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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중국정부의 일본에 대한 전쟁배상 요구포기의 과정 (2)

by 중은우시 2006. 2. 19.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는 전쟁이 폭발하였다. 미소 양진영의 첫번째 무장충돌이었다. 미국과 중국의 개입으로 6.25는 단순한 내전에서 국제전쟁으로 변모한다. 미국은 이번 공산주의확장을 저지하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일본을 반공의 선봉에 서도록 한다. 이를 위하여 미국은 하루빨리 일본과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일본에 대한 군사적인 제한을 해제하며, 그 주권을 회복하도록 하고, 일본이 하루빨리 반공의 대열에 서도록 하고자 한다. 샌프란시스코회의를 개최하자는 건의는 바로 이런 화약냄새가 짙은 분위기에서 제출된 것이다. 그러나, 미소는 중국정부에 대한 인식이 달랐다. 초청국을 어디로 하느냐는 문제를 놓고 미소는 의견이 충돌했다.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대만의 장개석정부가 평화회의에 참여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소련의 극력반대에 부딛쳤다. 샌프란시스코회의가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미국은 하루빨리 일본을 정상화시키기 위하여 중국이 전승국으로서 권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연합국이 중국정부에 대하여 이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유로 일방적으로 초청대상에서 중국을 배제하여 버린 것이다. 중국은 별도로 일본과 평화조약을 체결하라고 주장하였다. 중국의 어느 정부가 일본과 조약을 체결할 것인지에 대하여 미국은 "일본이 결정해야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중국을 샌프란시스코평화회의에서 배제하고, 협상상대방을 일본정부가 정해야한다고 함으로써 대륙정부를 일본과의 평화협상과정에서 배제시켰다. 대륙과 대만은 모두 미국의 태도에 불만을 표시하였고, 반대하였다. 7월 16일 장개석은 대만에서 담화를 발표하여 "중국이 대일평화조약협상에 서명하는 것을 거절당한 것은 국제신의를 파괴하는 것이며 정부는 절대 용인할 수 없다"고 하였다. 8월 15일, 주은래 외상은 중국정부를 대표하여 이에 대하여 항의를 제출한다. 9월 4일 개최되는 샌프란시스코회의는 국제의무를 저버렸으므로 중국은 승인할 수 없다고 밝힌다.

그러나, 미국당국은 중국측의 강력한 항의를 무시하고 자기뜻대로 밀어붙인다. 9월 4일부터 8일까지 개최된 52개국이 참석한 샌프란시스코회의는 미국의 조종하에 대일평화조약이 통과된다.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은 매우 불공정한 조약이다. 그것은 일본에 작전을 개시한 시간을 1941년 12월 7일로 규정하여, 중국인민들이 1931년 9월 18일부터 특히 1937년 7월 7일부터 1941년 12월 7일까지 여러해동안 일제에대하여 싸워온 단독항전의 역사를 말살하였다. 동시에 평화조약은 배상문제에 대하여 일본에 지나치게 관대하였다. 그저 "일본국은 전쟁중에 조성된 손해와 고통에 대하여 앞으로 연합국에 배상한다."는 조항만 있을 뿐 구체적인 숫자도 언급하지 않았다. 동시에 전승국의 배상요구에 대하여 원칙상의 제한을 둔다. 즉 단지 "일본국민이 제조상에서 노무상 기타 당해 연합국에 대한 기타의 용역상의 기능과 노동을 이용하여 각국이 그가 입은 손실을 회복하는 비용으로 협정배상한다." 그리고 반드시 "일본이 생존을 유지하는 경제범위내에서 진행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러한 여러 겹의 제한이 있는 배상규정은 바로 일본인의 노무로 배상하는 것이므로 변칙적으로 일본의 전쟁배상을 감면한 것이었다.

 

 이것은 1945년에 제정한 가중배상의 원칙에 배치되는 것이었다. 아시아, 유럽의 국가들의 반대에 부딛쳤다. 중국, 북한, 월남은 회의에 초청받지 못하였고, 인도와 버마는 회의출석을 거부했다. 회의에 출석한 소련,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는 회의후 서명을 거부했다. 이렇게 중국, 인도, 소련등의 국가의 반대로 당시 세계의 절반의 인구는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9월 18일, 주은래외상은 신중국정부를 대표하여 엄중하게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을 비난했다. 그것은 "하나의 일본국국주의를 부활시키고,중소를 적대시하며, 아시아를 위협하고, 새로운 침략전쟁을 준비하는 조약"이라는 것이었다. 동시에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참여, 준비, 체결하지 않았으므로, 중앙인민정부는 불법적이고, 무효인 것으로 보며, 절대 승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신중국정부와는 달리 대만의 국민당정부는 일본으로부터 소위 '정통지위'를 인정받기 위하여,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을 승인하고, 미국의 뜻에 따라 일본과 단독으로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방안을 채택한다. 1951년 9월 12일, 대만당국의 외상 섭공초(葉公初)는 성명을 발표하여 "대만당국은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을 기초로 하여 일본과 양자간 평화조약을 체결하고자 한다"고 밝힌다.

