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해용(1938.9.25 ~ )
1964년 북경사범대학 러시아어과 졸업, 북경외국어학원 영어연수
1965년 11월 외교부 근무
1971. 7. ~ 1972. 5. 외교부 예빈사 부사장. 키신저중국방문과 닉슨중국방문시 접견관련업무수행
1972. 5. ~ 1974. 7 외교부 부장조리. 예빈업무
1974. 7. ~ 1979. 2.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부부장
1984. 4. ~ 국무원 참사실 부주임
문화대혁명시기는 모든 것이 역사상 전례가 없던 시기였다. 당시 신문의 머릿면이나 텔레비전의 황금시간대에는 왕해용이 모택동의 곁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검고 빛나는 머리카락, 학생같은 스타일의 안경을 코위에 걸치고, 하얗고 예쁜 얼굴과 붉게 빛나는 입술을 가지고 항상 가벼운 미소를 띄고 있는 여자. 젊으면서도 풍모가 있어, 그녀는 매우 신비한 인물로 각인되었다. 그녀는 이로서 천하에 이름을 날렸고, 매체들의 초점이 되었다.
그녀는 호남의 명문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조부인 왕계범(王季范)은 신해혁명에 참가한 노인이고, 당시에 명망이 높았던 무당파 지식인이었다. 1949년이후에는 정무원 참사도 지내고 정치협상회의 상임위원도 지냈다. "해용"이라는 이 이름은 바로 왕계범이 지어준 것이다. 바로 "해납백천, 유용내대(海納百川, 有容乃大)"에서 따온 말이다. 그리고, 이 왕계범 노인은 모택동주석과는 친척간이었다. 이고종형제가 되었다.
왕해용은 모주석의 신변에서 일하면서, 젊어서 관직이 높아지고, 매우 승진이 빨랐다.
왕해용은 1960년 가을에, 우수한 성적으로 북경사범대학을 입학한다.
1965년 가을에 왕해용은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주은래 총리의 특별지정으로 그녀는 외교부에서 근무하게 된다. 이는 그녀의 지위를 같은 학번의 친구들보다 훨씬 높게 만들었고, 이로 인하여 같은 나이대의 청년들은 그녀를 바라만 볼 뿐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아마도 이것이 그녀로 하여금 일새동안 결혼을 하지 못하게 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든 양면성이 있는 것이다. 총리의 결정은 그녀로 하여금 관계에서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지만, 그것은 그녀에게서는 젊은이의 가장 고귀한 애정을 희생해야만 했던 것이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며 그녀는 더욱 주목받게 된다. 그녀는 이 시기에 수시로 중남해를 드나들며, 이미 전국인민에 의하여 신으로 추앙받게 된 모택동의 곁에서 활약한다. 1970년에 그녀는 외교부의 예빈사 부사장을 맡고 1972년에는 다시 외교부의 부장조리로 승진한다. 그리고 2년후 다시 외교부의 부부장으로 임명된다. 1965년에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가 1974년에 외교부의 부부장이 된 것이다. 누가 그녀처럼 빠르게 승진할 수 있을 것인가. 이후 그녀는 4년간 부부장의 직위를 가지게 된다.
모택동의 죽음과 4인방의 실각으로 왕해용의 황금시대는 끝이 난다. 1976년 가을 그녀는 직위를 정지당하고 조사를 받는다. 여러번에 걸친 조사를 거쳐 1978년 말에 그녀는 다시 재기한다. 국무원으로 옮겨 참사실에서 근무하고, 부주임으로 임명된다. 직무로 보면 부부장보다 많이 낮지만, 여전히 부부장의 대우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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