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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대명제일현안(大明第一懸案): 건문제의 행방

by 중은우시 2025. 5. 22.

글: 최애역사(最愛歷史)

1402년, 명나라황궁에서 큰 화재가 발생한 후, 숙부 주체(朱棣)에 의해 황제위를 빼앗긴 건문제(建文帝) 주윤문(朱允炆)은 도대체 살았을까, 죽었을까?

이는 '명사제일현안'으로 불린다.

화재가 일어난 날부터, 건문제의 행방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난무했지만, 지금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명나라초기의 가장 중요한 2개의 공식문서인 <명태조실록>과 <명태종실록>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육월 초삼일, 연왕 주체의 대군이 남경의 금천문(金川門)으로 진격하여, 바로 황궁을 향한다. 주체가 황궁 안으로 들어갔을 때, 궁안은 이미 불바다가 되어 있었다."

사관은 추가로 이렇게 기록한다. 주체가 남경성으로 진입하기 전에 주윤문은 성밖으로 나가 영접하고자 했다. 그러나 좌우의 사람들이 모두 도망치고, 단지 몇 명의 내시들만 남아 있었다. 젊은 황제는 비통해 하면서 자책했다: "내가 무슨 면목으로 만난단 말인가?"

<명태종실록>에서는 주윤문이 "그리하여, 궁문을 닫고 스스로 불을 질렀다."고 적었다.

주체는 큰 불이 붙은 것을 보고 사람을 시켜 구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늦었다. 태감은 그저 불더미 속에서 새카맣게 탄 시신을 찾아냈고, 주체에게 보고한다.

주체는 크게 곡을 하며 말했다: "너는 과연 바보란 말인가? 나는 너를 좋은 황제가 되도록 보좌하러 왔는데, 너는 몰랐단 말인가? 왜 스스로 불을 질러 죽는단 말인가?"

이렇게 되니, 주윤문이 스스로 불을 질러 죽었다는 것이 이미 확정적인 사실로 되어 버렸다. 그러나, 역사는 일반인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어두운 면이 있다.

진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사라진 건문제

권력은 "사실"을 만들어낼 수 있다.

주체가 황위를 빼앗은 후, 찬위 사실을 감추고, 자신의 즉위의 합법성을 만들기 위하여, 그는 수중의 권력을 이용하여 당조와 전조의 역사, 자료에 대해 삭제와 수정을 진행했다.

그의 집권시기, 관방역사는 명태조 주원장이 후계자를 선정한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먼저 태조(주원장)이 병을 얻었고, 사람을 보내 상(주체)를 경성으로 돌아오게 했다. 회안에 이르렀을 때, 주윤문과 제태(齊泰)등이 음모를 꾸며, 조서를 위조하여 상(주체)으로 하여금 북경으로 되돌아가라고 했다. 태조(주원장)은 그것을 알지 못했고, 명이 위중해졌을 때, 좌우에 묻는다: '넷째는 아직 오지 않았는가?'.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세번을 물었지만 답을 듣지 못했고, 붕어한다. 주윤문이 조서를 위조하여 등극한다."

그 의미는 주원장이 임종전에, 넷째아들인 연왕 주체로 하여금 북경에서 남경으로 돌아오게 했고, 의도는 그에게 황위를 전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체가 오는 도중에 주윤문은 담대하게 대신과 논의하여 주원장의 성지를 위조하여 주체를 북경으로 되돌아가게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주원장이 죽을 때, 주체가 오기를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고, 주윤문이 조서를 위조하여 황제에 등극하였다는 것이다.

관방역사를 이렇게 쓰고, 이렇게 선전하는 것은 주체가 황위를 빼앗은 것은 단지 원래 자신의 것을 되찾은 것이라는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 유약해 보이는 조카 건문제는 기실 마음 씀씀이가 악독하고, 진정한 찬탈자였다는 것이다.

다만, 진실한 역사는 어떠한가?

