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억범역사설(憶帆歷史說)
동한말기, 군웅이 할거하면서, 천하를 삼분했다. 이 금전과 권력이 교차하는 난세에 각로의 제후의 배후에는 모두 중요한 '자금줄'이 있었다. 위나라의 조홍(曹洪)은 만관(萬貫)의 재산을 가지고 있어 부가적국(富可敵國)이어서 조조조차도 감탄했다고 한다: "나의 집안재산이 어찌 자렴(子廉)만 하겠는가?" 강동의 노숙(魯肅)은 여러 개의 천곡양창(千斛糧倉)을 가지고 있었고, 사병이 백명을 넘었다. 손권이 가장 의지하던 부상(富商)이었다. 촉한은 원래 최고부자인 미축(麋竺)이 유비를 따라다니면서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한때 '동객만인(僮客萬人), 자산거억(貲産鉅億)"의 부호가 결국 몰락하게 되었을까?
난세상고(亂世商賈) 권세지쟁(權勢之爭)
동한말기, 정치는 부패했고, 토지겸병현상이 엄중하였다. 호족이 강력하게 굴기하고, 각지의 상인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속속 개인무장세력을 기르기 시작한다.
이 시기의 부호거상들은 왕왕 수백의 가정(家丁)을 호위로 둔다. 그들은 상업에 종사할 뿐아니라, 지방에서 실제적으로 군사역량까지 보유했다.
유비는 처음에 두 명의 마상(馬商)의 도움을 받는다. 장세평(張世平)과 소쌍(蘇雙)이 주머니를 털어 대량의 금전과 물자를 제공해 주었다. 이는 유비가 병사를 모집하고, 패자의 길로 들어서게 해주었다.
손씨집안의 발전도 마찬가지로 자금주의 지지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원술은 손권에게 충분한 군수물자를 제공해주었을 뿐아니라, 손권에게 병마와 장비까지도 대량으로 빌려준다.
다른 제후들과는 달리, 조조는 원래 부귀한 집안 출신이다. 그는 고묘를 도굴하여 재물을 얻어 군사비에 충당한다. 이런 방식은 비록 떳떳한 것이 아니지만, 동탁의 방화약탈보다는 훨씬 낫다고 할 수 있다.
난세에 지방호족의 지지는 군벌할거에 극히 중요하다. 제후들은 부상을 회유하기 위해 왕왕 초안(招安), 분봉(分封)등의 수단을 사용했다.
부상들도 권모술수에 능했고, 그들은 잠재력있는 제후에 자금지원을 해줌으로써 정치적인 이익을 얻는다. 일부 장기적인 안목이 있는 상인은 정략결혼을 통하여 제후와의 관계를 공고히 하기도 했다.
이런 군벌과 부상간에 상호의존하는 관계는 삼국정립시기에 전성기에 도달한다. 각 세력간의 힘겨루기는 실제로 재력을 겨루는 것이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많은 부상들의 운명에도 큰 변화가 발생한다. 어떤 사람은 이로 인하여 비황등달(飛黃騰達)하고, 어떤 사람은 이로 인하여 가파인망(家破人亡)하게 된다.
근 백년간 지속된 난세는 사회의 부를 재분배하였다. 형세변화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적시에 좋은 주군에 투자한 부상은 최종적으로 가업을 보전하고, 심지어 관직을 얻어 성공할 수 있었다.
위나라 조홍은 부가적국이었다.
조홍이 위나라에서 굴기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와 조조와의 관계는 위나라의 발전에 가장 중요한 도움이 되었다. 젊었을 때, 조조를 따랐던 조조의 족제(族弟)는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모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한다.
건안연간, 조홍은 대장군이 되고, 많은 병력을 거느린다. 여러 중요한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그가 마초(馬超)의 반란을 진압할 때, 적절한 지휘로 조위에 큰 공로를 세운다.
조씨종족의 중요구성원으로서, 조홍은 군권을 장악했을 뿐아니라, 상업을 통하여 놀라운 재산을 쌓는다. 그의 상업판도는 전체 중원지구에 깔려 있었고, 식량에서 비단까지, 다시 철기까지 다루지 않는 것이 없었다.
