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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중국정부의 일본에 대한 전쟁배상 요구포기의 과정 (1)

by 중은우시 2006. 2. 19.

국제관례에 따르면, 전쟁후에 체결하는 평화조약에는 모두 전쟁배상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패전국이 승전국에게 지급하는 배상금의 금액은 때때로 놀랄만한 숫자인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1894-1895년 청일전쟁종결후에 전승국인 일본은 시모노세키조약을 통하여 전쟁배상의 명목으로 패전국인 청정부로부터 백은 이억냥을 받아갔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중국은 14년에 걸쳐 항일전쟁을 펼쳤고,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그러나, 놀라운 점은 전쟁이 끝난 후, 패전국인 일본은 승전국중의 하나인 중국에 배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전쟁피해가 비교적 적었던 동남아의 국가들까지도 일정한 정도의 배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버마, 필리핀, 인도네시아가 얻은 배상금은 각각 2억달러, 5.5억달러, 2.23억달러였다. 심지어 아직 통일되지 않았던 남쪽 월남정부가 받은 배상금도 3,900만달러였다. 도대체 왜 중국은 배상을 받지 않은 것일까?

 

1945년 8월 15일, 일본천황 히로히토의 정전조서를 방송하는 동시에 중국대륙에는 14년간 발호했던 일장기는 내려졌다. 중국항일전쟁은 세계 반파시스트전쟁의 분리할 수 없는 일부로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둔 것이다. 1945년 9월 2일 10시, 일본대표는 동경만에 정박한 미군전함 미주리호에서 투항서에 서명했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파시스트 3추축국집단중에서 일본은 최후로 투항서에 서명하였다. 이전에 이탈리아와 독일은 각각 1943년 9월과 1945년 5월 7일에 연합군에 투항하였다.

 

표면적으로 보면, 일본은 미국의 원자탄투하, 소련의 만주출병을 포함한 연합군의 공격에 투항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상으로 일본의 투항을 촉진한 결정적인 요소는 중국에서의 8년간의 전면적인 항전이었다.

 

중국은 항일전쟁에 대한 공헌도 가장 컸고, 희생도 가장 컸다. 통계에 따르면, 이 전쟁에서 중국군민희생자의 수는 3,500만에 달하였다. 각종손실을 당시의 미화로 환산하면 1,000억달러이상이었다. 이런 중대한 경제손실에 대하여 원흉인 일본이 중국에 전쟁배상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중국정부의 이에 대한 태도는 상당히 분명했다. 당시의 국민정부의 외무장관인 왕세걸(王世杰)은 전쟁후의 중국의 일본에 대한 기본정책을 밝힐 때 이렇게 말했다. "비록 중국은 속좁은 보복주의를 채택할 것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배상문제는 바로 정의와 공정의 요궁 맞추어 해결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중국정부는 조사위원회를 성립하고, 전쟁중의 각종 인력, 물자손실의 상황을 조사통계내고, 향후 일본에 배상요구를 제기할 것을 준비하였다.

 

중국이 일본에 배상을 요구하는 정책과 연합국이 전후에 패전국에 대하여 취한 정책은 일치했다. 일찌기 1945년 2월 영미소의 수뇌는 얄타에서 회담을 열어 독일, 이탈리아, 일본파시스트 패전국이 연합국에 지급할 전쟁배상의 원칙을 정하였다. 독일은 200억달러를 배상하며, 그 중 100억달러는 소련에, 80억달러는 영국 미국에, 나머지는 다른 나라에 주는 것이었다.

 

전후에 영, 미, 프, 소는 독일에 대하여 지역을 나누어 점령하고, 연합국관리위원회를 구성했다. 독일의 배상은 연합국이 점령한 지역에서 공업시설을 반출해가는 것으로 대물변제처리했다. 1947년 2월 10일 연합국과 5개국가가 약정한 내용에서 이탈리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핀란드의 5개국가는 소련,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그리스의 4국에 2.55억, 3억, 0.7억, 4억과 3억달러를 배상하도록 하였다.

 

