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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손책(孫策)의 곤경: 후계자문제

by 중은우시 2025. 5. 27.

글: 비정상역사연구실(非正常歷史硏究室)

강동 손씨의 출발점은 매우 미약했다. <오서(吳書)>에서 강동손씨가 "대대로 오나라의 벼슬을 지냈다(世仕吳)"고 적었는데, 이는 얼굴에 금칠을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손씨의 흥기를 이끈 인물인 손견(孫堅)은 일찌기 매우 용맹했고, 17살때는 혼자서 강적(江賊)들과 싸우면서 심지어 도망치는데 늦은 1명은 칼로 베기도 했다. 이런 담량은 고대에도 절대로 비범하다고 할 수 있다.

그후 손견은 3곳을 돌아다니면서 현승(縣丞)을 맡는다. 그리고 항상 그의 곁에는 고향 오군(吳郡)의 사고치기 좋아하는 소년들이 모여 있었다.

소위 '사고치기 좋아하는 소년'은 한나라말기의 난세에 사회의 백수들이다. 이를 보면, 황건적의 난 이전에 손견은 평소에 고향에서 싸움을 좋아하는 무리들과 어울려 다녔다. 이런 인물의 경우 명성이 좋으면 "협(俠)"이고, 명성이 나쁘면 "적(賊)"이다. 본질적으로는 주류질서를 벗어나서 돌아다니는 사람을 가리킨다.

다른 한편으로 손씨집안은 자손이 많아서, 종족세력도 작지 않았다. 예를 들어, 황건적의 난을 평정할 때, 그의 부대의 한 부분은 그와 함께 고향에서 나와 돌아다니던 사람들이었고, 다른 한부분은 동생 손정(孫靜)이 데리고 온 손씨종친과 고향사람들이다.

손정을 제외하고 손씨집안에는 손분(孫賁), 손하(孫河), 손향(孫香)등도 한나라말기에 활발하게 활동한다. 이를 보면, 손씨는 당시 강동지방에서 전형적으로 지위는 높지 않지만, 인구는 흥성하고, 기풍은 용맹하며, 내부적으로 단결이 잘되는 종족이었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손견은 자신의 역량으로 오정후(烏程侯)에 봉해진 것이지만, 결국, 손씨는 강동의 본토에서 지위가 미약한 집안이었으며, 각지방의 제후들 앞에서는 별 볼일없는 집안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남양(南陽)에 도착한 후, 낙양에서 도망쳐오고 아무런 기반이 없던 원술(袁術)에게 그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집안이 이들보다 못한 상황하에서 이들과 평기평좌(平起平坐)하려면 결국 자신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야 했다.

그리하여, 손견은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계속하여 정벌에 나서고, 모든 노력을 다하여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킬 기회를 잡았다.

손견의 명성을 천하에 떨친 것은 바로 동탁(董卓)과의 전투에서였다. 손견은 원술의 기치를 내걸고, 반동탁연맹에서 유일하게 서량군(西凉軍)에게 승리를 거두고 낙양에 진입한 부대였다. 옥새를 획득했을 뿐아니라, 손견의 명성을 천하에 떨칠 수 있었다.

제후들이 막혀서 전진하지 못하고 있을 때, 손견만이 싸워서 이긴 것이다. 그것은 손견의 용맹함때문이고, 그가 전투에서 앞장서서 돌진하였기 때문이다.

용맹함은 사기를 북돋울 수 있지만, 또한 그 자신은 사지에 빠진다.

초평3년(192년), 손견이 단기필마로 산속으로 도망친 황조(黃祖)를 뒤쫓다가, 숨어서 쏜 화살에 맞고 사망한다. 손씨일족은 모조리 원술에게 귀속되고, 손책(孫策)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손책은 용맹하고 과감한 것이 부친보다 더 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명사들과 교분을 맺는데 있어서 부친보다 훨씬 잘했다.

이를 통하여, 그는 부친의 옛부하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고, 몇년이후에는 강동이라는 인신입명(安身立命)의 땅을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그가 관도(官渡)전투에서 허도(許都)를 기습할 때, 암살을 당한다. 예전 부친때와 마찬가지로.

이제 남은 목숨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여겼을 때, 그는 하루빨리 손씨집안을 계속 이끌 후계자를 결정해야 했다.

그렇다면, 누가 제일 적합할까?

원래 권력은 부친에게서 아들로 전해지는 것이다. 손책에게는 아들 손소(孫紹)가 있었는데, 지금 손소는 겨우 어린아이였고, 사람들을 복종을 이끌어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동생들 중에서 고를 수밖에 없었다.

장소(張昭)는 이렇게 건의한다. 손익(孫翊)에게 손책과 같은 모습이 있으니, 셋째동생 손익에게 넘겨주는 것이 좋겠다고.

