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역사수사고(歷史須思考)
오기(吳起)는 하서(河西)지구에서 하서태후(河西太守)로 20여년간 있으면서, 진나라를 막아냈다. 그의 공로는 컸다. 그런데, 그는 돌연 위나라를 떠나 초(楚)나라고 간다. 도대체 무엇때문이었을까?
기원전378년,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몇가지 큰 사건을 기록해 놓았다:
첫째, 위문후(魏文侯)가 사망하고, 태자 격(擊)이 즉위하여 위무후(魏武侯)가 된다.
둘째, 위무후가 배를 타고 서하(西河)를 시찰한다. 서하지구의 산과 황하가 둘러싸서 험준하고 튼튼한 지리적 이점을 보고 "아름답구나, 산하의 공고함이여. 이는 위나라의 보배로다!"라고 감탄한다.
오기는 그의 말을 들은 후 직접적으로 말한다: "산하의 험준함으로는 나라를 지키기에 부족합니다." 그는 삼묘(三苗), 하걸(夏桀), 상주(商紂)의 사례를 들어, 이들이 모두 험준한 곳에 도성을 두었지만, 통치에 덕이 없어 결국은 멸망했다는 점을 얘기한다. 그러므로, 통치는 "덕에 있지 험준한 것에 있지 않다(在德不在險)". 만일 국군이 덕을 쌓지 않으면, 설사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사람이라도 모조리 적이 될 것이다(舟中之人盡爲仇敵啊).
위무후는 단지 한 마디로 대답한다: "좋은 말이다(善)". 그러나, 오기의 "만일 국군이 덕을 쌓지 않으면, 설사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사람이라도 모조리 적이 될 것이다"라는 말은 위무후의 민감한 신경을 건드렸다.
셋째, 위무후가 즉위한 후, 전문(田文)을 국상(國相)으로 삼는다. 오기는 매우 불쾌했다. 삼군을 지휘하는 면에서나 국정을 관리하는 면에서나 변장을 지키는 면에서 전문은 자신의 상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오기는 전문을 찾아가서 따진다. 전문도 자신은 오기만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는 한 마디로 이유를 설명한다: "주소국의(主少國疑), 대신미부(大臣未附), 백성불신(百姓不信)"(통상적인 해석으로 하면, 군주의 나이가 어리다보니 나라가 잘 굴러갈지에 의심을 가지고 있고, 대신들도 따르지 않고, 백성들도 믿지 않고 있다임). 그 말을 듣고, 오기는 국상을 다툴 생각을 포기한다.
넷째, 금방 전문이 죽구, 공숙(公叔)이 국상의 직위를 넘겨받는다. 그는 오기를 미워했기 때문에, 복종(僕從)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위무후로 하여금 오기를 시험해보도록 권한다. 만일 오기가 다루기힘든 공주를 취한다면 그가 계속하여 위나라를 위해 일할 생각이 있는 것이고, 만일 오기가 공주를 취하길 거절한다면 그는 위나라에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공숙의 의견에 따라 처리하자 과연 오기는 공주를 취하길 거절한다. 그리하여, "위무후는 그를 의심하고 믿지 않게 된다" 오기는 박해를 겁내어, 밤을 틈타 초나라로 도망친다.
이상의 4차례의 사건은 <자치통감>에서 오기가 위나라를 떠나게 된 원인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교적 은회(隱晦)한 수법을 썼다. 아래에서 하나하나 분석해 보기로 하자:
첫째 사건, <사기>에는 기원전387년에 위문후가 죽고, 아들 격이 국군에 오르니 바로 위무후라고 하였다. 그러나, <죽서기년(竹書紀年)>의 기록에 따르면, 위무후가 즉위한 해는 기원전396년이다.
당연히 이는 태사공 사마천이 부주의했기 때문은 아니다. 당시 그가 접촉할 수 있는 사료는 유한했고, 더욱 권위있는 육국의 사서(史書)는 진나라의 통일후에 모조리 불태워졌다. 그러므로, <사기>의 기록에는 자주 엉터리내용이 들어 있다. 특히 시간이라는 측면에서.
둘째 사건, 위무후가 배를 타고 서하를 시찰한 것에 대하여는 <사기>, <자치통감>에 모두 기록이 있다. <전국책(戰國策)>에도 기록이 있다. 그런데, 구체적인 내용에는 몇 가지가 추가되어 있다.