주원장은 생전에 이미 고려했다. 연왕 주체가 아마도 황태손 주윤문이 즉위한 후에 잠재적인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유조를 내려 주윤문이 등극하게 하면서, 각지에 분봉된 아들들이 남경으로 와서 장례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막았었다.

그러나, 주원장이 붕어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주체는 직접 남하하여 조문하고자 한다. 병부상서 제태가 이를 발견하고, 태조의 유조를 내세워 주체를 북경으로 되돌려보냈다.

나중에 주윤문은 제태, 황자징(黃子澄)의 건의를 받아 "삭번(削藩)"을 진행한다.

주체는 기회를 잡아, <황명조훈(皇明祖訓)>을 끄집어 내서, 건문제의 곁에 있는 간신들이 정치를 혼란시킨다고 말하면서, "청군측(淸君側)"을 명목으로 내세워 "정난지역(靖難之役)"을 일으킨다.

3년가량의 내전을 거쳐, 주체는 제국의 최고권력을 차지한다.

신하들과 백성들이 그야말로 황위의 합법적인 승계자라고 믿게 하기 위하여, 주체는 신하를 시켜 건문제때의 모든 문서, 자료를 파기하고, <명태조실록>을 대거 수정한다.

당시의 사서는 주윤문을 건문제로 부르지 않고, 모두 그의 이름으로 적거나, 혹은 "건문군(建文君)"으로 적었다.

건문제때의 연호조차도 사용하지 않았다. 1402년은 마땅히 "건문4년"인데, 주체는 이를 "홍무35년"으로 고쳤다. 이렇게 하여 홍무조는 4년이나 연장되었고, 건문조는 "소실"되었다.

이렇게 하여, 주체의 영락원년(1403)은 바로 홍무35년(1402년)의 바로 다음 해가 될 수 있었다. 그는 명나라의 사실상 세번째 황제인데, 직접적으로 개국황제 주원장 이후의 두번째 황제로 바뀌었다.

세사공극(細思恐極)의 장례식

이런 명언이 있다. 모든 시간동안 일부 사람을 속일 수도 있고, 일부 시간동안 모든 사람을 속일 수는 있지만, 모든 시간동안 모든 사람을 속일 수는 없다고.

진상은 항상 모종의 방식으로 드러나는 법이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영락조의 자료는 주체의 탈위지전에 대하여, 그가 조카 주윤문을 도와 간신을 제거한 것인데, 그 사실을 잘 모르는 건문제가 스스로 부끄러워 하여 불을 질러 자결한 것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영락조의 가혹한 정치환경이 끝나자, 무수한 사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건문제 주윤문은 근본적으로 스스로 불을 질러 자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후세에 <명사>를 쓰는 사관은 그중 어느 하나를 채택하기 어려워, 모호하게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건문) 4년 육월 을축, 연병(燕兵)이 금천문을 침범한다....도성이 함락된다. 궁안에 불이 일어나고, 황제는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연왕은 사람을 시켜 제후(帝后)의 시신을 불 속에서 찾아낸다. 8일이 지난 임신일에 장례지낸다."

이 기록은 의미심장하다. 황궁에 큰 불이 난 후에, 태감은 불 속에서 건문제의 황후의 시신을 찾아낸다. 건문제의 시신이 아니라.

건륭제때 <명사>를 수정하면서, 더욱 직접적으로 건문제가 스스로 불에 타 죽었다는 내용을 수정한다:

"(주)체는 사람을 보내 황후의 시신을 불 속에서 찾아내고, 황제의 시신이라고 속여서 말했다(詭言)."

주체는 건문제 황후의 시신을 찾아낸 후, 그 자리에서 건문제의 시신이라고 선언한다. 어쨌든 시신은 검게 타버렸기 때문에, 누구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이어서 그는 시신의 앞에서 통곡한다.

그의 의도는 분명하다.

오직 건문제가 이미 죽었다고 선언해야, 그가 순조롭게 주원장의 적자 신분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건문제가 죽지 않았고, 옛신하들을 소집하여 복위활동을 벌이더라도, 주체는 그를 가까 건문제라고 규정하고 진압할 수 있는 것이다.

