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최애역사본존(最愛歷史本尊)
소인물이 일약 큰 성공을 거두는 것은 왕왕 찰나간의 일이다.
양희(楊喜)는 원래 한왕(漢王) 유방(劉邦) 휘하의 존재감없는 낭중기장(郎中騎將)에 불과했다. 초한쟁패의 시기에 한신(韓信), 관영(灌嬰)등 명장들과 함께 전투에 참가하였지만, 시종 이름을 날리지는 못했다. 기원전202년, 해하지전(垓下之戰)이 발생하고, 항우(項羽)가 오강정(烏江亭)에서 패배하면서, 양희의 운명의 수레바퀴는 조용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때,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항우는 용맹하기 그지없었다. 혼자서 수백명을 상대했다. 다만 대세는 이미 기울었고, 그의 곁을 따르는 사람은 포위망을 돌파하면서 따라온 28기뿐이었다. 이와 비교하면, 한군은 육십만의 병력이 있었고, 그중 적지 않은 사람들은 항우가 예전부터 아는 사람이었다. 단지 일찌감치 한군 진영으로 넘어갔다. 예를 들어, 한군기사마(漢軍騎司馬) 여마동(呂馬童)같은 사람이다. 한군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하여, 한왕 유방(劉邦)은 전투개시전에 이런 약속을 한다: "누구든지 항우를 죽이면, 천금을 상으로 내리고 만호(萬戶)에 봉하겠다."
이때, 항우는 쓴 웃음을 지으면서 여마동과 마주보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칼을 들어 목을 그어 자결한다.
항우가 쓰러지자, 한군 장병들은 순식간에 미친 듯이 날뛴다. 양희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공을 세우기 위해, 그는 후안무치한 약탈자가 되었다. 죽기살기로 싸운 끝에, 그는 마침내 항우의 다리 한짝을 차지한다.
유방은 약속을 지켰다. 양희를 적천후(赤泉侯)에 봉한다. 여마동, 여승(呂勝), 양무(楊武), 왕예(王翳)등 4명도 똑같이 항우의 시신조각을 얻은 공으로 한나라초기 공신록에 이름을 올린다.
이때부터 원래 이름없던 소인물이 항왕의 다리를 꽉 붙잡고 매달린 덕에 천년간 이름을 떨치는 전설적인 명문가문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신기한 점이다.
양희의 화상
1
해하지전 이전에 양희에 관한 기록은 거의 제로이다. 그 정도로 그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다.
<사기>에 양희에 관한 기록은 단지 "낭중기로 한왕2년부터 두(杜)에서 따른다. 처음에 회음후(한신)에 속했다가, 나중에 관영을 따른다. 항우를 참하는데 참여하고, 후가 된다. 천구백호를 받는다."는 등 몇 마디 뿐이다.
여기의 "두(杜)"는 진한시대의 두현(杜縣)으로 그 위치는 개략 오늘날의 섬서성 서안시 안탑구 부근이다. 진한교체기때, 이곳은 함양에 속했으니 경기(京畿)의 땅이라 할 수 있다. 양희는 이곳에서 '낭중기'의 신분으로 한왕 유방을 따른다. 이는 그가 이전에 이미 군대에 들어갔으며, 기병부대에 있었고, 어느 정도 실전경험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낭중기"는 실제 "낭중기장(郎中騎將)"을 줄인 말이며, 진나라때부터 두기 시작했다. <사기>의 기재에 따르면, 낭중기는 "황제가 외출할 때 말을 타고 호위하는 것이 주임무이다" 한나라초기의 명장 번쾌(樊噲)가 처음 유방을 따를 때, 신분이 바로 한군의 낭중기장이다. <한서>의 백관공경직분에 관한 장절에서는 이렇게 언급한다: "낭중령(郎中令)은 진나라 관직이다. 궁전의 문을 관장하고 승(丞)이 있다....낭은 문호를 지키는 임무를 맡으며, 외출시에는 거기(車騎)를 맡는다. 의랑(議郞), 중랑(中郞), 시랑(侍郞), 낭중(郎中)이 있으며.....낭중에는 거(車), 호(戶), 기(騎)의 삼장(三將)이 있다. 질(秩, 녹봉의 등급)은 모두 천석(千石)이다." 즉, 양희는 진나라가 멸망하기 전에는 그 신분이 진왕의 '어전시위'였던 것이다.