위무후가 "산하의 형세가 이렇게 험준하니, 강산이 공고한 것이 아니겠느냐!"라고 감탄할 때,
왕착(王錯)이라는 사람이 곁에서 그 말에 호응하며 아부한다: "이는 진(晋)나라가 강했던 이유입니다. 만일 잘 수리한다면 패왕의 업적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위무후의 시호는 "무(武)"이다. 여기에서 그는 호대희공(好大喜功)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재위기간동안 적지 않은 전쟁을 일으킨 국군이다. 그의 주변에는 아부하는 인물이 많이 모여있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강직한 오기는 그 말을 들은 후, 그 자리에서 반박한다: "우리 국군의 말씀은 나라를 위험하게 만드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대가 그에 호응하다니 이는 더욱 위험합니다!"
이를 보면, 오기는 정치적 EQ가 높지 않은 '군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직장의 인정세고를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와 왕착간의 원한은 이렇게 맺어진다. 그리고 그가 나중에 위나라를 떠나 도망쳐야하는 이유중 하나가 된다.
셋째 사건, 위무후가 즉위하자마자 전문을 국상으로 삼았다. 국상은 오기의 직업적 목표였다. 그가 위나라에게 하서의 땅을 경영하는데 노력하면서 이미 '명성을 크게 얻었고' 능력으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그가 국상에 올라야 했다.
그러나, 위무후는 별로 이름도 없는 전문을 선택했다. 전문에 관한 역사기록은 많지 않다. 다만 오기와 얘기를 나눈 내용만이 사관에 의해 기록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전문은 자신이 군대를 지휘하거나, 나라를 다스리는 능력에서 모두 오기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때, "주소국의, 대신미부, 백성불신"이라는 국가상황을 얘기하면서, 위무후가 자신에게 국상을 맡길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하낟.
이 셋째 포인트는 아주 함축적이다. 대체적인 의미는 위무후가 젊어서 인심이 불안하고, 국가정권이 안정되지 못했으며, 대신들도 믿고 따르지 않고, 백성들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이 세 가지를 자세히 분석해보면 모순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주소국의"이다. <사기>에 따르면, 위무후는 위문후13년(기원전412년)부터 병력을 이끌고 전투에 나서서, 진나라의 하서에 있는 번(繁), 방(龐) 두 개의 읍(邑)을 포위공격했다.
주나라때 남자들은 대체로 20살때 병역에 종사한다. 우리는 이때 위무후의 나이를 개략 20살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기원전431년경에 태어났다.
<사기>에는 위문후 38년(기원전387년) 위문후가 죽고, 아들 격이 국군에 오르니 위무후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위무후가 즉위했을 때 나이가 이미 45세이다. 얼굴에 수염이 가득 난 중년인인데, 어찌 "주소(主少, 군주의 나이가 어리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비록 <죽서기년>에 따르면, 위무후가 즉위한 시기가 396년이지만, 그 주장에 따르더라도, 위무후는 이때 35세에 가깝다 .역시 중년인이니, "나이가 어리다"라고 말할 나이는 아닌 것이다.
<죽서기년>은 원래 위나라의 국사(國史)이니, 거기에 기록된 위나라의 역사기록은 더욱 권위가 있다.

요행히 분서갱유를 피한 <죽서기년>
아마도 태사공이 사료부족으로 애먹을 때마다 마음 속으로 진시황을 욕했을 것이다: "모두 분서갱유때문이다. 열국의 사서를 모두 불태워버리다니! 그래서 내가 정확한 시간을 기록할 수 없게 만들지 않았는가."
다음으로, 위무후는 즉위하기 전에, 적지 않은 전공을 세웠다. 특히 기원전408년, 악양(樂羊)을 따라 병력을 이끌고 조(趙)나라를 넘어 천리먼길을 행군하여 적(狄)인이 건국한 중산국(中山國)을 공격한다. 3년만에 중산국을 점령하고, 위격(魏擊, 즉 나중의 위무후)은 중산군(中山君)에 봉해진다. 그런데 어찌 그의 능력을 의심한단 말인가?
위격은 위문후가 직접 선정한 태자이다. 그리고 공헌도 탁월했고, 장년에 즉위했다. 자격이나 경력, 명망으로 보아 그는 국군의 합법적승계인이다. 전문이 말한 "주소국의, 대신미부, 백성불신"은 전혀 근거없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오기는 전문의 말을 듣고,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나다" 비로소 말했다고 한다: "국상은 너(전문)이 해야겠다."
나중에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전문의 말을 이렇게 해석했다:
위문후가 막 즉위했고, 나이가 젊다. 그래서 공헌이 큰 오기를 다루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다른 사람을 국상으로 세운 것이다. 이를 통해 공고진주(功高震主)하는 오기를 견제한 것이다. 오기는 EQ가 낮아서, 동료간에 관계를 잘 처리하지 못했고,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샀다. 그리하여 '대신미부'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그리고 오기는 관직을 얻기 위하여, 무정무의한 일을 저지른 바 있다. 모친이 사망했는데 상을 치르지 않고, 처를 죽이면서 노나라국군에게 잘보이려 했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그를 신임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해석도 어느 정도 이치에 맞는다. 다만 주어가 바뀐 것이다.
