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한국/조선족

조남기(趙南起)

by 중은우시 2006. 2. 18.

조남기(Zhao Nan Qi)

 

1927년 4월생.

길림 영길 사람

1945년 12월 인민해방군 입대. 해방국후근학원지휘계 졸업. 상장(上將)계급

1947년 중국공산당가입

 

1945년 12월 - 1947년 12월 동북군정대학길림분교 반장, 길림성민운공작대원

1947년 12월 - 1948년 3월 길림성 연변지위 조직부 문서,간사

1948년 3월 - 1950년 10월 길림성 연변지위 총무과 부과장, 지위 비서, 중공 길림성위 정책연구실 연구원

1950년 10월 - 1952년 5월 지원군사령부 작전처 참모(6.25.참전)

1952년 5월 - 1957년 11월 지원군후근사령부 참모처 참모, 운수과 부과장, 운수과 과장

(1955년 - 1957년에는 해방군후근학원지휘계에서 학습, 후근학원 교원)

1957년 11월 - 1959년 지원군 후근부사령부 조직계획처계획과장

1959년 - 1963년 8월 길림성 연변군분구 정치부 부주임

1963년 8월 - 1964년 8월 길림성 연변군구 정치부 주임

1964년 8월 - 1966년 3월 길림성 연변군구 부정치위원

1966년 3월 - 1968년 길림성연변군구 제2정치위원

1968년 - 1973년 4월 "문화대혁명"기간중 비판받음

1973년 4월 - 1977년 4월 길림성 통화분구 정치위원

1977년 4월 - 1978년 10월 길림성군구 정치부 주임

1978년 10월 - 1979년 6월 길림성 연변군구 제1정치위원

1979년 6월 - 1984년 3월 길림성군구 부정치위원 겸 연변군구 제1정치위원

1984년 3월 -  1985년 3월 길림성군구 정치위원

(1978년 4월 - 1985년 3월 중공길림성연변자치주 제1서기, 주혁명위원회 주임, 주인민대표대회상임위원회 주임, 길림성 부성장, 중공길림성위 부서기, 성위 서기)

1985년 3월 - 1987년 11월 해방군총후근부 부부장 겸 부정치위원

1987년 11월 - 1992년 10월 해방군 총후근부부장, 총후근부당위 서기,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1992년 10월 - 1995년 7월 해방군군사과학원 원장

1998년 3월 제9회 전국정협 부주석

==================================================================================

 

1. 봄에 새순이 돋듯이

 

조남기 선생은 1927년 4월 20일 한국의 충청북도 청원군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인 조동식(趙東植)은 현지에서 반일운동을 계획하고 조직한 사람의 하나로 이름을 날렸고, 감옥에 갇힌 바 있었다. 후에 일본군의 박해를 피해, 조남기의 부친인 조용구(趙龍九)는 1939년 가을에 가족을 데리고 북쪽으로 떠났다. 1940년에 중국에 들어갔고, 길림성 영강현 차하에 정착하였다.

 

18세때, 조남기는 "길림민족해방동맹"에서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야한다는 사상의 영향을 받는다. 의연히 일어나 자위대를 구성하고 100여명의 자위대로 각 촌의 치안을 유지하여, 토비들을 놀라게 한다. 1945년 11월, 조남기가 이끄는 자위대는 정식으로 구위원회 지휘하의 지방치안무력부대가 된다. 조남기가 민주연맹의 식량이 부족한 것을 알고, 즉시 차하주위 8개촌의 조선족으로부터 25만근의 쌀을 모아서 부대에 전달해서 위기를 구한다. 이를 보고 차하구의 구장이었던 고산(高山)은 깜짝 놀란다. 그는 이 젊은이가 이렇게 재주가 있어, 사람을 놀라게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나중에 이 일은 동북민주연맹군 부사령관인 주보중(周保中)장군까지 놀라게 만들어, 상황을 파악한 후 그는 직접 조남기를 군정대학으로 보낸다. 이 때가 1946년 2월이었다. 조남기는 열심히 공부하여 중국어수준을 향상시켰다. 입학한 후 3개월만에 그는 중국어로 선생님과 대화할 수 있었고 그는 나중에 조선족반에서 한족반으로 옮겨와 공부할 정도가 되었다. 반년간의 노력끝에 그의 성적은 우수하여 전학교위 우등생이 되었다. 이것은 입학당시 중국어도 제대로 말못하던 사람으로서는 놀라운 성과였다.

