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1978년에 천재소년들을 모아서 중국과기대학에 소년반 대학생을 모집한 바 있다. 당시의 소년반 천재아동들은 어떤 사람은 출가하고, 어떤 사람은 정신병에 걸렸고, 어떤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1978년에는 모든 중국 신문, 잡지, 티비는 녕박을 보도했다. 보도에 의하면 녕박은 2살반에 이미 30여수의 시사를 외웠고, 3살 때 100개의 수를 세었고, 4살 때 400여자의 한자를 배웠으며, 5살 때 학교에 들어갔고, 6살 때부터 <<중의학개론>>을 배웠고, 중약을 사용하였고, 8살에는 바둑을 두고, <<수호전>>을 읽었다. 13살에는 방의 부총리와 두 판의 바둑을 두어 모두 이겼다. 하룻만에 안경을 낀 신기한 소년은 전 국가가 다 알게 되었다.
오랜 기간이 흐른 후 기자가 방문하였을 때, 녕박은 말하기를 자기는 시대의 산물이었다. 지금 소년반의 학생들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절대로 소년반에 들어오지 않겠다고 한다.
녕박은 11살 때 사춘기에 접어들었다. 당시의 대부분의 학생들보다는 조숙했다. 그는 상대적으로 성숙했고, 공부에는 같은 나이의 학생들보다 스스로를 잘 통제했다. 그러나 발육과 나이와의 차이로 그는 항상 슬프고 우울하였다. 그의 키는 작았고, 여자들에게는 매력이 없었다.
그는 재능이 많고 흥미를 느끼는 범위가 넓었다. 바둑, 중의에 뛰어날 뿐아니라 '일요일' 시사의 구성원이기도 하였다. 신동들이 모인 소년반에서도 녕박의 총명정도는 다른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낼 정도였다. 그러나, 그가 낙제한 과목수는 다른 학생들보다 더 많았다. 그러나 외부의 감탄과 찬사는 계속되었다.
입학 1년후 소년반 학생들은 과를 선택하여야 했다. 녕박은 왕혜적 교수에게 "과기대에는 제가 좋아하는 과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왕혜적은 녕박을 도와 보고서를 써서 "남경대학으로 옮겨 천문학을 공부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이것은 그가 처음으로 과기대를 떠나고자 시도한 것이었고, 깨끗이 실패한 첫번째였다. 왜냐하면 과기대는 이 유명인사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천문학에 대한 동경이 실패로 끝난 후, 녕박은 방향을 바꾸어 "성상학"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소년반을 떠난 후 16년이 지나서 녕박은 당시의 가장 큰 고통은 여론에 의하여 과장된 것이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나에게 일곱 걸음내에 시를 지으라고 요청했다" 그는 "나는 당시에 세상 일을 모르는 어린아이였고, 오랫동안 받은 교육은 순종하고 극기복례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통은 항상 마음 속에 삭였다. 그 때 나는 개성을 억누르면서 생활했다. 신동은 많은 생활과 오락의 권리마저 박탈당하는 것이었다"
1982년 그는 첫번째로 석사과정을 신청한다. 그러나 신청후에 시험을 포기한다. 다음 해에는 신체검사까지 마친다. 그후에 포기한다. 세번째는이미 시험증도 받았으나 시험장에 들어서기 직전에 포기한다. 이 세번째에는 한 선생이 그를 붙잡아 시험장에 들어가게 하려 했으나, 그는 더 핍박하면 도망치겠다고 소리친다.
그는 계속 도망치고자 하였다. 물리학과에 대한 연구는 거의 하지 않았고, 많은 시간을 바둑, 철학과 종교에 집중했다. 그는 89, 90, 91년 세번 토플을 쳤지만 제대로 점수가 나오지 않았다. 1988년 결혼 후 그는 기공을 연마하고, 채식을 했다. 1993년에는 처와 말다툼을 벌인 후 집을 나가 반달동안 들어오지 않은 적도 있다. 이후 2년간 그는 장사를 하기도 하였는데, 해남도까지 간 적이 있다.
1998년 녕박은 중앙텔레비전의 "실화실설"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신동교육에 대하여 말하는 시간이었다. 그 때 그는 프로그램중에 자주 끼어들었는데 말이 빨랐고, 감정이 격앙되어 있었다. 격렬하게 신동교육을 비판했다. 주위의 관중들은 때때로 웃는 소리를 내었다. 많은 젊은이들은 이미 그가 그 유명한 신동 녕박이라는 것을 모를 정도였다.
2002년 녕박은 오대산으로 가서 출가한다. 그러나, 과기대 사람들에게 붙잡혀서 학교로 돌아간다. 또 실패한 것이다.
다음에, 그는 출가에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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