조위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조홍의 부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그거 업성(鄴城)에 지은 저택의 규모는 사람들의 입이 떡 벌어지게 만들었다. 노비만 수천명에 이른다.
조조는 이렇게 감탄한 바 있다: "우리 집안의 재산이 어찌 자렴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이 말은 조홍이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졌는지 말해준다. 당시의 위나라에서, 일국지주마저 그의 재산이 경탄할 정도였던 것이다.
조홍의 상업제국은 시국에 대한 정확한 판단위에서 건립되었다. 그는 전쟁이 가져오는 상업기회를 잘 파악했고, 군수물자공급을 통해 거액의 부를 축적한다.
업성에서, 조홍은 여러 상점을 열고, 각종 상품을 취급했다. 그의 사업은 도시와 시골에 모두 걸쳐있어서 방대한 상업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조홍의 부는 상업경영으로만 얻은 것이 아니고, 조조의 상사(賞賜)도 있다. 매번 전공을 세울 때마다, 그는 많은 봉상을 받았다. 거기에는 토지, 노비와 금은보화가 포함된다.
위나라 최고부자인 그는 이재에 능통했고, 그는 얻은 재산을 다시 더 많은 산업에 투자했다. 농지, 작방(作坊), 상포(商鋪)는 그의 부의 제국을 구성했다.
조홍의 부는 물질적인 면에서만이 아니라, 그의 영향력으로도 나타났다. 그는 자주 종족중 빈곤한 사람을 도와주었다. 그리하여 민간에서 명성이 아주 좋았다.
위나라의 관료체계에서, 조홍은 그의 혁혁한 지위와 웅후한 재력을 바탕으로 많은 조정고관들과 사귀었다. 이런 인적 네트워크는 그의 부를 축적하는데 강력한 보장이 되었다.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조홍은 자주 조정에 재물을 바쳤고, 군사행동을 지원했다. 이런 방식은 그의 충성심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의 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조가 죽은 후에도, 조홍은 여전히 혁혁한 지위를 유지한다. 그의 재산은 위나라가 안정적으로 발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위나라의 역사상, 조홍은 군사, 정치와 경제재능을 모두 갖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부를 축적한 역사는 위나라발전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강동의 노숙은 부갑일방(富甲一方)으로 동오를 도왔다.
노숙은 한문(寒門)출신으로 상업으로 성공을 거두고, 강동지구에서 가장 부유한 상인중 한명이 된다. 그는 20살때 이미 방대한 상업네트워크를 장악하고 있었다. 강하(江夏)에서 여강(廬江)까지 모두 그의 상점이 있었다.
양양(襄陽)전투이후, 노숙은 천하대세의 변화를 보고, 손권에게 의탁하여 강동을 경영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수천곡의 양식, 백여명의 가정을 이끌고 호호탕탕하게 남하한다.
강동에 도착한 후, 노숙은 즉시 그의 상업재능을 드러낸다. 그는 자신의 상업네트워크를 이용하여, 손권의 군수보급문제를 해결해주었다.
양식부족은 강동군대를 괴롭히는 큰 문제였다. 노숙은 자신의 채널을 통하여, 각지에서 양식을 구매하고, 완벽한 공급체인을 건립한다.
강동은 수로교통망이 발달되어 있다. 노숙은 상선단을 만들어, 군수물자를 운송할 뿐아니라, 민간무역도 경영했다. 이 선단은 장강연안을 오가면서 강동에 거대한 이윤을 가져다 주었다.
성공한 상인으로서, 노숙은 경영의 도리를 잘 알았다. 그는 강동의 각지에 양창(양식창고)를 건립했다. 이는 군량미를 보관하는 것일 뿐아니라, 시장의 곡물가격을 조절하여 민생을 안정시켰다.
노숙은 상업재능으로 손권의 중용을 받아, 군사(軍師)로 임명된다. 그는 계책을 낼 뿐아니라, 군수조달도 책임졌다.
적벽대전이전에, 노숙의 물자공급으로 연합군의 보급문제를 해결한다. 그는 각지의 양창을 이용하여, 군대의 전투력을 확보했다.