 

1946년 11월 중공길림성위원회 민운부에서 우수학생으로 뽑힌다. 조남기는 1000여명의 학생들중에서 5명의 우수학생중의 하나로 뽑힌 것이다.

 

1946년 12월 조남기는 연변토지개혁공작대의 구성원이 된다. 당시 연변의 5개 현은 막 토지개혁을 시작하였고, 사람마다 토지 4-7무를 주었고, 사람마다 토지가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문제가 나타났다. 이전에 농민이 필요로 하는 당나귀와 큰 농기구는 지주와 "동양척식회사"로부터 빌렸는데, 토지개혁후에는 물건을 모두 개별 집에 분배하였고, 가축과 농기구를 보유한 농가는 무상으로 빌려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농기구가 필요한 사람은 임대료를 감당할 능력은 안되었다. 이것은 농업생산에 영향을 주었다. 상부에서는 하부에 토지상호지원조직을 만들도록 하였으나 효과는 미미했다.

 

조남기는 문제의 핵심을 발견했다. 그는 사람들이 비록 주인으로 되었지만, 그들의 인식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소농경제의 속박을 받고 있던 그들은 이익을 너무 중시했다. 토지개혁조의 책임자는 조남기의 분석을 들은 후 칭찬했고, 조남기로 하여금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여 해결방법을 찾도록 하였다. 당시 김시룡(金時龍)라는 젊은이가 조남기에게 "주식제, 집단경영을 실시하고 연말에 주식에 따라 이익을 나누자"는 건의를 한다. 조남기는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상부에 보고한 후 "주식제"를 실시했고 효과가 좋았다. 나중에 상부의 허가를 받아 시행하였는데, 단지 "주식제"라는 말은 삭제했다.

 

1942년 7월, 조남기는 중국공산당에 '영광스럽게' 가입한다. 공작조조장인 허명(許明)의 추천을 거쳐 그는 연변지위에서 근무한다. 그의 업무태도는 연변지위 서기인 손원(孫原)의 칭찬을 받고 빠른 시일내에 총무과장이 된다. 조남기가 지위기관의 사물을 관리할 때, 그는 매우 총명하게 일을 처리하여, 연변지위는 수입이 많은 기관이 된다.

 

나중에, 그는 길림성 정책연구실 연구원으로 승진한다. 그는 짧은 5년의 기간내에 세상일을 전혀 모르던 청년에서 현간급 간부로 성장한다. 직급의 빠른 진급은 전쟁시대에도 보기 힘든 것이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에서 내전이 폭발한다. 미국이 참전하고, 여러차례 비행기를 중국동북지방에 보낸다. 1950년 10월 조남기는 명을 받아 팽덕회 사령관을 따라 조선의 작전에 참가한다.

 

2. 뛰어난 정치적 업적

 

조남기가 지원군 총사령부 참모를 맡을 때, 모택동의 큰 아들은 모안영(毛岸英)과 한 방을 쓰고, 깊은 전우로서의 우의를 다진다.

 

그는 고위간부회의시, 조남기는 팽덕회에게 통역업무를 담당하였을 뿐아니라, 평상시에는 물자조달운송을 담당하여, 낮이고 밤이고 전선과 후방을 왕래했고, 여러차례 부상을 입었다. 1951년 6월, 상급의 수장이 일하면서 부상을 치료하는 조남기를 보고, "너의 임무가 바뀌었다. 지원군 후근부로 가라"고 한다.

