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진검(陳劍)
"노삼계"는 특정한 시기 공동특징을 지닌 중고등학생집단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1966-1968년의 6기(중3기, 고3기)학생을 "노삼계"로 칭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처지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1968년 6기의 학생들은 동시에 졸업했고, 동시에 삽대(揷隊, 농촌생산대에 끼어들어갔다는 의미임)했다. 이 6기의 학생의 성장은 강렬한 사회학적 의미가 있다.
이에 대응하는 연령구간은 1946-1952년생이다. 또 다른 이해도 있는데, "노삼계"를 단순히 1966-1968년 사이의 고등학생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는 이유는 문혁의 발발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 바로 이 3년간 고등학생이 정상적으로 대학에 입학하는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노삼계는 대학교육을 받지 못한 집단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유동성이 아주 강했고, 일부는 나중에 공농병학원의 일부가 되며, 일부분은 12년후에 "신삼계(新三屆)"의 중견이 되기도 했다.
(1) 공화국역사의 중요참여자
1966년 6월부터 정학한 후 학교를 떠나기까지, 이 기간동안 아마도 노삼계의 전체 집단은 사회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았던 시기일 것이다.
그들은 열정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지도자의 요청에 호응하여,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 홍위병운동에 투입된다. 그리고 이 운동의 절대적인 주력이었다. 그들은 전국연합에 참가하여 계속하여 위대한 지도자의 사상을 선전했고; 문화명인, 지부반괴우(地富反壞右, 지주, 부호, 반혁명분자, 악인, 우파를 가리키는 말로 黑五類라고 부른다), 수정주의분자에 대하여 가택수색하는데 참여했고, 자신이 존경하는 선생님에 대한 비투에 참여했으며, 심지어 자기 가족에 대한 비투에도 참여한다. 그리고 중국대지의 여러 "봉자수(封資修, 봉건주의, 자본주의, 수정주의)"문화재를 파괴하는데 참여했다.
중국은 이 기간동안 역사문화재가 파괴되었는데, 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은 "문화의 목숨을 크게 자른 것(大革文化命)"이다. 이것이 이 시기의 진정한 모습이다. 위에서 언급한 행동은 모두 신성한 깃발 아래에서 진행된다. 이는 공화국의 암흑시대이고, 노삼계는 극단적인 이데올로기의 해독을 가장 심하게 받은 세대이다. 시대의 볼모가 되어 맹종하고, 개인은 완전히 피동적으로 그 안에 빨려들어갔다. 이는 모두 지도자의 책임이고, 사회의 책임이다.
이는 "나"는 없고, "우리"만 있던 시대이다. "우리"였기 때문에, 모든 과오 심지어 죄책은 단지 "우리"가 함께 져야 했다. 이는 스위스심리학자 융거가 말한 집단무의식시대였다.

다만 반성이 없이 오로지 칭송하고 호기넘치며 구세계를 파괴시키려는 충동만 남는다면, 중화민족은 어떻게 전진할 수 있겠는가? 노삼계라는 집단은 정말 반성하고, 정말 사죄해야 한다.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2013년 10월 7일, 진소로(陳小魯)는 교우들을 이끌고 당시의 선생님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사죄했다. 2014년 1월 12일 송빈빈(宋彬彬)은 북경사범대학부속중학에서 당시의 선생님, 동료학생 및 선생님의 후손들에게 사죄했다. 진소로, 송빈빈의 사죄행동은 노삼계라는 이 집단에 대하여 전사회의 적극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다.
노삼계라는 집단이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맹종한 적이 있지만, 그들은 또한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1976년 청명절에 수도의 백만군중은 북경의 천안문광장에서 주은래(周恩來) 총리를 기념하며, "사인방"에 반대했다. 노삼계는 이 운동의 중요참여자였다. 그리고 이 운동을 최종적으로 사상해방운동으로 바꾸었다. 문혁을 끝내기 위해 2년후인 11기 3중전회가 개최되는데 사상적인 기초를 놓았다.
일찌기 맹종에서 사고하기 시작하고, 행동도 했다. 그것이 이 집단의 우수한 점이다.
(2) 노삼계의 기구한 경력
1968년 9월 5일, <인민일보>에는 모택동이 쓴 글이 실린다: "과거 대량의 대학교 및 중고등학교졸업생들중 일찌감치 일을 하고 있거나 현재 일을 하려는 살마들은 그들에 대한 재교육을 진행하는데 주의해야 한다. 그들을 공농(工農, 노동자농민)과 연결시켜야 한다." 이때부터 "재교육"이라는 개념이 상산하향(上山下鄕)운동동원령으로 바뀐다.
위대한 지도자의 말씀이 떨어지자, 널리 '재교육'을 받아들이게 되어, 농촌, 시골로 가고, 생산병단에 들어가고, 농장에 들어간다. 노삼계는 2000여만명의 지식청년의 중요구성부분이었고, 지식청년중의 큰형님, 큰언니였다.

일찌기 글을 쓰며 천하를 논하던 노삼계는 이제 힘든 농촌에서 하늘과 땅과 싸워야 했다. 이들은 고난과 역경을 견뎌야 했고, 광활한 대지에서 활동을 했다. 그러나 어쨌든 그곳은 무대가 좁고, 공간이 협소하여, 이후 십년동안 계속하여 도시로 돌아오거나, 군대에 들어가거나, 혹은 공농병학원이 되어 학교에 들어가거나, 혹은 공장, 기관에 취직한다.
1978년이후, 여전히 농촌에 삽대되어 있거나, 병단, 농장에 남아 있는 노삼계는 이미 얼마 남지 않았다. 농촌호구를 가진 노삼계들은 이후 속속 도시로 유입되거나, 혹은 공농병학원이 되거나, 혹은 도시에 직장을 얻었다. 그래도 여전히 일부분은 농촌에 남아 있었고, 이 부분 노삼계들은 거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
1978년 11기 3중전회의 역사적변화로 다수의 이미 이립(而立)의 나이가 된 노삼계들의 인생은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한다. 많은 사람들은 기회를 잡아 각고노력하여 대학시험에 참가하고, 시장경제의 흐름을 타고 사업을 시작한다. 어떤 사람은 과학연구의 골간이 되고, 부호가 되고 고위공무원이 되었다. 또한 일부는 해외로 이민하거나 은퇴후에 해외의 자녀들과 함께 생활한다. 그들은 중국이 세계와 융합하는데 공헌을 했다.
중국에서 개혁개방의 붐 속에서 노삼계의 많은 인원은 개혁개방의 적극적인 지지자가 된다. 그리고 많은 영향력있는 경제학자, 역사학자, 사상가를 배출한다. 또한 일부 공화국의 부장(장관), 심지어 부국급, 정국급 국가지도자를 배출한다. 이는 이 집단의 실력과 끊임없는 노력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노삼계"는 특수한 시대의 특수한 산물이다. 또한 지식구조에 결함이 있는 집단이다. 54년의 비바람을 거치면서, 지난 일을 되돌아볼 수는 있지만, 청춘에 대하여는 말을 아낀다. 그들은 일지기 맹종했었고, 역사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반성은 중국의 현대화에 공헌했고, 이미 역사에 기록되었다. 현재 노삼계는 차례로 고희의 나이에 접어든다. 중국사회의 전환이 직면한 거대한 도전은 아마도 그들의 노력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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