천하인들에게 건문제는 이미 죽었다고 믿게 하기 위하여, 주체는 요란하게 장례를 진행해야 했다.

그의 수하는 그에게 마땅히 "천자의 예"로 이 "건문제"의 시신을 안장해야 한다고 했다. 의식이 융중할수록 사람들은 더욱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주체는 할 수 없이 인격분열에 상당하는 모습을 보인다. 한편으로 사서에서는 건문군이 찬위자이고, 십악불사(十惡不赦)의 인물이라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사서에서 자신은 천자의 격식으로 건문제를 위해 융중한 장례식을 거행했다고 적은 것이다.

이는 자세히 생각해보면 공포스럽기 그지없는 장례식이다.

만일 살아있는 주윤문이 이 소식을 들었다면 분명 멍해졌을 것이다. 앞으로 그가 어떻게 증명하더라도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궤이한 점은 주체가 주윤문을 천자의 격식으로 장례지냈지만, 역사상 건문제의 능묘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명나라말기 숭정제에 이르러, 어떤 사람이 상소를 올려 건문제에게 제사를 지낼 것을 건의한다. 그러나, 숭정제는 이렇게 대답한다:

"건문제는 능이 없는데, 어디에 제사를 지낸단 말인가?"

여기에서 가능한 해석은 주체와 주변의 대신들은 모두 매장한 것이 건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단지 천하에 "건문제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목적이었으므로, 능묘는 아주 보통으로 만들고, 나중에 제사를 지내지 않게 되다보니 세월이 흐르면서 잊혀져버렸다는 것이다.

소리없는 살륙

주체는 한편으로 법도를 지켜, 장례지내고, 제사하고, 철조(輟朝)하며, "망자" 주윤문에 대해 마지막으로 천자의 예우를 다해 주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조용히 소리없는 살륙을 진행한다.

이런 잔혹한 사실을 우리는 영락조의 역사자료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주윤문의 몇몇 동생들은 실화사고로 사망하거나, 혹은 봉양감옥에서 사망한다.

주윤문의 황태자 주문규(朱文奎)는 당시 7살이었는데, 기이하게도 주체가 남경으로 쳐들어간 후, 주문규의 "행방이 묘연"해진다. 찾을 수가 없었고, 실종되어버린 것이다.

그의 작은 아들인 둘째아들 주문규(朱文圭)는 나이가 너무 어려서, 주체가 봉양의 고향집에 연금시켜둔다. 명영종때 비로소 이미 50여세가 된 폐황자는 자유를 얻는다. 그러나 그는 지적장애아와 마찬가지였다. 소와 말도 구분할 줄 모르는...

주체는 건문제의 관리들에 대하여도 악독했다.

주체가 황제에 오른 후, 건문제의 고위관료 400여명이 집단으로 도망치고 오직 20여명만이 그에게 칭신(稱臣)한다.

주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공개적으로 그들을 "간신"으로 규정하며, 이들에 대해 무정한 대학살을 전개한다. 여기에는 "과만초(瓜蔓抄)", "주십족(誅十族)"등이 포함된다.

그들 숙질이 천하를 놓고 다투었지만, 천하는 어쨌든 주씨집안의 천하이다. 건문제의 신하들은 왜 그렇게 죽음으로 충성하며 주체를 황제로 모시길 거부했을까? 황족내부에서 권력이전이 일어나는 유사한 경우는 많이 있었다. 이전의 당나라때는 현무문의 변이 있었고, 청나라때는 구자탈적이 있었지만, 이처럼 대규모로 죽음으로 충성한 신하가 대규모로 나온 경우는 없었다. 그때는 자연스럽게 새로운 황제에게 모여들었다.

명청교체기에는 천하가 모두 이민족에게 넘어갔지만, 숭정제가 목을 매자, 명나라조정의 고위관료들중 절개를 지킨 경우는 별로 없었다.

