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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중국의 명소 (남부)

적벽(赤壁)의 위치

by 중은우시 2006. 1. 11.

적벽은 삼국연의에 나오는 유명한 옛 전쟁터이다. 두 영웅이 자웅을 겨루어서, 주유가 조조의 20만대군을 격파한 바로 그곳이다.

 

기록에 따르면 동한 건안13년(208년)겨울, 조조는 친히 20만대군을 이끌고 오를 치러갔다. 손권은 제갈량의 설득하에 유비와 연합하여 작전을 전개하였다. 손권과 유비군은 조조군이 수전에 약한 점을 이용하여 화공을 통하여 조조군을 대파하였다. 이 전투로 손권유비군은 적은 군사로 많은 군사를 이기고, 지혜로써 강적을 격파한 사례를 남겼으며, 위,오,촉의 삼국이 정립하는 형세를 이끌어냈다.

 

당나라때 시인 두목은 일찌기 적벽에 관한 시를 지었는데, 그는 황강(黃岡, 古黃州)성밖의 적비기(赤鼻磯)를 적벽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생각하고 썼다. 북송의 소동파도 황주로 쫓겨나서 부사를 지내고 있을 때, 황주의 적비기를 적벽전장터로 생각하였는데, 그것은 적비기가 암벽이 수직으로 솟아 있고, 붉은 색이어서 불에 그슬린 것같았기 때문이다. 소동파는 여기에서 후적벽부와 적벽회고라는 사를 지었다. 후세에 이 황강의 적벽기를 문적벽(文赤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문적벽은 적벽전투가 일어난 적벽은 아니다. 왜냐하면 번강의 상류에 위치하지도 않았고, 대강의 남쪽에 위치하지도 아니하여 사서의 기록에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적벽전투가 일어난 적벽, 통칭 무적벽(武赤壁)은 어디인가? 이에 대하여도 이견이 존재한다.

 

하나는 현재의 호북성 가어현 동북쪽이라는 설이다. 왕력이 주편한 고대한어와 주동윤이 주편한 중국역대문학작품선에서는 모두 이런 입장을 취한다. 거슬러 올라가면 대청일통지에서 수경주를 인용하고 있는데, <<수경주(水經注)>에는 "적벽산은 백인산의 남쪽에 있다. 가어현의 동북이며, 강하와 접경지역이고, 위로가면 오림이 이백리이다"라고 적혀 있다는 것이다. 이 설은 청나라의 유명한 지리학자 양수경도 지지하고 있다.

 

또 하나는, 호북성 포기현 서북이라는 설이다. 음법로가 주편한 고문관지역주에는 "적벽은 현재 호북성 포기현 서북, 장강 남안이다."라고 되어 있고, 원화군현도지에도 "적벽산은 포기현 서쪽 120리로, 북쪽은 대강에 임하여 있고, 그 북안은 바로 오림인데, 주유가 황개를 이용하여 계책을 세워, 조조의 배를 불태워 패주시킨 곳이다"라고 적고 있다. 호삼성이 저술한 자치통감에도 이렇게 얘기한다.

 

두가지 설중에서 어느 것이 더욱 실질에 부합하는가? 사람들은 대부분 포기현 서북이라는 설이 더 믿을만하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단순이 원화군현도지를 지은 이길보가 적벽대전때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대의 사람이라는 것뿐이 아니라 더 이른 형주기에도 비슷한 기재가 있으며, 이후의 계속되는 발굴에서도 이에 부합되는 대량의 물품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남조시대에 유송 원가연간에는 적벽에서 적벽대전에 참전했던 동오의 대장군 여몽의 묘를 발견했고, 유송 대명 7년에는 포기현에서 동로고가 출토되었다. 같은 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강하에서 배를 타고 포기를 지나는데, 석애에 적벽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고, 강에서 노인에게 불어ㅗ니 오림에는 열화강이라는 곳이 있는데, 주유공의 묘가 있고, 논에서 화살촉이 나오는데 길이가 1척이며, 끊어진 창이나 부러진 극도 나오니, 주유가 조조군을 물리친 곳이 틀림없다는 기재도 있다.

 

적벽의 건너편인 오림에는 1973년에는 동한말기의 동마등이 발견되었고, 건안8년이라는 기재가 있는 기왓장도 발견되었고, 동한시대의 동경, 도자기와 화살등이 발견되었다. 1976년에는 적벽산의 아래 1미터 깊이에서 침몰한 배위에서 철환, 철정, 동경등이 발견되었다. 같은 해 적벽산위에서는 동, 철, 옥으로 만든 허리띠장식이 각각 1개씩 발견되었다. 1977년에는 적벽산과 남병산에서 각각 동촉이 발견된다. 1987년 3월 7일에는 적벽 금란산의 동오시대 묘에서 제갈량이 설계제조한 동노기 1개가 발견된다. 동시에 동한의 오수전과 동경이 발겨뇌었다. 같은 해 4월 9일에는 동오의 무관 진문화의 묘에서 더 좋은 동노기가 발견되고, 거울과 강검도 발견되는등 37건의 문물이 발견되었다. 이런 점에 비추어보면 포기현이 바로 적벽대전이 일어난 전장터라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