일본에 대하여는 미영소중을 위시한 연합국이 일본항복후에 배상위원회를 구성하고 전문적으로 일본배상문제를 협상했다. 1945년 11월 5일, 위원회는 만장일치로 일본이 전쟁을 진행한 산업능력을 박탈하고, 군국주의부활을 방지하기 위하여 일본에 대한 전쟁배상을 가중하기로 결정한다. 방식은 일본공업설비의 절반이상을 철거하여 각 전쟁피해국에 배상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각국은 나누어 전쟁기간의 손실을 조사, 통계내었고, 구체적인 배상방안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1947년 10월 25일, 2년간의 조사확인을 거쳐, 연합국은 일본에 대하여 손해배상요구를 하였고, 총금액은 540억달러였다. 중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배상을 어떻게 분배하느냐는 문제에 있어서, 각국의 의견은 일치하지 않았다. 영국은 25%를 요구했고, 미국도 34%를 요구했으며, 소련은 14%를 요구했고, 프랑스는 12%를 요구했고, 호주는 28%를 요구했다. 이 몇개 국가만 하더라도 가장 피해가 큰 중국이 포함되지 않았음에도 이미 100%를 넘어섰따. 중국은 피해가 가장 크고 오래되었으며 희생이 가장 많았다는 것을 들어 일본배상총액의 40%를 요구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은 동의하지 않고 30%에 동의하였다. 이후 각 당사국들간의 의견차이는 계속되었고, 문제는 계속 지연되었으며 해결되지 않았다. 국민당정부는 이후 내전에 바까 일본배상금의 분배문제에 더 이상 신경쓸 수 없었다. 그러나 국민당의 요인인 장군은 1947년 9월 9일 국민당 제6차4중전회상에서의 외교보고중에서 "절대로 우리는 일본에 대하여 마땅히 받아야 하는 배상을 포기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이것은 당시의 국민당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일본쪽에서는 샌프란시스토대일평화협약에 서명할 때까지 어떤 국가에 대하여도 전쟁배상문제를 꺼내지 않았다. 이 사이에 4년이 흘러갔다.

 

1951년 7월 12일, 미국은 대일평화조약초안을 공포하고, 7월 20일 연합국에 샌프란시스코회의에 참가할 것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낸다. 이로써 한동안 방치하였던 대일평화조약문제는 다시 의안으로 부상한다. 그러나, 세계각국이 깜짝 놀랐던 것은 미국이 초안한 대일 평화조약에서 대일작전을 펼친국가명단에서 중국이 빠져버린 것이다. 그 후 중국은 샌프란시스코평화회의에 참가하는 초청장을 받지 못한다. 이것은 중국, 즉 반일전쟁을 가장 오랫동안 펼치고, 손실도 가장 컸으며, 공헌도 가장 컸던 국가가 연합국의 대일평화협약의 초안 및 서명에 참가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샌프란시스코평화회의는 중국을 참가시키지 않은채 이루어진다. 중국을 대일협상에서 배제한 주범이 미국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당시 전쟁후에 미소가 대립하는 냉전구도의 형성 및 미국이 세계의 유일강대국이 되고자 하는 정책상 소련을 억제하려는 글로벌전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2차세계대전종전후, 미국은 전쟁과정에서 성장한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세계에 미국식의 평화를 건립하고자 하며 세계의 패자로 군림하고자 한다. 그러나, 전후에 실력이 마찬가지로 강했던 소련과 소련의 영향하에 동유럽에 건립된 일련의 신흥 사회주의국가들이 존재하고 있어, 미국의 꿈은 쉽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미국은 공산주의확장을 저지한다는 명분하에 서방자본주의국가를 소련과 대립각을 세우도록 몰아갔따. 이로써 반파시스트전쟁에서 함께 어깨를 나란히하고 싸웠던 과거의 동지들은 각자 자신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50년대초에 이르러 미소대치의 냉전국면은 이미 형성되었다. 이 사이의 국제사건은 중국인민해방전쟁이 폭발하고, 동서독이 분열하고 조선은 38선으로 분열되었다. 모두 미소간의 냉전의 시대적 낙인이었다. 그 중 중국사태의 발전은 가장 전형적으로 이 시대의 특색을 보여준다.

 

1947년부터 1951년까지 중국인에 있어서는 하늘과 땅이 뒤바뀌는 변화가 일어났다. 강산은 주인을 4번이나 바꾸었다. 이 기간동안 내전의 전화는 불이 붙고, 장개석은 대만으로 도망쳤으며, 모택동이 영도하는 공산당은 1949년 10월 1일 북경에서 오성홍기를 게양하며, 신중국의 탄생을 알렸다. 중국의 형세변화에 미소양대강대국은 완전히 상반되는 태도를 취하였다. 소련은 1949년 10월 즉시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극력 신중국의 합법적 지위를 부인하고, 이미 서산에 지는 해인 장개석정부를 지지하였다.

 

중국의 탄생이 자본주의진영에 주는 타격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극동아시아에 새로운 반공의 보루가 필요했던 미국은 일본을 선택한다. 1948년 1월 6일, 미국 육군장관은 연설중에 "이후 일본에 대한 점령정책은 강력한 일본정부를 만드는 것이다. 이로써 이후 극동지역에 새로 생긴 공산주의위협을 방어하는 보루로 삼을 것이다" 이것은 미국의 대일정책이 180도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전후초기의 일본억제에서, 일본지원으로 바뀐 것이다. 이후, 미국은 새로 일본을 무장시키는 길을 걷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