왜 오직 건문제때만 이렇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충지신(死忠之臣)이 대거 나타난 것일까?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다.

건문제의 대신들은 모두 건문제가 죽지 않았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옛 주인이 아직 살아있는데, 나는 새로운 주인을 모실 수 없다. 이것은 그들의 기본적인 신조이다.

주체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리하여 대거 살륙을 벌인다. 하나는 살계경후(殺鷄儆猴)로 다른 신하들을 겁주기 위함이며, 다른 하나는 진상을 알고 있는 자들을 업애야할 필요때문이었다.

역사의 또 다른 판본

이는 건문제의 행방에 관련된 또 다른 판본이다. 주체 본인조차도 깊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버전이기도 하다.

1402년, 명나라황궁에서 큰 불이 발생했을 때, 건문제는 이미 도망쳤다.

청나라초기의 사학자 곡응태(谷應泰)는 <명사기사본말>에서 명나라중후기에 전해지는 사빈(史彬)의 <치신록(致身錄)>, 정제(程濟)의 <종망일기(從亡日記)>등 문헌을 근거로(일부 학자들은 이 두 책이 위작이라고 본다), 명나라황궁에서 큰 불이 났을 때의 건문제의 행방에 대해 다시 서술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건문제는 남경의 금천문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장탄식을 한 후, 자살하고자 했다. 한림원 편수 정제는 황제를 끌며 말했다. 자살하는 것보다는 도망하는 것이 낫습니다.

이때 누군가 건문제에게 말한다. 태조 주원장이 임종하기 보갑(寶匣)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큰 난이 있을 때 열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홍색 보갑을 가지고 와서, 자물쇠를 부수고 열어보았다. 그랬더니 안에는 3장의 도첩(度牒, 승려허가증)이 있었고, 각각 "응문(應文)", "응능(應能)", "응현(應賢)"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가사(袈裟), 체도(剃刀), 승혜(僧鞋)와 은원보(銀元寶)가 들어 있었다.

보갑내에는 메모지에 글자가 쓰여 있었다. 응문은 귀문(鬼門, 황궁의 암도)로 나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수관어구(水關御溝)로 나가라 해가 지려 할 때 신락관(神樂觀)에서 회합하라.

건문제는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깍고 법호를 '응문'으로 한다. 신하중에 양응능(楊應能), 섭희현(葉希賢)도 머리를 깍고 옷을 갈아입고 따라나서겠다고 한다. 그들이 '응능'과 '응현'이다.

당시 대전에는 수십명이 통곡하며 눈물을 흘렸고, 모두 충성심을 표시하며 건문제를 따라 망명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건문제는 사람이 많으면 행동이 불편하고, 여러분은 모두 가족이 있으니, 집으로 돌아가서 처자식을 돌보라고 말한다.

그후 20여명만 골라서 각각 암도로 나가, 망명생애를 시작한다.

이 판본은 너무 극적이다. 그리고 주원장에게 미래를 읽는 '특이능력'까지 부여했으니, 얼마나 믿을만한지는 보는 사람이 각자 생각해볼 일이다.

그러나, 주원장이 생전에 황태손 주윤문을 위해 황권의 잠재적인 위협을 힘껏 제거해주었다는 점과 주원장의 개인적인 경력에서 일찌기 출가하여 승려가 된 적이 있다는 것을 보면, 기본적으로 황태손을 사랑하는 마음이 큰 주원장은 생전에 주윤문 혹은 그의 심복에게 극단적인 상황이 발생했을 때, 도망칠 수 있는 방안을 얘기해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사서에서는 이 과정을 신격화했지만, 기본 사실은 존재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날 주윤문이 확실히 도망치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명사>의 여러 곳에서는 반복하여 "혹은 제(건문제)가 지하도를 통해 도망쳤다고 말한다", "혹은 제(건문제)가 승려가 되어 도망했다고 한다"라고 적었다. 그것은 바로 주윤문이 도망쳤다는 역사적 사실을 가리킨다고 할 것이다.

