 여행노선을 단서로 하여, 산천지리, 역사사회, 풍토인정을 모두 기록했고, 당시 중앙아시아, 인도 및 그 교통상황을 기록하여, 오늘날까지 진귀하면서도 유일한 자료가 되었다. 국문태는 현장의 왕복노선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므로 간접적으로 <대당서역기>의 내용에 영향을 끼친 것이다. 국문태와 현장의 관계는 이로 인하여 반드시 언급해야할 일이다.

현장의 서행에 거친 국가는 아주 많다. 그러므로 개인신분은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아니다. 풍기용 선생은 고창을 현장의 제2차 출발지로 말한 것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고창에서 인력, 물력, 장비의 지원을 받았다. 둘째, 고창에서 새로운 신분을 얻는다. 이전에 현장은 단지 보통승려에 불과했다. 지금은 다시 고창왕의 동생이라는 명의를 얻었다. 이 새로운 관계는 고창에서 출발하기 전에 두 사람 사이에 약속된 것이다. "함께 도량에 들어가 예불을 드리고, 모친 장태비에게 법사와 형제로 약속하고나서, 법사가 구법하도록 보냈다." 두번째 출발점은 새로운 기점이다. 이때부터 현장은 성공의 조건을 더욱 갖추게 된다.

현장의 서행은 몇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장안에서 고창까지, 고창에서 쇄엽까지, 쇄엽에서 가필시(迦畢試), 인도제국(印度諸國)까지. 고창 이전에 현장은 혼자서 서쪽으로 가면서 온갖 고생을 다 했다. 한때는 고비사막에서 목숨을 잃을 뻔했다. 이 구간이 현장에게는 가장 위험한 길이었다. 인도에 있을 때, 강도의 위협을 받은 적이 있다. 다만 매번 쉽게 위기를 넘겼다. 그리고 왕왕 사람들을 불교에 귀의하도록 설교했다. 그리하여 그다지 위험했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현장의 서행이 순조롭게 된 것은 고창에서부터이다. 즉, 고창에서부터 현장은 정권의 뒷받침을 받았다. 국문태는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환신(歡信)을 엽호가한에게 보냈고, 24개국에 서신을 써서 굴지(屈支)등 24개국을 통과할 때 서신마다 대릉(大綾) 1필을 붙여서 신물로 삼았다. 그리고 능초(綾綃) 오백필, 과미(果味) 두 수레를 엽호가한에게 선물로 바친다. 그리고 서신을 적어 "법사는 저의 동생입니다. 불법을 파라문국에 불법을 구하러 가니, 칸께서 법사를 저처럼 가련하게 여기셔서 서쪽 여러 나라에서 오락마로 나라를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현장은 고창의 사신이 아니다. 그러나 고창국의 사신이 호송을 했다. 현장이 고창의 보호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더 이상 명확할 수 없다.

고창은 비록 소국이지만, 비단길의 요충지에 있기 때문에, 서역제국과 교류가 빈번했다. 그리하여 현장일행을 지나가게 해주도록 여러 나라에 부탁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구당서.고창전>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서융(西戎)의 여러 나라에서 조공을 바치러 오는 자는 모두 고창을 거쳐야 했다." 당태종 정관4년, 고창왕 국문태가 입조(入朝)한다. "서역의 여러 나라들은 위문태 때문에 사신을 보내고 조공을 바쳤다." 고창은 서역에서 특수한 지위를 가지고 있으므로, 서역제국들이 중국과 무역왕래를 하면서 고창을 거쳐야 했다. 지금 고창왕 국문태가 특사를 파견하고 국서를 보내어 도중에 현장 일행을 보살펴달라고 부탁했다. 현장이 국문태에게 보낸 감사서신을 보면, 국문태는 각국에 잘 보살펴달라고 부탁하면서 선물을 보냈다. 이는 각국에 있어서 실제로 너무나 간단한 일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언기(고창과 전쟁을 벌인 바 있다)를 제외하고, 여러 나라는 현장일행을 주도면밀하게 보살펴 주었다. 전기는 일반적으로 주인공의 개인적인 매력을 과장되게 쓰는 경향이 있다. <자은전>에서는 현장이 고창을 떠난 이후 이렇게 적었다; "거친 여러 나라의 왕후들은 후하게 대해주었다. 모두 그러했다." 이는 전형적인 과장이다. 이때 현장은 단지 보통승려로 아직 천하에 명성을 떨치지 못했다. 그의 서역제국에서의 중요성은 어떻게 하더라도 고창국왕의 국서보다 크지 않았다.

