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전)

진영귀(陳永貴) : 일개농민에서 일약 부총리로...

중은우시 2006. 2. 25. 13:01

 

 

포의재상(布衣宰相) 또는 문맹재상(文盲宰相)이라고 불리우는 진영귀는 문화대혁명시기의 풍운아중의 하나이다.

 

진영귀는 원래 산서 석양현 대채대대(大寨大隊)의 당지부 서기였다. 그는 대채사람을 이끌고 열심히 노력하여 고향의 낙후된 면모를 바꿔놓았다. 이로 인하여 대채는 전국 농업전선에서 가장 뛰어난 성과를 올린 곳으로 유명해졌다. 이로 인하여 대채정신(大寨精神)은 대경정신(大慶精神, 대경유전을 발견한 공업상의 일대 성과)과 더불어 당시의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게 되었다. 모택동은 진영귀라는 이 농민을 매우 높이 평가한다.

 

1975년 1월 제4회 인민대표대회 제1차회의에서 진영귀는 국무원부총리로 임명되고, 전국의 농업을 주관한다.

 

1980년 9월 제5회 인민대표대회에서 부총리의 직무를 사임한다.

 

국무원 부총리를 맡은 기간은 모두 5년 8개월이다.

 

진용귀는 국가부총리를 맡으면서도, 농민으로서의 본색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는 농민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다. 흰색 머리띠를 하고, 농민의 옷을 그대로 입고, 농민의 신발을 그대로 신었다. 그리고, 농촌을 떠나지도 않았다. 그는 모택동주석에게 청하여, 매년 1/3의 시간은 북경에서 일을 하고, 1/3은 전국을 시찰다니며, 1/3의 시간은 빼서 대채로 돌아가서 노동활동을 하겠다고 하였고, 모주석이 동의하였다. 그는 국가로부터 월급을 받지 않았는데, 아마도 국가의 월급을 받지 않은 유일한 부총리일 것이다. 그리고, 대채에서 대채사람들과 똑같이 노동한만큼 분배받았다. 호적도 대채에 남겨두었고, 북경으로 옮기지 않았다. 처와 자식들도 북경에서 살도록 하지 않았다.

 

진영귀는 중국의 가장 보통의 농민이었고, 반문맹이었다. 그가 겨우 쓸 줄아는 글자가 사오백자정도이고, 뜻을 겨우 알아보는 한자가 1000개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말은 조리있게 잘하였고, 유머가 있었다. 실제로 그의 말을 듣는 사람은 하품하거나 조는 사람이 없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고 싶어했다.

 

사람들은 그를 포의재상이라고 불렀다.

 

부총리직을 사임한 후, 그는 다시 농촌으로 돌아갔다. 외부에서 그에 대한 간섭을 줄이기 위하여 중앙정부는 그와 처, 아이들을 북경으로 호구를 옮기고 북경근교의 농장에 고문으로 일을 하도록 하였다. 신분은 농민에서 국가의 직원으로 바뀐 것이다. 월급은 매월 150위안이었고, 국가는 그에게 50위안의 보모비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의 처에게 집안일을 하도록 하였고, 그에게 주어진 차량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영귀대숙(대숙은 큰아저씨라는 의미)"라고 불렀다.

 

1986년 3월 26일 진영귀는 사망했고,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골은 대채 호두산위에 뿌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