주체는 마침내 마음을 놓다

정치적인 통치필요상, 주체는 표면적으로 건문제가 이미 죽었다고 선언했지만, 그의 내심은 시종 주윤문이 아직 살아있다고 믿는다.

남경을 점령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사람을 보내 암중으로 건문제의 행방을 수색한다.

그리고 부흡(溥洽)이라는 늙은 승려를 붙잡는다.

어떤 사람이 고발하여 말하기를 부흡은 건문제가 도망치기 전에 그의 머리를 깍아주었다고 하며, 건문제는 아마도 부흡의 고향인 항주에 숨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주체는 사람을 보내 조사하였지만, 건문제를 찾아내지 못한다. 이 일이 탄로날까 우려하여, 그는 다른 죄명으로 부흡을 감옥에 가두어둔다.

부흡은 이렇게 하여 16년간 갇혀 있게 된다. 영락16년(1418년)에 이르러 주체의 제사(帝師) 요광효(姚廣孝)가 나이들어 큰 병에 걸린다. 주체는 직접 그를 위문하러 갔고, 무슨 할 말이 있는지 물어보자. 요광효는 부흡을 풀어주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부흡은 다시 자유를 얻었다.

역사기록을 보면, 주체는 재위기간동안 여러가지 괴이한 일을 한다. 그건 모두 주윤문의 행방을 추적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단지 공식입장으로는 건문제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는 반드시 다른 명목을 붙여서 암중으로 추적하고 조사해야 했으며, 대외적으로 요란하게 떠들 수가 없었다. 천하인들이 진상을 알아차릴 수도 있기 때문에.

바닷길로는 정화(鄭和)를 서양으로 보낸다. <명사.정화전>에 따르면, 주체는 "혜제(건문제)가 해외로 도망쳤다고 의심하여, 그 종적을 찾아내고, 해외에 위세를 떨쳐, 중국의 부국강병을 알리고자 정화를 서양으로 보냈다."

이를 보면, 건문제를 찾는 것이 정화하서양(鄭和下西洋)의 주요 목적이었다. 무력을 선양한다는 것은 부수적인 것이고, 세상사람들의 이목을 가리기 위함이었다.

정화하서양은 매번 배에 근 3만의 군사가 있었다. 이렇게 방대한 군대는 외교사절단의 관례에 맞지 않는다. 한 가지 가능성으로 해석하면 통한다. 그것은 바로, 주체는 건문제가 해외로 망명했다고 믿고 있었고, 해상무장역량을 조직하였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반드시 대규모의 방대한 군대를 파견하여야, 건문제가 무력으로 복벽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육로로, 주체는 심복대신 호영(胡濙)을 보낸다. 명목은 선인(仙人) 장삼풍(張三豊)을 찾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건문제의 행방을 추적하는 것이었다. <명사.호영전>에 따르면, 주체는 "호영을 보내 신선 장랍탑(張邋遢, 장삼풍)을 찾도록 했고, 천하의 주군향읍(州郡鄕邑)을 모두 다니면서 암중으로 건문제가 어디 있는지 찾았다."

호영이 임무를 집행하는데 십여년 이십년이 걸린다. 그는 모친이 죽었을 때도 돌아와 장례를 치르지 못한다. 이는 전통사회에서 예제에 완전히 벗어나는 일이다.

영락21년(1423년), 호영은 비로소 조정으로 돌아온다. 이때 주체는 막북 타타르부를 직접 토벌하기 위해 선부진(宣府鎭, 지금의 하북 선화)에 가 있었다. 호영은 즉시 선부진으로 갔고, 도착했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다.

정사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제(주체)는 이미 침실에 들어갔다. 호영이 왔다는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부른다. 호영이 모두 아뢰고 나서 누하사고(漏下四鼓)에 나온다."

무슨 일이기에 다음 날 아침에 듣지 않았을까? 사서에 군신 두 사람이 장시간 밀담한 내용은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면 주체가 한밤중에 호영을 불러서 물어보지 않았을 것이다.