인도에 도착하기 전에, 현장은 특사가 호송하는 대우를 받는다. 국문태의 특사 이외에, 서돌궐 엽호칸도 특사를 보낸다. 양정복 선생의 추측에 따르면, 현장은 원래 엽호칸의 도움을 받고자 했다. 다만 실제 상황은 국문태의 소개로 현장은 비로소 엽호칸과 만날 수 있었다. 국문태가 엽호칸에게 보낸 서신에서 엽호칸에게 현장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어떻게 도와줄 지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엽호칸이 현장을 도와주게 하기 위하여, 국문태는 엽호칸에게 따로 선물로 "능초오백필, 과미두수레"를 준비한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는 초원민족에게는 특히 필요한 것들이다. 현장이 엽호칸과 정식으로 만나고 난 후, "한사(漢使)와 고창사인(高昌使人)을 들어오게 한 후, 국서와 신물을 받아, 칸이 읽어본 후 크게 기뻐하면서 사신들을 자리에 앉게 했다." 칸이 아주 기뻐했는데, 최소한 그중 일부는 선물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며칠 후, "칸은 군내에서 한어와 여러 나라의 말을 아는 자를 찾았고, 나이가 어리면서 장안에서 여러 해동안 살아서 한어를 아는 자를 마돌달관(摩咄達官)으로 임명하여 국서를 만들고, 마돌로 하여금 법사를 가필시국으로 호송하게 했다. 그리고 비릉법복(緋綾法服) 한벌과 견(絹) 오십필을 주어 여러 신하들과 함꼐 십여리를 배웅했다." 가필시국은 인도의 북방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나라에서 "동으로 육백여리를 가서 흑령(黑嶺)을 넘어가면 북인도에 도착하고, 남파국(濫波國)에 이르렀다." 가필시국은 아마도 서돌궐이 통제하는 최남단변경일 것이다. 그후, 가필시국의 사신이 현장을 호송한다. 나게라갈국(那揭羅喝國)의 경내에서 등광성(燈光城)의 서남에 구파라용왕(瞿波羅龍王)이 거주하는 굴이 있는데, 현장은 "가서 예배하고자 했으나, 당시 가필시국에서 호송하는 사람은 하루빨리 돌아가고 싶고 오래 머물고 싶어하지 않아서, 가지 말라고 권했다." 특사의 존재는 아주 분명하다. 아마도 엽호칸의 지시였을 것이다. 현장을 어디까지 호송했는지는 기록이 없으나, 그 아래의 내용을 보면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일 것이다. "법사가 처음 그 국경으로 들어갈 때, 석문(石門)에 이르렀는데, 그곳은 나라의 서쪽 문이다. 왕이 모친의 동생을 보내 차마(車馬)로 맞이했다." 왕성에 가까워지자, "왕이 여러 신하 및 도성내의 승려를 이끌고" 와서 맞이한다. 현장은 국빈대우를 받으면서 융중한 환영과 접대를 받는다. 이전에 그가 지나온 일부 국가에서는 모두 당국을 놀라게한 기록이 없다. 현장은 이때부터 정식으로 학습상태에 들어간다. 여기서 2년간 머문다. 현장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공부하다가 강도를 만난 적도 있다. 이는 모두 2년이후이고, 그때는 더 이상 특사가 호송하지 않을 때였다.