 

지원군 후방근무사령관인 홍학지(洪學智)는 추천받은 조남기를 참모처 전근과에 운수소의 조장으로 임명한다. 철로, 자동차, 사람가축운송의 3가지 단계에서 자동차가 가장 관건이었다. 당시에는 수십년간 가장 큰 홍수를 맞이하여, 거의 모든 노면이 쓸려나갔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미군은 거의 절반의 공군력을 집중하여 철로를 중심으로 한 조선북부의 운송선에 대하여 전면적인 포격과 봉쇄를 실시했고, 지원군의 전후방의 연결을 차단하려고 하였다. 미군의 소위 "교살전(목죄어죽이기)"이었다. 미군이 중점적으로 봉쇄하는 "삼각지구"를 어떻게 돌파하고, "교살전"에서 이길 것인지는 더없이 중요한 일이었다. 조남기는 침식을 잊고 아이디어를 냈다. 결국 자동차를 이용하여 철로운수구역사이에 "교량"을 건설하였다. 장거리 운수, 조달방안을 진행하였고, 미군에 대하여 "반교살"작전을 시행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반교살전"의 기간중에, 조남기는 여러차례 친히 "삼각지구"의 현장에 나가서 작전을 지휘했고, 공동업무를 통하여 집단적으로 연구하고 운수임무와 능력에 따라 계획을 만들고 각 부서의 임무를 명확히 함으로써 업무에서 여러가지의 좋지않았떤 문제를 해결했다.

 

1952년 6월, 미군의 "교살전"은 무산된다. 조남기는 이 전투에서 독보적인 작용을 한다. 물자운송시 조남기는 현규정상의 수량이나 시한은 과학적이지 않다고 보고, 연구를 거쳐 "톤,킬로미터계산제"를 발명했다. 이것을 이용하여 자동차의 운수효률을 계산하고, 지원군의 자동차운수관리가 갈수록 정상적인 궤도에 올라섰다. 이후 "자동차운수책임제"를 사용하여 자동차운수과정에서의 연결운송문제를 해결하였고, 각 단계별 책임을 분명히 하였다. 나중에 그는 다시 세부적으로 계획을 짜서 "물자공급계획"과 "운송계획"을 세웠으며 모든 조선 전쟁터에서의 물자운송을 규범화시켰다.

 

1952년 10월 27일, 지원군 후근부는 지원군총사령부의 긴급임무를 하달받는다. 20시간내에 상감령의 임무를 부담하고 있는 15군에 2만개의 수류탄을 보충해주라는 것이다. 이런 일은 통상적으로는 6, 7일이 걸리는 일이었고, 가장 빨라야 3일이 걸렸다. 그러나 조남기는 릴레이식 운송방법을 사용하여 통상적인 방식을 깨고 낮에 차를 보내었는데, 이것은 미군이 생각지 못한 방식이었다. 봉쇄선을 뚫고 결국 임무를 완성할 수 있었다.

 

1953년 7월, 조선의 휴전으로 쌍방은 휴전서명지로 판문점을 정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큰 건축물이 없었다. 중국과 조선의 쌍방은 거기에 서명을 위한 큰 건물을 짓기로 하였다. 지원군 총사령부는 건물은 7월 26일 저녁에 완성해야 하고, 사전에 지어서는 안된다는 지시를 내린다.

 

임무는 또 조남기에게 떨어졌다. 그는 릴레이식 운송방법으로 중국내에서 이미 가공된 재료를 판문점까지 가져오고 하루밤만에 서명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뜰 정도의 서명건물을 완성하였다.

 

1955년 조남기는 해방군 후근학원 자동차본과반에서 공부한다. 성적이 우수하여 파격적으로 교원으로 선발된다. 그리고 총후근부에서 그동안의 경험을 집대성하는 편찬작업을 주재한다.

 

1958년 말에, 조남기는 연변군분구 정치부 부주임으로 임명받는다. 그는 군분구의 직능변화를 통하여 농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도와 많은 성과를 거두며 현지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다. 이 경험은 전 연변지구에서 확대시행된다.

 

3. 검은 구름이 드리우다.