정사는 이어서 이렇게 적는다. 군신 두 사람이 밤중에 밀담을 나눈 후, 주체는 "마침내 의문이 풀렸다(至是疑始釋)" 이제 주체의 마음 속에 오랫동안 쌓여있던 의문, 의심이 마침내 해소되었다는 것이다.

이 때를 주의해야 한다: 영락21년(1423년). 이 해에 호영은 한밤중에 보고하였고, 주체가 마음 속에 가지고 있던 의문을 해소시켜주었다. 같은 해에 정화의 제6차하서양에서 귀국했고, 그후 영락조가 끝날 때까지 더 이상 해상활동에 나서지 않는다.

이런 기이한 사건에서 기본적으로 단언할 수 있다. 호영은 확실히 건문제의 행방을 찾아냈다. 그리고 주체의 반응을 보면, 그리고 해로, 육로를 통한 행적추적을 끝낸 점을 보면, 이때 건문제의 상황은 오직 두 가지이다:

첫째, 그는 정말 이미 죽었다.

둘째, 그는 이미 출가했고, 복위할 생각을 완전히 포기하고, 속세를 떠났다.

호영이 주체에게 어떤 소식을 가져다주었던지 간에, 주체는 마침내 마음을 놓게 된 것이다.

명예회복과 전설

주체가 죽은 후, 정치환경은 점차 완화되었다. 그러나, 건문제에 대한 명예회복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곡절도 많았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주체는 건문제의 재위4년역사를 완전히 말소시켜 버렸다. 근본적으로 그가 황제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주체의 자손들, 후임 황제들로 하여금 대명이 멸망할 때까지, 주윤문이라는 황제를 인정할 수 없게 만든다.

오랫동안 명예회복작업은 주변에서 진행된다.

천순원년(1457년), 명영종 주기진이 복벽한 후, 자신이 일찌기 포로로 잡혀 있었고, 연금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여 주윤문의 어린 아들 주문규를 석방하도록 명한다.

100여년후인 만력연간, 명신종(明神宗) 주익균(朱翊鈞)은 여러 신하들의 건의에 따라, 먼저 건문제때 사망한 충신들의 명예를 회복시킨다. 주체는 방효유(方孝儒)등을 "간신"으로 규정했지만, 지금은 그들을 "충신"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남경에 표충사(表忠祠)를 짓는다; 나중에 다시 건문연호를 회복하는데 동의한다. 홍무조는 31년이고 35년이 아니라는 역사진상이 회복되고, 4년은 건문조로 돌려주게 된다.

그러나, 명나라가 1644년 멸망할 때까지, 건문제의 황제지위는 여전히 정식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남명 홍광조(弘光朝)(에 이르러, 잔존강산을 사수하던 홍광제는 신하들의 요구에 응하여, 건문제실록, 시호, 묘호와 사전(祀典)을 보완하여, 건문제의 제왕신분을 완전하게 인정한다.

한 시기의 역사를 말살하는 것은 그렇게 쉽게 이루어졌지만, 그 역사를 회복하는 것은 어렵고도 어려웠다.

1402년이후 건문조의 역사는 오랫동안 결실되었고, 항간의 소문만 무성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소문은 갈수록 많아졌고, 원래 불분명했던 건문제의 행방에 관한 역사는 마침내 각종 이런저런 전설 속에 남아 있게 된다. 명나라의 최대 현안은 이렇게 생겨난 것이다.

가장 기이한 판본은 명영종때 발생한다.