손익은 당시 나이 16살이었고, 손책과 마찬가지로 용맹하고 과감했다. 그는 일족을 이끌고 천하를 다투는데 적합했다. 그러나 손책은 고개를 흔들었다.

비록 손책이 자신과 닮았지만, 그것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경솔하고 미리 대비하는 측면에서 문제가 있었다. 그뿐 아니라, 손익은 용감하고 싸우기 좋아하고, 성격이 강인한 외에 손책과 같은 인격적 매력이나 호소력이 부족했다. 자칫하면 전투에서 마구잡이로 돌진하다가 죽을 터였다.

전쟁터에서 죽지 않더라도, 허공(許貢)의 문객이 손책조차 암살하는데, 몰래 손책을 암살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를 선택할 수가 없었다.

손책이 남긴 강동은 언제든지 분열되고 내분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손씨는 강동에서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한걸음 한걸음 발전하여 이제 단양, 오군, 회계, 예장의 4개군을 장악했다. 이는 순수히 무력에 의존한 것이고, 단기간내에 이렇게 넓은 땅을 차지하다보니 내부문제가 심각했다.

본토의 호족세력들 예를 들어, 엄백호(嚴白虎), 조랑(祖郞)같은 세력이 강동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리고 수시로 원술, 진등(陳登)등과 결탁하여 손씨에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다. 자칫하면 손씨의 세력은 무너질 수 있다. 그래서 손책은 시종 강동의 대족들과 서로 견제하는 상태에 있었다.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손책은 강동에서 명망있는 사람들을 도륙할 수밖에 없었다. 고대(高岱)를 죽이고, 우길(于吉)을 죽이고, 허공(許貢)을 죽였다. 사람들을 많이 죽이다보니 결국은 자신도 죽고 만다.

그외에 손씨내부도 안정되지 못하고 있었다. 손책이 다시 집안을 일으킬 때 의지한 것은 외삼촌과 당형(堂兄)등이 가담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단기필마로 온 것이 아니라, 부대를 데리고 왔다.

손견이 죽은 후, 원술은 손씨를 여러 갈래로 나눠버린다. 그중 손분(손책의 당형)은 새로운 손씨의 우두머리가 되어, 손견의 예주자사(豫州刺史)의 관직을 물려받는다. 손향(손견 종제의 아들)은 독립하여, 여남태수(汝南太守)가 된다. 오경(吳景, 손책의 외삼촌)도 독립하여 단양태수(丹陽太守)가 된다.

나머지 부대들 주치(朱治), 정보(程普), 황개(黃蓋), 한당(韓當)등은 모두 원술 휘하의 장수가 된다. 그때 손책의 곁에는 겨우 손하(孫河), 여범(呂範) 두 사람 뿐이었고, 심지어 독립하여 군대를 이끌지도 못하고 있었다.

손분, 오경이 힘을 합쳐도 유요(劉繇)를 격패하지 못하자, 손책이 스스로 나서서, 손향을 제외한 손견의 옛부하들을 끌어모아, 일거에 강동4군을 차지한다. 그중 예장은 손분에게 나누어주어 태수(太守)에 앉힌다.

손분은 손책이전의 우두머리였으니, 손책으로서는 그를 경계해야 했다. 그리하여 계속 사람을 예장으로 보내어 자신의 관할범위내에 두고자 했다.

이들은 모두 손책에게는 복종하지만, 손책의 아들들이 이들로부터 복종을 받아낼 수 있겠는가? 만일 손익이 후계자가 된다면 그가 손분과 같은 늙은 여우를 어떻게 상대할 수있을까?

그래서, 손책의 후계자로서 가장 중요한 점은 손씨의 강동에서의 통치를 공고히 하는 것이지, 군사확장은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아들 손소는 가장 먼저 배제된다. 그리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용맹하기만 한 손익도 배제된다. 그러고 나자 남는 것이 둘째동생 손권(孫權)이었다.

손권도 손씨집안사람으로서 호랑이도 직접 잡을 정도로 용맹한 측면이 있지만, 그는 다른 형제들보다는 절제할 줄 알았다.

그리고, 손권은 어려서부터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해서 학식이 비교적 높았다. 15살때부터 양선장(陽羨長)을 맡아, 하층에서의 관리경험을 축적한다. 이런 후계자는 성격이 강인하고 화를 잘 내는 손익보다 강동대족들의 호감을 얻는데 훨씬 유리했다.

그리고 손권은 손익보다 2살이 많았다. 서사초창(庶事草創), 국뢰장군(國賴長君). 이 점을 그도 잘 알았다. 이는 또한 손씨가 강동에서 급히 해야할 일이었다.

