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진녕은 중국계로서는 최초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학자이고, 나이가 83세이며, 옹범은 양진녕에게 시집간 25세의 양진녕보다 58살 어린 부인이다. 두 사람에 관하여 홍콩의 <<아주주간(Asia Weekly)>>에서 쓴 글이 최근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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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굉지(李宏志) : 양진녕 부부가 화낼 필요가 있을까?
중국계로 처음 노벨상을 받은 양진녕 박사와 그봐 58세어린 부인 옹범은 최근 대만주홍콩기관, 광화신문문화센터 주임인 노평(路平)이 <<아주주간>>에 발표한 문장 "늙은 남편에 젊은 부부는 낭만적인 것이 아니다"는 문장에 화를 냈다. 양씨부부는 최신 <<아주주간>>에 처음으로 공동명의의 반박문을 실었고, 노평이 그들을 욕했으며, 그러나 그들은 욕해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고, 노평에게 반성과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노평은 사과를 거부했다.
호기심과 근원을 파보는 심리에서, 본인은 당사자 쌍방의 문장을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인내심을 갖고 자세히 읽어본 결과 양노선생은 진짜 이리 크게 화를 낼 필요가 없었다.
노평은 <<낭만인가 아닌가?>>라는 제목으로, 양씨부부 늙은 남편에 젊은 부인의 결합이 낭만적인이 아닌지에 의문을 나타냈다. 본인은 문장이 양씨부부를 비난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지 한 여자의 호기심어린 글일 뿐이고, 늙은 남편에 젊은 부인의 혼인생활이 어떨 것인지에 대하여 상상을 해본 것일 뿐이다. 더구나 말투도 우호적이고, 불경적인 언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결혼 1년여가 된 양진녕부부는 급히 <<아주주간>>에 공동으로 집필하여 반박하고, 자기들의 혼인생활은 고독하지도 않고, 두 사람의 관계는 노평이 말한 것과 같이 늙은 남편과 젊은 부인이 해결하지 못하는 고독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의 결혼은 천생배필이라고 하였다.
양진녕부부의 글이 실린 후, 노평은 즉시 <<낭만인가 아닌가? 의 속편>>으로 답변했다. 노평은 글에서 사과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그녀는 양진녕과 그 부인의 글을 읽어보았는데, 두 사람이 그녀의 문장의 내용을 오해한 것이므로 사과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늙은 남편에 젊은 부인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명함, 지위, 재산, 용모등 표면적인 아름다움을 행복에 이르는 탄탄대로라고 생각하는 것에 반대할 뿐이라고 하였다. 그녀는 이러한 세속적인 생각은 소위 낭만을 거짓으로 만들었으며, 사람의 밝은 눈과 인생의 진실에 대한 느낌을 은폐한다고 말하였다.
이번 분쟁은, 본인은 아무 것도 아닌 걸 가지고 문제삼았다는 생각을 한다. 현재가 법치사회인 것은 맞고, 사람들은 법률을 가지고 자기의 권리가 침해받지 않도록 할 수 있고, 양진녕선생이 자신과 처가 상해를 입었다고 생각하고, 떨쳐 일어나서, 자신에 대하여 글을 쓴 여자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자신의 권리인 것은 맞다. 그러나, 명망있고, 세계적인 과학계의 태두이며, 인생의 영욕을 모두 맛본 90을 바라보는 노인이 이런 자잘한 일에 마음을 상하고, 마음을 쓰는 것은 전혀 가치없는 일이고, 그렇게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노평 여사는 여자 특유의 심리와 글솜씨로 "멀리서 볼 때 백발과 홍안은 낭만적인 한 쌍이다" 그러나 실제는? 나이차이가 58세나 나므로 노 여사로서는 젊은 부인을 위하여 아쉬움을 얘기한 것이다. 그래서 "처에게, 이것은 일종의 오랫동안의 억악이었다. 그래서 유가문화의 가정구조는 숨은 폭력을 가지고 있다. 나중에 만족받지 못한 부인은 왜곡돈 욕망과 변태적인 심리로 집안을 장악하고, 자식들에게 이것저것 시키고, 무능한 늙은 짐승을 좌절시키게 되는 것이다." "눈앞에 작은 모기가 날아다니고, 시망막에 구멍이 나고, 무릎은 풍습으로 쑤시고, 잠자다가 밤중에 오줌이 마려워, 일어나나, 오줌은 잘 나오지 않는다" 이렇게 양노선생의 자존심에 불리한 언사가 노여사의 붓에서 쓰여졌다. 이런 모험적인 글을 쓴 후에 그녀에게는 골치거리와 이름을 날릴 기회가 같이 왔고, 이것이 오늘날 그녀에게 발생한 분쟁이다.
나는 이 분쟁이 어떻게 끝날 지 모르겠다. 둘다 기뻐할 것인가? 아니면 양패구상할 것인가? 여기서 후배로서 조심스럽게 양노선생에게 권해드린다. 건강에 유의하시고, 항항 웃으시며, 불쾌한 일은 잊으시고, 내일을 생각하고, 부부간에 화목하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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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평 : 낭만인가 아닌가?
얼마전에, 음악회에서 그 노과학자와 그의 신혼부인을 보았다.
사실, 내가 본 것은 그들의 뒷머리였다. 뭐라고 계속하여 속삭였다. 보기에, 젊은 부인은 계속 뭔가를 물어보고, 노벨상을 받은 노과학자는 참을성있게 대답하고 있었다. 작은 새가 사람에게 기대어 있는 것처럼, 부인은 대때로 머리를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음악회가 끝났을 때, 그들은 일어서서 통로를 따라서 출구로 걸어갔다. 사람들은 길을 양보하였고, 눈속에는 존경하는 빛이 역력했다. 남자들은 대개는 고무된 것같았다. 능력이 있으면 이럴 수 있구나. 여자들은 그녀의 빛나고 깨끗한 얼굴을 보았다. 이 순간 우열은 가려졌다. 그래, 젊음이 좋은 거야.