1951년 9월 8일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일본의 전후 불리한 지위를 개선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11월 26일, 일본국회는 바로 이 조약을 승인한다. 한편, 일본정부는 중국과의 평화협상에 있어서 요시다 정부는 "일본은 현재 상대방을 선택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어떻게 이 권한을 행사할 것인가는 객관적인 환경을 고려하고, 중국의 상황을 고려하며, 일본의 장래관계를 고려해야 하며, 쉽게 결정해서는 안된다"고 밝힌다. 여기에 담긴 뜻은 결국 이 권한을 이용하여 이득을 취하겠다는 것이다. 나중에 밝혀진 것처럼 요시다정부는 확실히 이 문제에 머리를 써서
음험하고 간사하게 일을 처리한다.

시기를 기다리기 위하여 일본정부는 중국과 평화조약체결문제에 있어서 지연정책을 쓴다. 그러나 연합국으로부터 고의로 지연한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하여 요시다정부는 민의조사를 한다. 일본국민에게 베이징과 체결할 것인지, 타이페이와 체결할 것인지에 대한 입장을 붇는 것이다. 그러나 나온 결과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타이페이와 북경을 지지하는 비율이 똑같았던 것이다. 모두 38%였고, 나머지 24%는 어떡하든 좋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요시다정부는 민의를 판단하기 어렵고, 결정하기 어렵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일단 협상을 거부하고, 사태를 관망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면서 비공식적으로 대만의 조급한 심리를 이용하여 계속 북경과 협상할 것이라는 정보를 흘린다.

1951년 10월 25일, 장기석은 주일본대표인 동현광(董顯光)으로 하여금 일본내각의 관방장관 岡岐勝男을 만나서 조약체결에 관한 사항을 알아보게 한다. 강기는 "우리가 지금 귀국과 양자간 평화조약을 체결한다면, 대륙의 중국국민은 우리를 원수로 생각할 것입니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재 정책은 천천히 시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일본이 독립자주권을 취득한 후 언제 중국과 평화조약을 체결할 것인지, 어느 중국정부와 체결할 것인지를 결정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전부터 중화민국정부를 존중해왔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중화민국정부의 영토는 대만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 말에 담긴 뜻은 대만측과 조약체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5일후 요시다는 일본 참의원의 연설에서 대만이 더욱 놀랄만한 말을 한다. 요시다는 공개적으로 "만일 중공이 금후 3년내에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 근거하여 일본과 평화조약을 체결할 것을 제의하면, 일본정부는 자연히 조약을 담판하여 체결하기를 원하며 전혀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다. 이후 요시다는 동현광을 만나서도 "일본은 대륙의 4억5천만중국인의 감정을 무시할 수 없다"고 한다. 일본의 정계요인의 일련의 말로써 대만당국은 좌불안석이었다. 대만당국은 소위 정통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한편으로는 주미대사인 고유균(顧維鈞)으로 하여금 미국당국이 일본당국에 압력을 가하도록 노력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일평화조약의 초안을 만들며 그 안에서 많은 양보를 하는 것으로 하였다. 특히 일본측이 민감하게 생각하는 배상문제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초안중에 이런 규정이 있다. "중국은 일본국이 생존하기에 충분한 경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을 인정하며, 그 자원이 현재 완전하게 이러한 손실과 재난을 배상하고, 동시에 다른 의무를 부담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단지 "일본국민이 중화민국을 위하여 생산노무 기타 용역을 제공함으로써 보상한다.이외에 중화민국은 일체의 배상요구를 포기한다. 당해국과 그 국민이 일본국 및 일본국민의 작전과정에서 취한 여하한 행동으로 인하여 발생한 기타 요구를 포기한다" 이 초안에서 이미 초보적으로 일본에 대한 배상을 포기하였고, 단지 일부분 노무배상내용만 남겨두었다. 이와 동시에 대만당국은 조심스럽게, 일본이 화를 내서 조약체결의 기회를 잃지 않도록 움직였다. 하나의 에피소드는 이 때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즉, 주미대사인 고유균은 명을 받아 미국과 교섭후 미국의 AP통신이 뉴스를 보냈다. 고대사는 일본의 양자간평화조약지연에 대하여 불만을 표시했다고. 대만외교부는 이를 듣고 깜짝 놀라서, 즉시 이 일을 알아보고 부인성명을 낸다. AP보도는 잘못된 것이라고.....이로써 당시 대만정부가 얼마나 조심스럽게 움직였는지를 알 수 있다.