어느 날 광서(廣西) 사은주(思恩州)의 한 사원에 늙은 승려가 있는데, 지부대인 잠영(岑瑛)의 사무실로 찾아와서 큰 소리로 말한다: "나는 건문제이다" 그리고 두 수의 시를 지어 자신의 신분을 증명한다:

뇌락서남사십추(牢落西南四十秋), 소소화발이영두(蕭蕭華髮已盈頭);

건곤유한가하재(乾坤有恨家何在), 강한무정수자류(江漢無情水自流);

장락궁중운기산(長樂宮中雲氣散), 조원각상우성수(朝元閣上雨聲愁);

신포세류년년록(新蒲細柳年年綠), 야로탄성곡미휴(野老呑聲哭未休);

열파능언반라고(閱罷楞言磐懶敲), 소간황옥기단표(笑看黃屋寄團瓢);

남래장령천층형(南來嶂嶺千層迥), 북망천문만리요(北望天門萬里遙);

관단구망비봉련(款段久忘飛鳳輦), 가사신환곤룡포(袈裟新換袞龍袍);

백관차일지하처(百官此日知何處), 유유군조조만조(唯有群鳥早晩朝).

잠영은 오줌을 지릴 정도로 놀랐다. 확실히 제왕의 시였다. 그래서 감히 태만하지 못하고, 노화상을 북경으로 보낸다.

건문제의 신분으로 먹고 마시면서 부귀영화를 누렸는데, 아쉽게도 노화상은 공부가 부족했고, 결국 들통이 나게 된다.

어사: 올해 귀경(貴庚, 나이)은 어떻게 되십니까?

노화상: 구십여세이다.

어사: 그렇지 않습니다. 건문군은 홍무10년에 태어나셨으니, 금년 64세입니다.

노화상: 그건 내 부친이다.

어사: 끌어내서 참하라.

(이상은 가상의 대화이다)

노화상은 결국 사실을 실토한다. 원래 그의 이름은 양응상(楊應祥)이고, 사원에서 동료스님을 만났는데, 기품이 비범했다. 하루는 그 동료스님이 벽에 쓴 두 시를 읽었는데, 잠영과 마찬가지로 놀라서 오줌을 지렸을 정도였다. 이는 황제의 시인 것이다. 그는 냉정하게 생각해보고는 기회가 왔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바로 잠영을 찾아간 것이었다.

관방은 건문제가 죽었다고 하엿는데, 이제서야 그의 말을 근거로 진짜 건문제를 찾아냈고, 그의 신분을 확인한 후 궁중으로 모셔가서 죽을 때까지 예불을 드리게 했다. 궁중사람들은 모두 그를 "노불(老佛)"이라고 불렀다.

지금 중국의 서남지여게는 많은 곳에 건문제가 도망친 후 현지에서 승려로 있었다는 전설과 유적이 있는데,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명나라 중후기이래, 이런 소문은 널리 퍼진다. 주체의 후손들조차도 그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만력2년(1574년), 젊은 만력제 주익균은 신변의 대신에게 묻는다:

"건문군은 당시 정말 불질러 자살하지 않고 도망간 것인가?"

내각수보 장거정(張居正)이 나서서 대답한다:

"그 일은 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선조의 대신들이 구두로 전해져 내려온 바에 따르면, 당시 건문군은 승려로 변장하여 황궁의 비밀통로를 통해 나갔습니다. 그후 사방을 돌아다녔고, 누구도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장거정의 이 대답은 명나라의 반관방태도를 대표한다. 즉 주윤문이 확실히 승려로 변장하여 도망갔다. 그러나 도망간 이후의 사적은 알지 못한다. 이를 보면 그에 관한 이후의 각종 소문은 믿을 바가 못된다고 할 것이다.

명나라말기의 전겸익(錢謙益)은 국사관(國史館)에서 꼬박 30여년을 일한다. 건문제의 역사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파 눈물을 흘린다. 왜냐하면 이 시기의 역사는 실록에서 찾아볼 수가 없고, 소문은 각각 다르며, 거짓역사가 섞여 있기 때문에, 후손들이 진정한 역사를 찾아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에 있어서, 이건 가장 비극적인 일이다.

나라는 망할 수 있지만, 역사는 사라지지 않는다.

명나라가 멸망할 때, 국사관에서 나온 "망국지신"은 하늘을 올려보며 비탄해 하면서 깊은 곤혹을 느끼게 된다:

진상을 환원하는 것이 원래 이렇게 어려운 것이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