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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초기)

청나라초기의 남북태자사건

by 중은우시 2006. 7. 21.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는 모두 7명의 아들을 두었다.

 

장자, 태자(太子)        주자랑(朱慈烺)

이자, 회은왕(懷隱王)  주자훤(朱慈煊)  어려서 죽음

삼자, 정왕(定王)        주자형(朱慈炯)

사자, 영왕(永王)        주자소(朱慈炤)

오자, 도영왕(悼靈王)  주자환(朱慈煥)  5세때 사망

육자, 도회왕(悼懷王)   이름없음          2세때 사망

칠자,                        이름없음           3세때 사망

 

숭정제의 일곱아들중 이후 청나라때 여러번 이름이 나타나는 것은 소위 주삼태자(朱三太子)로 불리우는 주자형이다. 여기서는 태자 주자랑의 남북태자사건을 살펴본다.

 

북태자사건

 

1644년 겨울, 한 소년이 청나라에 투항한 주규(周奎)의 집에 나타났으며, 스스로 명나라의 태자 주자랑이라고 하였고, 주규의 집에서 치료받고 있던 장평공주(長平公主)를 만나겠다고 하였다.

 

장평공주는 원래 숭정제의 딸로서, 이자성이 북경에 진입하기 전에 숭정제는 아끼는 딸이 능욕을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칼로 장평공주를 내리쳤다. 그러나 단지 팔 하나만을 잘랐을 뿐이었다. 이자성이 궁으로 들어온 후, 핏속에 쓰러져 있는 장평공주를 보고는 "하늘도 너무한다"는 말을 하였다. 그는 공주가 이미 죽은 것으로 알고 사람에게 명하여 공주를 황제친척인 주규의 집으로 보낸다. 장평공주는 5일간 혼절해 있다가 깨어난다. 그리고는 이미 부친은 목을 매어 사망하였고, 이자성이 이미 북경에 들어왔고, 대명황조는 대순황조로 바뀌었다는 알게 되고는 비통함을 금치 못한다. 장평공주는 나중에 이자성의 수하인 유종민의 수중에 들어간다. 그러나 풍운은 변화막측하며, 40일후 대순황조는 다시 대청황조로 바뀌게 된다. 청나라 군대가 입성한 후, 섭정왕 도르곤은 사람을 보내어 장평공주와 나머지 죽지 않은 비빈들을 찾아서, 특히 우대해준다. 장평공주는 팔 하나만 남고, 나라도 망하고 집안도 무너져, 천지간에 몸을 의탁할 곳이 없다는 생각에 청나라 조정에 글을 올려 출가하여 여승이 되겠다고 한다. 그러나 청나라 조정에서는 허락하지 않고, 부마인 주세현과 장평공주가 결혼하도록 하며, 논밭과 집, 차마등의 재물을 내린다.

 

장평공주는 소년을 보자 마자 바로 머리를 붙잡고 통곡한다. 이 태자는 진짜였던 것이다.

 

태자 주자랑은 그러나 주규에 배신당하여, 청나라에 붙잡힌다. 많은 사람들이 태자의 목숨을 구해달라고 청했다. 당시 청나라조정을 좌지우지하던 섭정왕 도르곤은 전황조의 태자를 핍박해서 죽게하였다는 악명을 뒤집어쓰지 않기 위하여, 이 태자는 가짜태자라고 선포한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산서의 진왕으로 하여금 증인을 서게 하고, 사승(명나라의 대학사)로 하여금 증인을 서게 한다. 배심관리인 전봉람은 진짜 태자라고 주장하다가 오히려 도르곤에게 죽임을 당한다. 북태자는 나중에 죽임을 당하게 된다.

 

남태자사건

 

1644년 12월, 남경에 설립한 남명정권의 홍로사소경인 고몽기의 노복인 목호는 북에서 남으로 내려가고 있었는데, 도중이 이름을 왕지명이라고 하는 소년과 만나서 같이 길을 가게 된다. 저녁에 잠자다가 소년의 내의에 용무늬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소년의 신분을 묻게 된다. 소년은 스스로 황태자라고 한다. 남경에 도착한 후, 고몽기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기가 어려워 급히 소주, 항주일대로 보내어 왕지명을 숨겼다. 그러나, 이 소년은 가는데마다 자신을 드러내고 귀인의 행태를 나타내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고, 사람들은 모두 뒤에서 말이 많았다. 고몽기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남명정권에 보고했으며, 남명정권의 홍광제는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갔다.

 

남명홍광원년(1645년) 3월 1일, 이 소년은 절강의 금화에서 남경으로 온다. 금의위의 풍가종이 그를 간수한다. 다음 날 홍광제는 여러 신하들에게 "한 어린 아니가 스스로 선제의 동궁이라고 하는데, 만일 선제의 아들이면 바로 짐의 아들이다. 마땅이 잘 길러야 할 것이다."라고 하고는 후, 백, 구경, 한림, 과, 도 등의 관리들을 보내어 함께 심문하는데 참여했다. 대학사 왕탁은 일찌기 동궁에서 교관으로 3년간 있은 적이 있어서 태자의 모습을 잘 알았는데, 한번 보고는 바로 가짜인 것을 알았다.

 

홍광정권이 들어설 때에는 많은 관리들이 예전에 숭정제의 조정에서 일하던 사람들이었고, 태자인 주자랑을 본 사람은 왕탁 한 사람이 아니었다. 일찌기 동궁 강관을 담담했던 유정종, 이경렴도 "모두 태자는 눈썹이 길다"고 하면서 가짜 태자를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다. 홍광제는 다시 동궁의 내시를 지냈던 구집중으로 하여금 살펴보게 하였는데도, 가짜 태자를 알아보지 못했다. 사가법도 이 때 이미 북경에 있던 대명세로부터 태자는 북경에 여전히 살아있다는 서신을 받은 바 있어, 남태자의 신분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왕지명은 가짜로 결론을 내렸다. 원래 왕지명은 부마도위였던 왕병의 조카손자였는데, 목호와 장난치다가 진짜로 태자행세를 하게 된 것이었다.

 

당시 홍광제의 조정관리들은 모두 이 남태자가 가짜라는 것을 알았다. 아무도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 사건이 직접적으로 홍광제의 황제위의 정통성과 연관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홍광제 주유송에게 불만이 있던, 사람들은 이 기회를 틈타 각종 유언비어를 퍼뜨렸고, 태자의 진위를 둘러싸고 진상을 잘 모르던 백성들 사이에 의론이 분분하게 되었다. 황득공과 좌량옥은 모두 상소를 올려 홍광정권이 남태자를 엄히 심문한 것에 대하여 불만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홍광정권이 가짜라고 말하면 말할 수록 백성들과 다른 사람들은 더욱 진짜라고 의심했다. 보편적인 견해는 남태자가 진짜라면 홍광제는 당연히 황위를 넘겨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홍광제는 황위를 넘겨주기 싫어서 남태자를 가짜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청나라 군대가 남경을 점령할 때까지 끊이지 않고 홍광정권을 괴롭혔다. 홍광정권이 멸망하고나서야 더 이상 의론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