 

1967년 봄은 바로 "문화대혁명"기간이다. 조남기는 당시에 연변군분구의 정치위원이었다. 그는 연변농촌에서 봄농사를 짓는 것을 보았는데, 각종 물자가 도착하지 않았다.당시의 각급 조직은 이미 파괴되었다. 마음이 급해진 그는 상부에 "전쟁대비식량을 농민에게 주어 종자로 삼도록 하는 방안"을 올린다. 그러나 허가를 밪디 못하자, 위험을 안고 직접 중앙에 전보를 보내서 4가지 응급방안을 제출하며, 이 방안은 중앙의 비준을 받는다.

 

1976년 3월, 심양군구의 명령에 따라, 연변에 "군관회"를 설립하고, 조남기는 부주임이 된다. 군관회 설립후, 첫번째 일은 길림성 부성장 주덕해(朱德海)를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문제였다. 주덕회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었고, 주은래 총리는 그의 일에 대하여 친히 묻고 그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후에 모택동의 조카인 모원신(毛遠新)이 연변에 와서 공개적으로 "주덕해 타도, 전연변 해방"의 구호를 외쳤다. 그리고 주덕해를 보호하던 조남기에게 칼끝을 들이댔다. 많은 사람들이 모원신과 같은 길을 걸으라고 권고할 때도 조남기는 여전히 자신의 뜻대로 했고, 주덕해타도에 동참하기를 거절했다. 그리고 주은래 총리의 지시에 따라 주덕해를 북경으로 보내고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모원신 일당은 사실을 왜곡하여, 주덕해를 북경으로 보낸 것은 그가 적에게 투항할 것이 두려워서라고 말하였다. 군중은 사안을 곡해하고, 주덕해는 다시 한번 타격의 대상이 되었다. 삶과 죽음의 순간에, 조남기는 자신의 안위는 돌보지 않고, 군중대회에서 사실대로 주은래 총리가 주덕해를 보호하라는 지시를 하였다는 것을 알렸다. 모원신은 크게 노하여, 조남기에게 대회에서 스스로의 말을 수정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조남기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모원신의 행위는 여러 군중의 염증을 유발시켰다. 모원신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군중에 단전, 단수, 양식공급중단의 조치를 취하였따. 조남기는 이를 듣고, 즉시 차량을 동원하여 군중에게 식량을 운송해싸. 이것은 모원신으로 하여금 더욱 화가나게 만들었고, 그는 조남기가 연변을 떠나 일처리하러 간 때, 칼끝을 그에게 직접 향하였다. 조남기가 군분구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타도대상이 되어 있었다.

 

이때에도 조남기는 굴복하지 않았다. 모원신이 주덕해에 대하여 음해하는 내용의 보고서에 반대의견을 제기했다. 대회상에서도 모원신에게 유력하게 반박을 제기하였다. 비록 모원신이 욕을 해댔지만, 조남기는 타협하지 않았고, 두 사람간의 모순은 공개화되었다.

 

나중에 군관회의 주요 지도자들은 모원신의 압력하에, 주덕해를 음해하는 자료를 중앙에 보냈다. 동시에 조남기에 대한 박해의 서막이 시작되었다. 모원신은 아무도 자기를 지지하지 않는 상황하에서는 인심을 가다듬기 어렵다고 보고, 조남기를 찾아가서 말했다. "네가 두 장의 대자보만 써라. 하나에는 주덕해가 너에게 관릭을 주겠다고 하여 너는 속아서 그를 보호하였다고 쓰고, 다른 한 장은 어떤 사람이 반란폭동을 책동하였고, 너에게 높은 관직을 주겠다고 하여 너는 폭동을 지지하였다고 써라. 이 두 장의 대자보만 쓴다면 너의 관직을 원래대로 복직시켜주겠다." 조남기는 그의 무료한 제안을 거절하였다.

 

모원신은 그에 대하여 깊은 원한을 가졌다. 1967년 8월부터 1968년 3월까지, 조남기는 집안을 압수수색당한 것이 60여회였고, 그의 딸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가장 가증스러운 것은 조반파들이 매번 권총을 조남기의 가족들에게 들이대고, 그들로 하여금 조남기와 선을 긋도록 요구했다는 것이다. 조남기의 처는 거의 정신착란을 일으킬 지경에 이르렀다.