미국이 당시에 반공의 목적에서 아시아에서 일본을 지원하고 장개석을 포기하지 않는 정책을 썼다. 이로 인하여, 대만이 일본과 조약체결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적극 지원한다. 1951년 11월 5일, 미국 백악관은 "일본과 중공이 관계를 맺으려는 어떠한 기도에도 반대한다"는 것을 밝힌다. 이후 12월 10일 샌프란시스코회의의 주요 기획자의 하나이고, 일본조약체결을 책임졌던 덜레스를 일본에 특사로 파견하여 일본으로 하여금 장개석정부와 조약을 체결하도록 종용한다. 덜레스는 현지에서 직접적으로 일본이 대만과 조약을 맺도록 요구하며 위협적으로 말한다. "만일 일본정부가 중화민국과 평화조약을 체결하지 않는다면, 미국국회는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을 승인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강격한 간섭과 대만측의 많은 양보를 받아낸 상황하에서 일본정부는 못이기는 척 태도를 바꾼다. 12월 24일, 요시다는 공산중국을 승인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대만과 평화조약을
체결하기를 원한다고 밝힌다. 1952년 1월 30일, 일본은 河田烈에게 위임하여 중일평화회담의 수석대표로 대만에 파견한다. 국민당의 외상인 섭공초와 양자간 협상을 시작한다.

1952년 2월 30일, 담판은 정식으로 개시된다 4월 28일에는 조약이 체결된다. 정식회담이 3회 개최되고, 비공식회담이 18회, 기간은 67일이 걸린다. 담판기간중에 일본측에서는 또 한번 음험하고 교활한 면모를 드러낸다. 전쟁배상문제는 평화조약의 중요한 내용이고, 이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매우 격렬하였다. 중국측이 초안한 평화조약초안에는 배상문제에서 단지 일본이 중국에 노무보상을 해달라고 요구하고 나머지 배상은 이미 포기하였다. 이것은 대만당국으로서는 큰 양보였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회의의 원칙과 일치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에 대하여 단호하게 반대하였다.
말도 안되는 이유를 들어, 대만은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의 원칙에 따라 중국에 있는 일본자산을 몰수할 수 있으므로 그것으로 보상을 삼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다시 노무보상을 제공할 수 없다고 하였다. 쌍방의 관점에 차이가 너무 커서 담판은 여러차례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뿐아니라 일본은 패전국이라는 신분을 잊어버린 듯, 여러차례에 걸쳐 자신이 초안한 평화조약의 초안을 제시하였고, 기세가 대단하였다. 그러나 대만측에서는 협상초기에 미국을 믿고 있었고, 미국이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을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무기로 하여 위협하면 일본이 결국 양보하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대만당국도 초안에 사소한 문구만 수정할 뿐 중대한 양보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데, 3월하순이 되면서 상황이 급변한다. 미국은 먼저 3월 20일 국회에서 66대 10으로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을 비준한다. 그리고 4월 16일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이 4월 28일에 발효한다고 선언한다. 미국의 행동은 대만당국의 입장에서는 등뒤에서 칼을 꽂는 격이었다. 미국국회가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을 승인하였으므로, 대만은 일본과의 담판에서 가장 중요한 카드를 잃어버렸따. 동시에 미국은 평화조약 발효시기까지 정했으므로, 일본측에 유리하였다. 일본은 일단 평화조약만 발효되며 패전국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주권을 회복할 수 있었으며 중국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것은 대만에 매우 불리하였다

 

이와 같이 상황이 역전되자, 장개석정부는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발효전에 일본과 평화조약을 달성하기 위하여 배상문제에서 전면적으로 양보하게 된다. 3월 25일 모든 배상을 포기한다. 단지 조약초안중에 아래의 문구만을 넣게 된다. "일본은 그 배상의무를 인정한다. 중국측은 일본이
전부를 배상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한다. 이를 위하여...중국은 노무로 배상을 진행하는 요구를 포기할 것을 선언한다."

그러나 기세를 얻은 일본은 대만측이 급히 조약을 체결하려는 심리를 이용하여, 이 문장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조약에서 배상문제에 대한 조항을 빼버리자고 주장하며, 지연방법을 써서 담판을 거절하였다. 대만정부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4월 12일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장개석정부와 일본의 평화조약은 4월 28일 오후 3시가 되어서야 완성된다. 이 시간은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의 발효로부터 단지 7시간을 남기고 있는 시간이었다. 이로써 장개석과 일본의 평화조약에는 배상이라는 두 글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 관련내용은 단지 평화조약이외의 의정서에서
확인된다. 의정서의 제1조 을항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일본인민에 대하여 관대하고 우호적인 뜻을 표시하기 위하여, 중화민국은 스스로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제14조 갑항 제1항의 일본국이 제공해야하는 용역의 이익을 포기한다"

또 다른 관련내용은 평화조약 정본 부록의 기록중에 있다. 원문은

일본국전권대표:

본인은 이렇게 이해한다. 중화민국은 이미 본조약 의정서 제1항 을항에 언급한 스스로 용역배상을 포기한다....맞는가?

중화민국전권대표:

"맞다. 그렇다"

장개석과 일본의 평화조약체결은 신중국인민의 강력한 항의를 낳는다. 1952년 5월 5일, 평화조약체결후 1주일후에 주은래총리는 중화인민공화국정부를 대표하여 강력한 성명을 발표한다. "미국이 발효를 선포한 불법적이고 단독의 대일평화조약은 절대로 승인할 수 없다. 공개적으로 중국인민을 모욕하고 적대시한 요시다와 장개석의 평화조약은 단호하게 반대한다" 그리고 장개석의 소위 배상요구포기의 승락은 중국정부와 인민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