전투는 스승없이 혼자서 깨닫는 경우는 드물다. 군사능력은 항상 배워서 익혀야 한다. 그리고, 손책은 첫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나중에 강동을 휩쓰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손책은 자신의 동생도 나중에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손권을 후계자로 삼으면서, 손책은 직접적으로 말한다: "강동의 사람들을 끌어모아, 양진의 사이에서 결전을 벌이면서 천하를 다투는 데는 네가 나보다 못할 것이다; 그러나, 현명하고 능력있는 사람을 기용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강동을 지키는데는 내가 너만 못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손권이 후계자가 된다.

그리고 임종전에 손권은 다시 한 마디 당부를 한다; "정부불극첩(正復不克捷), 완보서귀(緩步西歸), 역무소려(亦無所慮)" 이 말을 해석하면, "설사 승리를 거두지 못하더라도, 천천히 서쪽으로 가라. 그러면 크게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강동의 서쪽에는 유표(劉表)가 있다. 그리고 유표는 손책형제와 부친을 죽인 불공대천의 원한이 있다. 손책이 손권에게 부친을 죽인 원한이 있는 원수에게 의탁하라고 한 것인가? 그럴 리는 없다.

만일 "서쪽으로"라는 말을 "북쪽으로"라고 해석하면 들어맞는다. 강동(江東)과 마주하고 있는 곳은 장강을 건너 북상하는 것이다. 그 뜻은 조정에 의탁하여 손씨혈맥을 보존하라는 말이다.

손책은 당연히 손권이 자신이 천신만고끝에 닦은 기업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랬다. 그러나 미래의 일을 누가 정확히 예측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손책은 손권에게 최악의 순간에 어떻게 할 것인지까지 얘기한 것이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그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이후의 사정을 보면, 손책의 판단이 상당히 정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손책이 죽자마자, 손정의 아들 손고(孫暠)가 권력을 빼앗고자 한다. 손분의 동생 손보(孫輔)는 조조와 암중으로 내통하고, 손익, 손하(손견의 조카)가 암살당한다.

연속되는 반란으로 강동의 호족들도 서서히 움직임을 보인다. 만일 단순히 진압만 해서는 더욱 큰 갈등이 폭발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순간에 강동을 안정시키려면, 그저 몸을 굽히고 욕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손권은 형의 당부를 저버리지 않고, 우수한 치국능력과 권모술수를 통해, 그리고 사람을 잘 기용하고, 잘 알아보는 능력을 통해 동오의 기반을 신속히 안정시킨다. 그리고 형주, 교주를 확충하고, 이 기초 위에서 황제를 칭하며, 손씨집안의 최전성기를 이끈다.

단지, 후기에 손권은 형세가 변경된 것에 따라 행정방침을 변경하지 않았고, 웅주의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 그는 정치투쟁을 통해 강동의 사족을 억눌렀다. 비록 효과는 현저했지만, 강도를 적절하게 조절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후 혼란이 일어나게 된다. 또한 동오라는 지방에서 토황제로 지낼 생각만 했다. 이는 손책이 말한 것처럼 "천하를 다투는데 있어서는 네가 나만 못할 것이다"라는 말이 그대로 들어맞는다.

그러나, 후기에 손권이 아무리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한나라말기의 군웅들 속에서 손권은 아주 우수한 후계자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조조마저도 이렇게 감탄했을 것이다: "아들을 낳으려면 손중모(孫仲謀)같아야 한다. 유경승(劉景升)의 아들은 개돼지일 뿐이다!"

사실, 유표의 아들만이 아니라, 다른 2대도 그만 못했다.

손권이 성공적으로 기업을 안정시켰지만, 나중에 손권은 의심병이 심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계통에 대하여 매우 박하게 대한다.

손권이 칭제한 후, 손책을 추봉하는데, 겨우 장사환왕(長沙桓王)으로 추봉했을 뿐이다. 황제에 추봉한 것이 아니라. 그리고 손책의 아들 손소에게는 왕의 작위도 주지 않고, 겨우 오후(吳侯)로 봉한다. 나라이름으로 후에 봉한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후일 뿐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상우후(上虞侯)로 명칭마저 고친다.

비록 박정했지만, 어쨌든 큰형일가를 손씨내부분쟁으로 몰아넣지는 않았다. 비록 손책의 후인들을 내세워 황제자리를 다투려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는 끝까지 형의 후손들을 보존시켜주고자 한다.

그러나, 앞에서도 얘기한 바와 같이, 미래의 일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과연 손호(孫皓)의 재위기간, 황권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종실을 대거 죽여버린다. 손책의 유일한 손자인 손봉(孫奉)까지도 죽임을 당한다.

가련한 손책은 강동의 기업을 닦았지만, 결국 후손이 끊기는 최후를 맞는다. 이건 아마도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