국문태가 엽호칸에게 보낸 서신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고창의 영향력은 서돌궐과 비교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엽호칸은 <구당서. 돌궐전하>에서 통엽호가한으로 칭한다. 거기에는 '용맹하고 계책이 있으며, 공격전쟁에 능하다. 그리하여 북으로 철륵, 로 페르시아에 이르렀으며, 남으로 계빈(罽賓)에 접했는데, 그 안을 모조리 귀속시켰고, 수십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서역의 패주로, 구 오손(烏孫)의 땅을 차지했다. 그리고 왕정을 석국(石國)의 북쪽 천천(千泉)으로 옮겼다. 서역의 여러 나라의 왕에게 모두 힐리발(頡利發, 돌궐의 관직명)을 주었고, 또한 토둔(吐屯) 1명을 보내 다스리고, 세금징수를 감독했다. 서융의 흥성은 이전에 없던 수준이었다." 현장이 쇄엽에서 가습미라국까지 순조롭게 갈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엽호칸의 공로이다. 서돌궐이 강성해서, 가필시국도 엽호칸의 귀빈을 잘 대우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가습미라국이 가필시국의 국빈을 융중하게 대접하는 것도 아주 정상적이다. 각국은 현장법사를 존경했는데, 실제로 현장 배후의 국가를 존경한 것이다. 현장이 이렇게 아주 유리한 신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어덯게 하더라도 국문태의 공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엽호칸은 서돌궐이 불교를 믿지 않으므로, 그 개인은 현장 및 현장이 추구하는 사업을 알지도 못했고, 흥미도 없었다. 그는 현장에게 인도로 가지 말라고 권한다. 이유는 "그곳은 너무 더워서 십월이 오월같다. 법사의 용모를 보니 그곳에 가면 더위를 못견딜 것이다. 그곳 사람들은 검도, 아무런 위엄도 없어서 볼 만하지 않다." 그는 현장을 관광객으로 여겼다. 다만 그는 그래도 현장을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호송해준다. 그에게 있어서 그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국문태이다. 양국은 원래 인척관계였다. 하물며 이번에는 큰 선물과 겸손한 말투로 요청까지 하지 않았는가. 이 정도 자잘한 일을 거절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현장이 고창에서 왔다는 점이 아주 중요하다. 구자에서, 현장일행은 국왕을 포함한 사람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현장이 투숙한 첫번째 거처는 바로 고창인이 만든 사원이었다. "고창인 수십명이 굴지(屈支, 구자)에서 출가했고, 별도로 한 사원에 머물렀다. 사원은 성의 동남쪽에 있었다. 법사가 고향에서 와서 투숙하기를 청하니 그곳에 머물게 해준다. 왕과 여러 승려들은 각각 돌아갔다." 다음 날, 국왕의 초대를 받아, 가장 유명한 아사리아사(阿奢理兒寺)로 간다. 고창인의 우선권이 충분히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아사리아사에서 발생한 일은 이상의 의견을 보충해준다. 아사리아사의 주지승려는 인도에 이십여년간 유학한 사람이다. 현지에서 국왕과 국민들의 존경을 크게 받고 있었고, 독보(獨步)라고 칭했다. 기실, 그의 불학수양은 현장에 미치지 못했다. 그의 첫 태도는 현장의 역할을 증명해준다: "법사가 도착한 것을 보고, 귀빈의 예로 대했으며, 승려로 대하지 않았다." 현장은 그의 눈에 불학을 구하는 승려가 아니라 국왕의 손님이었던 것이다. 사원에서 한 일은 단지 유명한 문화재의 방문참관을 받는 것일 뿐이었다. 현장이 아직 인도에서 명성을 떨치기 전에, 즉 그가 인도로 가는 과정에서는 주로 국광 혹은 국가의 손님이라는 지위를 가졌는데, 그것이 연구에서는 왕왕 시되고 있다.

국문태가 현장을 도와주었다는 점에 대하여 ,현장의 감정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다시피 현장의 원래 계획은 고창에 가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국문태가 그를 열정적으로 대해주고 도와주는 것은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국문태가 현장을 위해 물자를 준비해주고 난 후에 "법사는 국왕이 보낸 사미와 국서, 비단등이 도착하는 것을 보고, 더 두터움에 부끄러움(慚)을 느낀다" 그리하여 서신을 써서 감사인사를 한다. 서신의 첫부분은 서행의 동기를 설명했고, 그리고나서 국문태가 적극적으로 도와준 점을 언급한다. "교하의 물도 그 은혜보다 많지 않고, 총령(파미르고원)의 산도 은혜보다 무겁지 않다. 능계의 험준함을 넘더라도 더 이상 걱정할 일이 없다,...이는 모두 왕의 은혜이다." 국문태의 현장에 대한 지원은 거대한 정신적 동력이 된다. 현장은 이후 어떠한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표시한다. 현장이 혼자서 서쪽으로 가다가 이오에 도착하기 전에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국문태는 그를 만나자마자 옛친구를 만난 것처럼 크게 도와준다. 그 일을 생각해보면 현장은 국문태의 진심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감사는 당연히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현장은 국문태에 대한 감사의 뜻을 항상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국문태와의 3년약속을 항상 기억했다. 십여년후, 계일왕이 현장에게 귀국시에 바닷길로 갈 것인지 육로로 갈 것인지를 물었을 때, 현장의 대답은 고창국을 지나가야하므로 북로를 가겠다고 말한다. 이런 대답은 국문태에 대한 평가이고, 국문태에 대한 감사의 뜻이 농후하게 남아 있다고 할 것이다.