두 사람은 열손가락을 꼭쥐고 있었고, 통로 양쪽에서는 가볍게 말하는 소리가 들였다.
"아. 낭만적이야"
"여태껏 본 적이 없어. 정말 로맨틱하군!"
이런 눈빛이 모아지는 것이 세속을 배반한 것인가? 아니다. 내가 말허건데, 그들은 바로 세속에 부합하는 것이다.
멀리서 볼 때, 백발과 홍안은 낭만적인 한 쌍같았다.
그러나, 거의 진상은 가려져 있다. 특히 우리의 유가전통의 온유함과 후덕함은 말을 꺼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일본에서 작가들이 스스로 자신의 사생활을 글로 쓰는 것과는 다르다. 가와바다 야스나리나 곡기윤일랑등의 사람들처럼. 늙어서, 글로서 젊은 여자에 대한 심경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는다.
그러나, 유교전통의 도포아래에서도 늙은 남편에 젊은 부인은 사회에서는 오히려 존중받았다. 그들은 정상적인 사람들이었지, 사회의 반역자는 아니었다.
남성가장제의 권위는 사실 유가문화에서 계속하여 존중받던 가정모델이었다. 유가의 남편의 역할은 부친이나 형과 같았다. 그래서 그저 백지나 백옥과 같은 아무 것도 모르는 젊은 여자를 거느리는 것이다. 유치한 "유", 상청의 "청", 추기(젊은 기생)의 "추", 이것은 남성들에게는 큰 어려움 없이, 가볍게 콘트롤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유교문화의 여성에 대한 교육은 부덕을 중시하는데 있다. 소위 부덕, 부공, 부언은 모두 여자를 교육하여 스스로의 자주성을 포기하고 스스로의 지능능력을 유치한 어린 시절에 묶어두는데 있다.
부인에게, 이것은 오랫동안의 스트레스가 된다. 그래서 유가문화에서의 가정구조는 숨은 폭력을 가지고 있다. 만족받지 못하는 부인은 왜곡된 욕망과 변태적인 심리로 집안을 장악하고, 자녀에게 이것저것 시키며, 그 무능한 늙은 짐승을 좌절시킨다.
진상은....
늙은 남편에 젊은 부인은 어떻게 지낼까?
눈앞에 작은 모기가 날아가는 것같고, 시신경에는 구멍이 나고, 무릎에는 신경통이 쑤시고, 밤중에 자다가 오줌누러 일어나서 서보지만 오줌발은 잘 나오지 않고...
나이든 남자의 밤은 사실 예이츠의 시편 "비진틴으로의 항해"와 같을까?
A tattered coat upon a stick (막대기에 걸린 찢어진 코트)
그리고 서로의 체온으로도 고독을 해결할 수 없다.
Iris Murdoch의 남편인 John Bailey는 그들의 만년의 생활을 그린 책(Elegy for Iris)에서 "우리는 서로의 몸에서 고독을 보았다"고 썼다. 양진녕이 옹범을 만난 것은 노년의 고독이 청춘의 고독을 만난 것이다. 둘을 합하면, 아마도 소설가 마르케스가 말한 "백년간의 고독"이 아닐까?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은 또한......두 사람의 두개 갑자(60년)에 걸친 시대이다. 시대감각은 뛰어넘기 어려울 것이다. 그의 생명은 이미 최후의 순간이다. 그들이 앞에 주요하게 보낸 시기가 서로 완전히 다르고, 그녀는 심지어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마음이 서로 통하여 보살펴주고 같이 울어줄 수 있겠는가?
비록 두 사람이 때때로 안온한 때도 있을 것이나, 그것이 고양되거나 찬란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저녁 황혼의 마지막 빛 아래에서, 담담한 슬픔을 안고, 혹은 기쁨으로 인하여 슬퍼지거나, 슬픔으로 인하여 기뻐진 것일 것이다.
문제는 누가 우리에게 이런 진상을 얘기해 줄 것인가?
세상이 흘러가는 일에 대하여, 중국사람들은 금상첨화를 좋아했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선물",은 현재상태로 볼 때, 이 큰 인물의 만년의 홍수첨향(예전에 선비가 글을 읽을 때, 젊은 여인이 옆에서 같이 있어주던 것)이고, 전통적인 노년남자의 생명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마지막을 장식하는 꼬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어떤 신화를 강화하는 것이 아닌가 신경쓰인다. 속세의 남녀를 이끌고, 가장 전통적인 목표를 추구하도록 하는 것은 아닐찌. 어떤 사람들은 그들은 용기가 넘친다고 하는데, 이건 듣는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말이다.
사실, 그들은 전통적인 모델에 따라 만나고 사귀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재주있는 남자와 용모있는 여자의 만남이고, 어떤 점에서 보면 각자 얻고자 하는 것을 얻은 것이다. 사실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은 아니다. 고난끝에 얻어지는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도 아니다. 과정도 놀랄만한 것도 없다. 나중의 혼례는 과연 성대했다. 만일 당사자들이 용기있다고 한다면 그와 그녀의 용기를 합친다고 하더라도 결혼식에 참석했던 한 사람의 용기만도 못할 것이다.
분명히 전통적인 틀 속에서의 서로 얻을 것을 얻은 것인데, 겉으로는 낭만이고, 겉으로는 용기....
내가 더욱 걱정하는 것은 이 낭만적인 신화의 영향은 오래갈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여인들이 계속하여 피상적인 청춘을 그 자체로서 할것인가말것인가의 유일한 표준으로 삼을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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