노숙의 부는 상업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토지경영에서도 나왔다. 그는 강동 각지에 좋은 농지를 구입하여, 장원(莊園)을 건립하고, 완벽한 산업체인을 형성한다.
지위가 올라가면서, 노숙의 상업판도는 더욱 확대된다. 그의 상단은 강남의 곳곳에 미치고, 심지어 멀리 교주(交州)에까지 미친다.
노숙은 부를 이용하여 인재들과 교류하는데도 능했다. 그의 저택은 강동명사들이 운집하는 곳이 된다. 이들 인재들은 나중에 모두 동오의 중요한 대들보가 된다.
동오의 경제중신으로서, 노속은 손권에게 수리발전, 황무지개간을 건의한다. 이런 조치는 강동지구의 경제발전에 튼튼한 기초를 쌓는다.
노숙은 또한 완전한 상업관리제도를 건립한다. 창고보관, 운송, 판매등의 단계를 포함하여. 이 제도는 동오정부에 채택되어 동오 전체로 확대된다.
군사적으로 노숙의 재력은 중요한 작용을 했다. 그는 여러번 군대를 도와 전선 ,무기를 구매하고, 동오의 군사확장에 물질적인 보장을 제공했다.
노숙의 성공은 상인이 난세에 마찬가지로 건공입업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는 자신의 부를 지켰을 뿐아니라, 동오의 발전이 중요한 공헌을 했다.
촉한의 미축은 집안재산을 모두 투입하여 주군을 돕다가 결국 파탄난다.
미축이 처음 유비를 만났을 때, 그는 이미 서주(徐州)의 최고부자고, 집안재산이 만관(萬貫)에 이르렀다. 그는 만명의 노비를 데리고 있을 뿐아니라, 각지에 상포를 두고, 방대한 상업제국을 경영하고 있었다.
난세를 맞아, 미축은 유비를 따르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자신의 여동생 미부인을 유비에게 시집보낸다. 이 결정은 그의 인생궤적을 철저히 바꾸어버린다.
유비에게 의탁하고난 후,미축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투입하여 군수물자공급에 썼다. 그는 재산을 매각하여 모두 유비의 군사행동을 지원하는데 보탰다.
서주전투에서, 미축의 상업네트워크는 유비군대를 위해 충분한 군수조달을 보장해 주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각지에 가진 인맥을 이용하여 유비에 대한 지지를 얻어내기도 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미축의 재산은 계속 감소한다. 그러나 그는 유비를 지지하겠다는 결심이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여전히 전력을 기울여 군수물자를 조달했다.
형주시기, 미축은 군수조달을 책임져서, 여러 차례에 걸쳐 군대의 양초위기를 해결한다. 그는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각지 상인의 협조를 받아 군수공급을 확보한다.
익주전투이후, 미축의 가산은 이미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 그는 마지막 재산을 유비가 익주를 통일하는 전투에 투입한다.
미축의 여동행 미부인이 낙봉파에서 죽는다. 이 비극은 그에게 큰 타격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유비의 곁을 지켰고, 계속하여 촉한을 위해 있는 힘을 다한다.
촉한정권이 건립되면서, 미축은 상서령에 임명된다. 그러나, 그는 이미 이전처럼 재산으로 정권을 지원해줄 수 없었다.
익주에서 미축은 자신의 상업네트워크를 재건하고자 시도한다. 그러나 전란이 빈발하고, 게다가 나이도 많아져서 그의 노력은 그다지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이릉전투이후, 미축의 처지는 더욱 힘들어진다. 그는 유비의 실패와 사망을 목격했고, 직접 자신이 키웠던 기업이 점차 쇠락하는 것을 목도했다.
제갈량의 북벌기간, 미축은 비록 나이가 많았지만, 여전히 후방에서 있는 힘을 다해 군수물자를 조달했다. 다만 이때 그는 이미 전국을 뒤바꿀 힘은 없었다.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미축은 촉한이 날로 쇠약해지는 현실을 보았다. 그는 부가적국의 상인에서, 부채를 가득 안고 있는 조정신하로 바뀌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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