넷째 사건. 우리는 먼저 계속 <자치통감>에서 얘기하는 네번째 사건을 보자. 즉, 공숙이 오기에게 함정을 파서, 위무후의 의심을 사게 만들고, 결국 오기가 위나라를 떠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때의 국상은 전문이 죽고, 공숙이 맡고 있었다.
<자치통감>의 이해에 따르면, 기원전387년 위문후가 즉위하자마자 전문을 국상으로 앉힌다. 1년도 되지 않아 전문이 죽고, 공숙이 넘겨받는다. 같은 해에 오기가 위나라를 떠난다.
이 스토리의 전개는 너무 빠르다. 그래서 확실히 불합리하다. 왜냐하면, <자치통감>의 이 이야기는 사마광이 <사기>를 베낀 것이다. 그래서 시간적으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다.
<죽서기년>에 따르면, 위무후는 기원전395년에 즉위했고, 전문을 국상으로 앉힌다. 8년이 지나, 공숙은 오기가 그의 지위를 위협할까 두려워하여 그를 위나라에서 쫓아낸다. 이것이 상대적으로 더욱 합리적이다.
이 사건을 자세히 분석해보자:
공숙은 오기를 미워했다. 그의 복종은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기를 쉽게 보내버릴 수 있습니다!" 공숙이 묻는다. "어떻게 한단 말인가?"
복종이 대답한다: "오기는 사람됨이 청렴하고 자신의 명성을 더럽히는 걸 싫어합니다. 당신은 기회를 잡아 무후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오기는 현명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위나라의 국토는 작습니다. 그리고 강대한 진나라가 이웃하고 있습니다. 나는 오기가 위나라에 오래 머무를 마음이 없을까봐 걱정됩니다.'"
그리하여, 공숙이 계책을 써서 정치문외한인 오기를 '좇아보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왔지만, 사건이야기의 헛점이 너무나 많다. 기본적으로 한눈에 거짓임을 알 수 있다.
먼저, 이때 위나라는 이회(李悝)의 변법으로 이미 전국시대초기 유일한 수퍼강국이 되었다. 그리고 오기가 하서의 땅을 경략하면서, 황하서안의 원래 진나라에 속했던 대량의 영토를 확보한다. 진나라는 위나라의 공격에 힘들어 했고, 관중의 서쪽에 웅크리고 겁을 먹어 떨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위나라는 나라가 작고, 강대한 진나라와 이웃하고 있다"는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다음으로, 오기는 한꺼번에 서른명을 죽이고 처를 죽이면서 관직을 구한다는 '유언비어'를 부인한 악독한 인물이다. 그런데 기껏 '다루기힘든 공주' 한명을 어쩌지 못한단 말인가?
그 다음으로, <전국책>에는 이런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위혜왕(魏惠王)시기 위나라국상 공숙좌(公叔痤)는 일찌기 병력을 이끌고 한(韓), 조(趙) 양국과 회북(澮北)에서 싸웠고, 조나라 장수 악조(樂祚)를 생포했다.
위혜왕이 크게 기뻐하면서, 공숙좌에게 백만의 전답을 상으로 내리려 했다. 그러자 공숙좌는 사양하며 말하기를, "병사들이 무너지지 않고, 진선공격시에도 기울지 않고, 우회공격시에도 흩어지지 않는 것은 모두 오기의 가리츰입니다. 신이 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위혜왕은 오기의 후손을 찾아내서, 전답 이십만을 하사했다.
이 사건은 개체로 오기가 위나라를 떠난지 10여년후에 발생했다. 그때도 공숙좌는 오기가 한 공헌을 찬양하고 있으며, 위혜왕에게 오기의 후손들에게 상을 내리도록 요구한다.
이를 보면 그 두 사람의 관계는 '유언비어'에서처럼 그렇게 나쁘지 않았던 것같다. 심지어 '서로를 아끼는' 정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대담하게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이 이야기의 위나라국상 공숙은 위혜왕시기의 공숙좌가 아니라고, 전자의 신분은 수수께끼이며, 그저 만들어낸 인물인 것같다. 왜냐하면 이름조차도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기실 사료(<사기> <자치통감.포함)에서 여기에 나오는 공숙이 바로 공숙좌라고 말한 적은 없다. 비록 두 사람이 모두 위나라의 국상이고, "공숙"은 그저 칭호로 국군의 동생을 지칭하는 것이며, 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때는 오기가 위나라에서 일한지 20여년이 지났다. 젊은 청년에서 불혹의 중년에 이르기까지 청춘을 꼬박 위나라에 바치면서 전전긍긍 일했다. 한번도 직위를 떠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위무후가 왜 갑자기 얕은 수단을 써서 그를 시험한단 말인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이야기는 전국시대 후기에 국제사회를 이리저리 오가면서 밥벌어먹고 살던 종횡가(縱橫家)가 지어낸 이야기이다. 단지 그들이 전국시대 초기의 이야기를 지어냈지만, 사고방식은 전국시대 후기의 진나라가 육국을 치던 시기에 미물러 있다.
