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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순치제)

순치제(順治帝)의 즉위에 얽힌 이야기

by 중은우시 2005. 7. 24.

숭덕8년(1643년) 8월9일 청태종이 사망하였다. 청태종의 사망으로 다시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시작되었다.

 

당시의 실력자들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예친왕(禮親王) 따이샨(代善). 예친왕은 누르하치 사후에 실력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이유로 홍타이시에게 황제위를 양보한 바 있다. 실력으로도 양홍기를 장악하고 있어, 3기(양황기와 정남기)를 장악한 황제 본인을 제외하고는 가장 막강한 실력을 가졌다. 그러나, 이때 따이샨의 나이가 이미 63세였고, 수년간의 전투로 체력이 소모되었으며, 나이가 들면서 조정에 점차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스스로 황위를 차지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태도는 차기황제를 결정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둘째, 숙친왕(肅親王) 하오거(豪格). 하오거는 1609년생으로, 홍타이시의 첫째 아들이다. 모친은 계비인 우라나라씨(烏拉那拉)이다. 성격이 용감하고 무를 좋아하여 어려서부터 부친을 따라 여진족을 통일하는 전투에 많이 참여하여 공이 높았다. 홍타이시의 직계인 양황기와 정남기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셋째, 예친왕(睿親王) 뚜얼곤(多爾袞). 뚜얼곤은 누르하치의 14째아들로, 홍타이시의 동생이다. 모친은 누르하치 사후에 순장된 대비 아바하이이다. 스스로 상백기의 기주이며, 동생인 뚜어뚜오가 정백기의 기주이므로 양백기의 지지를 받고 있다.

 

당시의 8기의 현황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양백기. 누르하치 생전에 스스로 양황기와 상백기를 직할하였고, 홍타이시가 정백기를 통할하였다. 그런데, 누르하치 사후 홍타이시가 황제에 오르면서 자신이 통할하던 정백기의 사람을 양황기로 옮기고, 기존의 양황기의 사람을 양백기로 옮겨버렸다. 이로 인하여, 누르하치가 제위에 있던 시절에 황제의 직할기였던 양백기는 홍타이시가 제위에 오른 이후 지위가 형편없이 떨어지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원래의 황제직할부대의 영예를 찾으려는 양백기의 입장은 단호하였다. 양백기출신이 황제가 됨으로써 양백기가 다시 황제직할부대가 되는 것이었다. 이 때 정백기는 뚜얼곤의 동생인 뚜어뚜오가 이미 장악하였고, 상남기는 뚜얼곤에 의하여 완전히 장악되어 있었다.

 

양황기. 양황기는 원래 홍타이시가 관장하던 정백기의 인물을 중심으로 재편되었으며, 청태종의 직할기이다. 양황기에 속해 있는 만주족들은 양황기내에서 차기황제가 나와야 자신들이 황제직할로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청태종의 아들중에서 황제가 나올 것을 주장하게 된다. 양황기의 8대신이라고 불리우는 투얼거(圖爾格), 쑤오니(索尼), 투라이(圖賴), 시한(錫翰), 공아다이(鞏阿垈), 아오바이(鰲拜), 탄타이(譚泰), 타잔(塔瞻)은 하오거의 집에 모여 "하오거를 차기 황제로 하고, 푸린(福臨)을 태자로 한다"는데 합의한다.

 

양홍기. 양홍기는 따이샨이 통할하고 있는데, 정남기는 직접 통할하고, 상남기는 자신의 장자인 위에투오에게 관할하게 한다. 양홍기는 하오거와 뚜얼곤의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중립을 유지하는 편이다. 후에 푸린을 옹립하는 중심역할을 하게 된다.

 

양남기. 양남기중 정남기는 원래 누르하치의 5째아들인 망구타이가 관할하였는데, 망구타이가 죄를 지어 삭탈된 후 정남기는 청태종이 직할로 관할하게 된다. 상남기는 원래 아민이 관할하다가 역시 아민이 유폐된 후 지얼하랑이 관할하게 된다. 정남기는 청태종의 직계이므로 하오거의 편이었고, 지얼하랑의 상남기도 양황기의 입장에 가까운 편이었다.

 

이상의 세력을 보면, 뚜얼곤은 양백기를 장악하고 있고, 하오거는 양황기와 양남기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따이샨의 양홍기는 중립을 취하면서 후에 푸린을 옹립하는 쪽에 서게 된다.

 

한편, 청태종은 1명의 중궁과 4명의 비를 두었는데, 중궁은 몽고족인 보얼지지터씨인데, 자손이 없었고, 첫째 비인 관조궁(동궁) 신비는 중궁인 보얼지지터씨의 조카로서 역시 자손이 없었다. 둘째 비인 인지궁(서궁) 귀비는 나무종씨로 원래 몽고 차하얼부의 임단한의 처였는데, 차하얼을 함락시킨 후 자신의 비로 삼았다. 귀비와의사이에는 보무보궐이라는 아들을 두고 있다. 셋째 비인 연경궁(차동궁) 숙비는 바트마,차오로서 역시 몽고 임단한의 첩이었는데, 청태종이 비로 삼았다. 넷째는 보얼지지터씨로써 중궁의 조카이고 신비의 동생이며 후일의 유명한 효장태후이다. 아들로 푸린이 있다. 청태종의 아들중에서 하오거는 계비 소생고 정식 비로 봉해지지 않았으므로 모친의 지위는 낮은 편이다. 지위로 따지면 푸린과 보모보궐이 정비 소생이므로 귀하지만, 당시 나이가 5살, 2살에 불과하였다.

 

하오거의 당시조건으로서 유리한 점은 첫째, 청태종의 장자라는 점이며, 당시 35세(숙부인 뚜얼곤보다도 3살이 많았다)로 활발하게 활동할 나이였다. 둘째, 재능이 출중하였다. 역사기록에 의하면 용모가 범상하지 않았고, 활과 말을 잘 다루었으며, 과단하고 지략이 있었다고 한다. 셋째, 오랜 전투에서 전공을 쌓아왔다. 넷째, 청태종이 직접 관장하던 양황기, 정남기의 지지를 받았고, 특히 양황기의 대신들은 죽음으로써 보호하겠다는 서약을 했다. 다만, 약점이라면 하오거는 모친의 신분이 미천하였고, 팔기중의 하나의 기주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뚜얼곤의 당시조건으로서 유리한 점은 첫째, 누르하치의 14째아들로서 청태종의 동생이며 당시 나이가 32살로 한창 활동할 나이라는 것이다. 둘째, 누르하치의 총애를 받았으며 일찌기 누르하치가 "뚜얼곤을 차기 황제로 세우되, 나이가 어리니 따이샨이 섭정을 하라"고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따이샨이 황위를 홍타이시에게 양보하였다. 셋째, 뚜얼곤형제가 정백기와 상백기의 기주였다. 넷째, 당시의 4대친왕, 3대군왕중 3명이 뚜얼곤의 형제이다. 4대친왕은 하오거, 뚜얼곤, 따이샨, 지얼하랑이고 3대군왕은 아지거, 뚜어뚜오, 아다리(따이샨의 손자)이다. 다섯째, 뚜얼곤은 여러번 출정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뚜얼곤의 약점은 아들이 아니라 동생이라는 점, 양황기가 결사반대한다는 점이었다.

 

 

황위계승전은 상당한 대립끝에 결국 차기황제를 푸린(福臨)으로 하고, 뚜얼곤과 지얼하랑이 섭정(攝政)하는 절충안이 마련되고, 이러한 안에 따라 푸린이 순치제로 등극하나, 실권은 뚜얼곤이 장악하는 방향으로 정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