17년이후, 현장은 국문태와의 삼년약속을 지키기 위해 고창국으로 간다. 다만 이때 서역의 형세는 이미 크게 변화되어 있었다. 돌궐의 강성은 이미 옛날 일이 되어 버렸고, 당시 현장의 서행을 저지하던 당태종과 그의 조정이 이곳의 진정한 주인이 되어 있었다. 국문태는 이미 몇년전에 사망했고, 그의 고창국은 이미 당나라의 하나의 주(州)로 바뀌어 있었다. 현장은 다시 고창의 옛땅으로 가지 않고, 직접 중원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그의 보고서가 비준받은 후, 현장은 장안을 거쳐 낙양으로 가서 당태종과 만난다. 이때부터 현장은 당태종의 지원하에 거대한 번역사업을 시작한다. 현장과 당태종의 관계는 학자들이 주목하는 촛점이 된다. 당태종과 만났을 때, <대당서역기>의 진표(進表), 그리고 다른 경우에 현장은 자신의 서행이 모두 당나라의 덕분이라고 말한다. 한번도 국문태를 언급하지 않았다. 현장이 국문태를 잊었기 때문인가? 아니다.

<자은전>은 현장이 스스로 쓴 것이 아니라, 현장의 제자인 혜립(慧立)이 쓴 것이다. 나중에 다시 다른 제자인 언종(彦悰)이 5권을 추가로 써서, 합계 10권이 된다. 전5권의 내용은 서역취경의 과정이고, 후5권은 돌아온 후에 경전을 번역한 사적이다. 혜립은 현장을 모시고 20여년간 불경을 번역했고, 언종의 서언에서는 헤립의 상황을 설명한다. 혜립은 현장의 학행을 숭상했다. 그는 <자은전>을 써서 지부(地府)에 넣어두고 그가 죽고나서 제자들에게 꺼내게 했다. 현장은 혼자서 고창으로 갔고, 혜립이 수행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가 보는 <자은전>에는 고창에서의 일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현장이 국문태에게 올린 감사서신은 전문이 기록되어 있다. 전체 내용은 제3자가 쓴 것인데, 어떤 곳은 확실히 현장의 감정을 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법사는 국왕이 보낸 사미와 국서, 비단등이 도착하는 것을 보고, 더 두터움에 부끄러움(慚)을 느낀다"는 부분에서 '부끄러움(慚)'이라는 것은 현장의 주관적인 느낌이다. 결론적으로 혜립이 기록한 현장의 사적은 현장에게서 나온 것이라 할 것이다. 혹은 현장이 말한 것을 기록한 것일 것이다. 어찌되었건 일정한 정도로 현장의 뜻이라고 할 것이다.

당태종에게 국문태는 죄인이다. 현장에게 국문태는 은인이다. 당태종의 면전에서 현장은 국문태를 언급할 수 없었다. 다만 자신의 마음 속에서는 국문태를 잊을 수가 없었다. 매번 제자들에게 서역행을 이야기할 때면, 현장이 국문태에 대한 감사의 뜻을 나타냈을 것이다. 그래서 <자은전>이 기록된 것이다. 그러나, 혜립은 글을 다 쓴 다음에 지부(地府)에 넣어둔다. 비록 이유로 댄 것은 "여유제미(慮遺諸美)"라고 했지만, 다만 그는 끝까지 고치지 않았고, 죽고나서야 비로소 공표한다. 거기에는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국문태가 당나라조정에서 죄인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여기서 언급할 점은 고창의 옛땅인 투루판(吐魯番)에서 지금까지 최초의 <대당서역기> 잔편(殘片)이 발견되었다. 추측해보면, 현장과 국문태의 후손은 계속 연락하고 있었으며, 현장이 직접 국문태의 아들 국지담(麴智湛)에게 <대당서역기>의 일부분을 보내준 것일 것이다.

현장의 성취는 위대하다. 그러고 그의 모든 성취의 기초는 서역으로 가서 불법을 구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국문태의 도움이 없으면 힘들었다. 당연히 돌아온 후의 불경번역도 아주 중요하다. 이것은 당태종등 황제의 지지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교하자면, 국문태는 설중송탄(雪中送炭)한 것이고, 당태종은 금상첨화(錦上添花)한 것이다. 국문태와 현장의 이야기는 비단길 역사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