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74

신중국 개국대전의 비화 1949년 10월 1일의 개국대전이 열리기 하루 전날 밤. 회인당에는 국연을 위한 식탁이 차려졌으며, 벽쪽의 탁자에는 이미 각양각색의 중국명주가 놓여져 있었다. 마오타이, 통화포도주....어떤 것들은 이미 병두껑이 열려 있었고, 대청안에는 짙은 술향기로 뒤덮였다. 업무인원들은 비록 매우 바빴지만 또.. 2006. 7. 25.
1976년 : 중국의 괴이한 한 해 1976년은 중국의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다. 중국공산혁명의 세 지도자가 이 해에 사망했고, 문화대혁명이 종결되었다. 1976년 1월 8일 : 주은래 총리가 사망하였다. 1976년 7월 6일 : 주덕 원수가 사망하였다. 정강산에서 모택동과 만난 이래로 주덕은 모택동과 환난을 함께 겪었고, 한 명이 어려우면 다.. 2006. 7. 21.
중국의 국호(國號) 이등휘 : 1991년 6월 국민당혁명실천연구원의 발언 "모택동에게 가장 유감스러운 일은 국호를 고친 것이다. 만일 그들이 여전히 중화민국이라고 불렀다면, 우리는 아주 골치아팠을 것이다" 이오(李敖) : 2004년 10월 27일 봉황위성TV <<이오유화설(李敖有話說)>> 168집 1965년, 모택동주석은 프랑스 신.. 2006. 6. 2.
대약진(大躍進) 시대에 몇 명이 죽었는가? 역사상 1959-1962년을 "대약진"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이 3년의 "대약진"은 인류역사상 가장 심각한 재난을 가져왔고, 적어도 굶어죽은 사람이 4천여만명에 달하였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3년의 대재난을 "3년자연재해" 또는 "3년곤란시기"라고 부름으로써 책임을 "천재(天災)"로 돌리고 있다. 그러나, 사실.. 2006. 5. 31.
신중국의 최초의 수도 후보는 하얼빈이었다. 신중국 수도의 최초 후보지는 북경이 아니라, 흑룡강성의 하얼빈이었다고 한다. 모택동은 중국을 하나의 웅혼한 새와 같이 보았고, 흑룡강성은 마치 날개를 펼친 백조와 같았다. 하얼빈은 바로 이 백조의 목아래에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얼빈을 "백조의 목아래에 있는 진주"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 2006. 5. 6.
중국이 6.25참전으로 얻은 것과 잃은 것 6.25전쟁(중국에서는 항미원조전쟁)이 끝난지도 50여년이 흘렀다. 6.25전쟁에 대하여는 사람들마다 보는 바가 다르다. 극단적으로 긍정적으로 보는 자가 있는 가 하면 극단적으로 부정적으로 보는 자도 있다. 6.25전쟁이 쌍방에 미친 손실은 엄청났다. 중국측의 사망90여만, 북한측의 사망 52만, 유엔군의 .. 2006. 3.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