 

4. 되돌아가는 길

 

1969년 하반기에 조남기는 매년 적자인 장춘발전설비창으로 내려보내진다. 그는 자포자기하지 않고, 공장에 가자마자 세심하게 연구하고, 생산과 관리상황을 시스템적으로 분석한 후 상세한 보고서를 써써, 성군구로 보낸다. 공장의 낙후한 면모를 일신하는 구체적인 건의를 하여, 상부의 주목을 받는다. 상부는 그를 보내 임무를 맡게 하고, 전적인 책임을 지도록 한다. 모원신이 심양군구에서 정치위원을 하고 있었으므로, 성군구는 조남기의 이름을 거론할 수 없었다. 조남기는 성군구 당위원회가 그를 쓰는 것이 이미 큰 위험을 안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명리를 구하지 않고, 공작조를 이끌고 공장에 가서 개혁을 시작한다. 그는 공장의 위로부터 아래에까지 정액관리의 생산제도를 시행하며, 공장의 기풍을 일신시킨다. 단지 3개월만에 공장은 기사회생한다. 그러나 장춘에서 소집된 변전설비창경험 소개대회에서는 조남기는 "막후영웅"이 될 수밖에 없었다.

 

1970년 7월, 성군구는 조남기를 부여유전에 보내서 혁명위원회 주임을 맡게 한다. 그리고 성군구는 심양군구에 건의하여 그를 성군구 정치부 부주임을 맡도록 한다.

 

조남기는 가볍게 임지로 또나서 자기의 능력을 새로운 업무에 쏟아부었다. 그러나 그의 부임명령은 계속 내려오지 않았다. 조남기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모원신이 중간에 수단을 부린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단위를 떠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1972년, 주은래 총리가 조선을 방문하게 되었고, 귀국길에 동북지구에 잠시 머문다. 여기서 주은래는 직접적인 지시를 내리게 되고, 모원신은 주은래 총리가 직접 지시를 내리자 어쩔 수 없이, 4월에 조남기를 통화군분구 정치위원에 임명한다. 그는 비록 직위는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통제받으며 사용되는 간부였다.

 

1976년 10월, "사인방"이 분쇄된 후, 조남기는 진정으로 새로운 삶을 얻었다. 그리고 1977년 7월 길림성군구의 정치부 주임이 된다. 후에 길림성위 제1서기 왕은무(王恩茂)가 친히 그를 찾아와 말했고, 그로 하여금 상황이 복잡했던 연변에 가서 업무를 하도록 지시한다. 조남기는 조직의 명령에 따라, 중공연변조선족자치주위원회 제1서기 겸 혁명위원회 주임이 된다.

 

조남기가 연변으로 돌아온 후, 예전에 그를 반대했던 사람들에게 보복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 그리고 좋지 않은 마음을 품고 그를 돌려보낸 사람들에게 후하게 대접하지도 않았다. 그는 "한 그릇의 물은 편평하다"는 방침에 따라 일을 처리했고, 잘못 처리된 사건 3만여건을 취소시켰다.

 

1979년 7월 1일, 조남기는 전국인민대표대회 민족사무위원회 부주임이 된다. 그는 적극적으로 민족지구의 입법업무를 수행하고, 상부의 지지를 받는다. 그는 80년 봄부터 <<연변조선족자치주자치조례>>를 초안하고, 자치조례에서는 3개의 기본원칙을 확정한다. 즉, 개성을 돌보고, 실제를 중시하고, 전체를 생각하는 것이다. 길림성의 제6차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제14차회의는 이 조례를 승인한다.

 

5. 제대로된 결과를 얻다.

 

1983년 3월, 조남기는 중공길림성위 서기가 되어 농업을 주관한다. 그가 임기를 시작한 후, 농업개혁을 진행하고, 생각하지 못했던 성과를 거둔다. 그 때 길림성은 전국에서 "양식년간증가폭 제일, 상품공급량 제일, 평균양식점유량 제일, 투입산출비율 제일"의 네가지 제일을 거둔다.