그러므로, 다시 되돌아가서 전문이 말한 셋째 사건을 보면, 오기와 전문의 공로를 논한 것도 진실성이 매우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오기가 위나라를 떠난 진실한 원인은 <사기>에 적어놓은 답은 아마도 누군가에 의해 수정된 것일 것이다. <여씨춘추>는 또 다른 버전을 제공한다:
"오기가 서하 일대를 잘 다스리고 있을 때, 왕착이 위무후에게 참언을 올린다. 위무후는 사람을 시켜 오기를 부른다. 오기는 안문(岸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서하를 바라보며, 눈물을 여러 줄기 흘렸다."
무후가 배를 타고 서하로 왔을 때, 왕착은 무후에게 아부하는 말을 했고, 오기가 그것을 통박한 바 있다. 그리하여 두 사람 사이에 원한이 맺어졌고, 무후를 모시던 왕착은 기회만 생기면 오기를 모함했다.
공을 세우기 좋아하는 통치자의 주위에는 항상 아부하는 무리가 따르기 마련이다. 하나는 권력에 빌붙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고, 하나는 아부하는 말로 허영심을 만족시켜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오기의 종이 의혹을 가지고 묻는다: "제가 공을 지금까지 모셔오면서 본 바에 따르면, 공께서는 어떤 직위를 갖거나 버리거나 신경쓰지 않을 뿐인데, 어찌하여 오늘은 서하를 떠나면서 이렇게 울면서 상심하십니까?"
오기는 눈물을 닦고서 대답한다: "너는 모른다. 국군이 안심하고 나에게 서하를 다스리게 놔두면, 서하를 본거지로 하여, 위나라는 칭왕칭패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국군이 참언을 듣고 나를 믿지 않는구나. 서하의 땅은 곧 진나라에 빼앗길 것이고, 위나라는 쇠약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대화는 앞날을 예견한 것이다. 전국시대 말기사람들의 그 시기에 대한 견해로 보인다. 왜냐하면 오기의 당시 전략에 따르면, 서하의 땅을 건거지로 하여, 서쪽으로 계속 전진하면 진나라를 소멸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전국시대의 초기에 변법자강을 실현하여 전성기에 이른 수퍼강국으로서 위나라는 실력이 충분했었다.
아쉽게도 위문후, 위무후는 명확한 전략목표를 설정하지 못했다. 국력을 쏟아부어서 만든 위무졸(魏武卒)이 확실히 여러번 승전을 거두었지만, 실질적인 이득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심가로서, 동료의 배척을 받아, 정치적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자신의 포부를 실현한 수 없게 되면, 과감하게 또 다른 주군을 찾아나서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위무후는 인재를 중시하는 방면에서, 확실히 그의 부친 위문후만 못했다. 일찌기 그가 태자로 있을 때, 전자방(田子方)은 이렇게 가르친 바 있다:
"신분이 낮은 사람은 위나라에서 행위가 서로 맞지 않고,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초나라, 월나라로 가서 먹을 거리를 찾을 수 있다. 그건 짚신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다. 부귀한 사람들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때는 선비들에게 국적은 있지만, 직장에 국경은 없었던 시기이다. 일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나라로 가서 일하면 된다. 그것은 아주 정상적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오기가 위나라를 떠난 원인인 것이다.
후기
전국시대의 위나라는 명실상부한 인재의 나라였다. 외국의 인재를 계속하여 흡수하고, 인재를 배양했다. 그러나 위무후이후, 인재의 유출은 위나라에게 벗어날 수 없는 저주가 된다.
예를 들어, 행정분야의 인재로는, 진나라를 변법을 통해 탈태환골하게 만든 상앙(商鞅), 그리고 진나라를 위해 '원교근공(遠交近攻)'의 통일전략을 세운 범수(范睢)가 있다.
외교방면의 인재로는 진나라에 연횡으로 합종을 깨트리게 해준 장의(張儀), 그리고 서하의 땅을 빼앗아온 공손연(公孫衍)이 있다.
뛰어난 장수로는 병가의 아성(亞聖) 오기, 오국연합군을 지휘하여 거의 제나라를 멸망시킬 뻔했던 악의, 병가의 계성(計聖) 손빈(孫臏), 병가의 위성(尉聖) 위료(尉繚)가 있다.
그들중 어느 한명만 단독으로 보더라도 그 시대의 대단한 인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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