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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전)

서동(舒同): 중국공산당 대만성 제1대 서기

by 중은우시 2006. 9. 16.

 

 

 

서동은 유명한 서예가이다. 그러나 그가 일찌기 중국공산당의 대만성 제1대서기로 임명되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48년, 공산당은 대만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고, 서동은 대만성서기로 내정되었으며, 대만관련업무에 참여하였다. 서동은 당시 국민당의 우우임(于右任)과 더불어 이름을 떨치던 서예가였다. 그의 소위 서체(舒體)는 유명하였고, 일찌기 모택동은 그를 "마배서법가(馬背書法家)", "당내일지필(黨內一枝筆)"이라고 불렀으며, 그의 문장에는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공산당내의 많은 중요한 문장과 문건들은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1948년 중국공산당이 대만공격을 준비할 때, 당시 화동국(華東局)의 사회부장 직위에 있던 서동은 중공중앙과 화동국에 의하여 대만성제1대성위원회서기로 내정되었다. 유격평(劉格平)은 부서기로 내정되었다. 비록 정식으로 취임하지는 못했지만, 서동은 화동국의 사회부장의 지위를 가지고 직접 대만관련업무에 참여했다.

 

1949년 10-11월간에, 중공이 국민당에 심어둔 가장 고위직의 내선(內線, 간첩)은 "밀사1호"라고 불리웠던 국민당 국방부 참모차장인 오석(吳石)이었다. 오석이 장악한 중요한 군사정보를 취득하기 위하여 서동은 장기간 상해, 홍콩에서 정보업무에 종사했던 여자공산당원인 주심지(朱諶之)를 대만으로 보내어 오석과 연락하게 하였다.

 

주심지는 홍콩에서 대만으로 간 후, 오석은 자신의 집에서 주심지를 비밀리에 만난 후, 기밀군사정보자료를 넘겨주었다. 여기에는 대만전투지구전략방어도, 주산군도와 대금문도, 소금문도의 해상방어전선진지병력, 화력배치도, 대만섬 각 전략적 상륙지점의 지리자료분석, 해군공군의 배치와 병력현황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정보는 비밀리에 홍콩을 통하여 화동국에 보내어지고, 서동은 다시 이를 북경으로 보냈다. 당시 모택동은 이 정보가 한 여자공산당원이 비밀리에 대만으로 가서 한 국민당고위층인사인 "밀사1호"로부터 가져왔다는 사실을 듣고는 현장에서 바로 반드시 그들의 공을 기록해서 잊지 말라고 지시항ㅆ다. 나중에 국민당의 보밀국은 공산당의 대만공위위원인 진택민과 공윗기인 채효간을 체포한다. 채효간은 변절하여 대만섬내의 400여명의 공산당원이 체포된다. 이 때 오석과 주심지도 체포되어 사형을 당한다.

 

1950년대에 서동은 지방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는데, 문화대혁명때는 박해도 받았다. 서동은 군사위와 섬서성에서는 호요방과 함께 근무한 바 있다. 문혁이 끝난 후 서동은 섬서성에서 북경으로 돌아왔다. 호요방은 일찌기 다른 사람들에게 글쓰는 법을 가리키면서, 안진경체, 유공권체 외에 현대의 서체도 배우도록 건의하였다.

 

서체는 "칠푼반서(七分半書)"라고도 불리우는데, 해서, 행서, 초서, 예서, 전서에서 각 1푼씩을 취하고, 안진경과 유공권에서 각 1푼씩을 취하였어며  하소기(何紹基)에게 반푼을 취하였다는데서 유래한다. 수십년간의 단련끝에 서체는 점점 독특한 매력을 지닌 서예예술로 변모하였다. 서동은 1949-1954년에 상해에서 근무하였는데, 이 때 화동사범대학, 동제대학, 화동화공대학, 제1의과대학, 제2의과대학, 상해희극학원등의 학교이름과 상해인민광보방송국의 국명, 노동보의 신문명등 글을 남겼다. 지금까지 그가 쓴 상해(上海)라는 글자는 이미 상해라는 도시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