 

1985년, 조남기가 다시 승진할 때, 인민해방군은 대폭감원을 시작할 때였다. 3월 7일, 조남기는 총후근부의 부부장 겸 부정치위원이 되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임무를 시작한 후, 그는 먼저, 문혁기간동안 많은 간부들이 남겨놓은 문제를 처리한다. 그리고 몇가지 영향이 큰 개혁조치를 실시하는데, 군마장전환생산, 농장선환생산은 모두 성공을 거둔다.

 

1987년, 조남기는 익명서신의 "간첩혐의" 풍파에서도 정신을 흩트리지 않고, 계속 업무를 함으로써 그의 언행은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결국 그는 총후근부의 부장이 된다. 1988년 9월 14일 그는 상장의 계급을 받고, 제1차 17명의 상장중에서 그는 유일한 소수민족 출신이었다.

 

조남기가 부장을 할 때는, 신중국건립후 군사비용지출이 가장 곤란한 때였다. 양상곤 부조석은 군비가 이미 솥바닥을 드러냈다고 표현하였다. 상황은 긴박하였다. 신중한 고려를 거친 후, 조남기는 전군의 후근보장체제에 대하여 광범위한 개혁을 시행한다. 이번 개혁의 강도와 범위 및 조치의 세밀함, 시간적인 집중성은 군대의 후근역사상 전례가 없던 일이다.

 

당시 조남기는 "양보삼압(兩保三壓)"의 원칙하에 생활은 보장하고, 장비를 보장하며, 기본건설규모는 축소하고, 각종공비지급도 축소하고, 사회집단구매력도 축소하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정식으로 "양개 경사"정책을 선포한다. 즉, 경비분배는 반드시 단 이하의 부대로, 장비비로 경사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안은 군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서 조치에 힘을 받아 부대군비의 수지균형을 보장받는다. 이어 조남기는 다시 "연근"을 제안한다. 이것은 군병종의 부분별분할을 타파하는 것이다. 총부의 통일적인 조정하에 모든 병종에 통일적인 보장을 부여하는 것이다. 비록 많은 단위의 이익이 관련되나 일단 시행하자, 효과가 나타났다. 현재 중국의 삼군에 시행하는 것은 바로 "연근"의 보장체계이다. 1990년은, 전군의 농부업생산이 크게 발전한 일년이다. 그 때부터 부대생활은 스스로 보완하는 능력이 많이 향상되었고, 부식관리도 눈에 띄게 개선되었다. 1991년, 군대주거시설문제에 대하여 개혁을 시작한다. 군대퇴직간부가 군대내에 머무르는 역사적인 난제를 해결한다. 이와 같이 조남기의 공로는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1992년 10월 22일, 조남기는 군사과학원원장으로 부임한다. 그는 과학연구인원의 차량사용과 주거문제에 많은 힘을 들있다. 과학연구인원들이 마음놓고 편안하게 업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하이테트과학연구인원의 적극성을 높이기 위하여 그는 여러가지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중 핵심적인 것은 바로 연구인원들에게서 경쟁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연구인력에게 강심제를 주사한 것과 같았고, 연구인원들의 연구도 힘을 받았다.

 

1995년 7월 31일, 조남기는 퇴직하였다.

 

1998년 3월, 조남기는 전국정협 부주석이 된다. 그는 또 새로운 역할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여전히 열심히 일은 한다. 여러해동안 그는 사람들을 이끌고 남방의 여러개 성에서 주류생산을 조사한 적이 있고, 길림성에서 생태농업을 조사한 바 있고, 서북지방에서 민족문제를 조사한 바 있으며, 산동에서 농업산업화경영을 조사한 바 있다. 그 외에도 많아서 하나하나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중국과 한국 > 조선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족의 역사  (0) 2007.01.15
중국의 조선족 현황  (0) 2006.05.19
이덕수(李德洙)  (0) 2006.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