<사기>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여름, 사월, 제후들이 병사를 거두고, 각각의 국(國)으로 갔다. 항왕은 병졸 3만을 한왕(漢王)의 나라로 따라가게 했다. 초와 제후가 모은 자 수만명이 두남(杜南) 식중(蝕中)으로 들어간다. 장량은 포중(褒中)까지 배웅하고, 한왕은 장량을 한(韓)나라로 보낸다. 장량은 한왕에게 지나간 잔도를 불태움으로써 제후들이 병력을 훔쳐가지 못하게 하고, 또한 항우에게 동쪽으로 진격할 뜻이 없음을 보이라고 말한다."
유방이 한(漢)을 건국한 시간대를 보면 여기에서의 "사월"은 한원년(기원전206년)의 여름이라 할 것이다. 이 해에 항우의 독축하에 이전에 분봉받은 십팔제후왕은 봉지로 돌아가서 각자 지방을 다스리도록 요구받는다. 한왕으로서 유방은 그때의 봉상에서 파, 촉, 한중등지의 합계 41현을 받는다. 국도(國都)는 남정(南鄭, 지금의 섬서성 한중)으로 했다. 그러나 항우의 분봉천하에 유방은 실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반진거병전에 항우가 추대하고 통제한 "초회왕(楚懷王)" 웅심(熊心)은 각로의 장군들과: "먼저 관중에 들어가는 자를 왕으로 삼는다"고 약속했었기 때문이다. 그 말에 숨은 의미는 누구든 관중을 빼앗으면 각로의 제후들은 그를 미래의 천자로 모시고 복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방은 반진연맹에서 가장 먼저 함양으로 쳐들어가 진나라를 멸망시킨 제후이다. 약속대로라면, 이때의 천하공주는 마땅히 그가 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유방은 처음 함양에 들어갔을 때, 소하, 장량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진나라궁실을 봉쇄하고, '약법삼장'을 반포하여, 관중의 옛 진나라사람들을 예로 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항우의 대군이 들어온 다음 초회왕의 당초 약속은 물거품이 되었다. 항우는 "초회왕은 우리 집안에서 세운 자이다"라는 이유로, 여러 장수들에게 초회왕은 전공이 없으니 천하분봉의 대사를 주도할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항우는 웅심을 "의제(義帝)"로 모시고, 스스로 "서초패왕(西楚覇王)"이 되어, 천하를 분봉한다. 항우의 이런 거동은 각로제후들에 대한 배신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함양에 진입한 후, 항우는 진궁을 불태우고, 진나라에서 투항한 장수 장한(章邯), 사마흔(司馬欣), 동예(董翳)의 세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의 부대를 신안(新安, 지금의 하남성 의마시 이십리포)로 데려가 집단갱살(坑殺)시킨다.
봉지를 분배할 때, 항우는 일부러 유방에게 아직 개발되지 않은 파촉지구를 준다. 동시에 관중의 땅은 장한, 사마흔, 동예에게 준다. 이를 통해 유방의 세력이 동쪽으로 발전하는 것을 억제하였다. 이에 대하여 유방은 분노했지만, 항우의 세력이 크기 때문에 강대강으로 부딛쳐서는 자신이 손해볼 것이 뻔했다. 소하, 장량등이 말리는 바람에 유방은 잠시 꾹 참기로 한다.
그중 항우에 의해 "새왕(塞王)"에 봉해진 사마흔의 봉지는 함양의 동쪽으로 진한시대의 두현을 포함한다. 앞에서 양희가 "낭중기로 두에서 시작했다"는 기록과 이개원(李開元)선생의 연구를 합쳐보면, 초한쟁패때, 호적제도와 징병제도는 여전히 진나라제도를 쓰고 있었으므로, 초, 한 양군의 구성원은 대부분 출신지 혹은 인근현에서 직접 군대에 가입했을 것이다. 이때의 양희는 아마도 이전의 함양보위전에서 요행히 살아남아 출생지인 두현으로 돌아와서 농사를 짓고 있었을 것이다. 그후 진한시대는 전민개병시대이므로, 항우에 의해 두의 땅에 주둔하는 부대에 다시 편입되고, 사마흔 군대내에의 기장으로 있었을 것이다.
유방이 공공연히 항명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항우는 특별히 삼만의 초병을 보내어 유방을 봉지까지 호송한다. 유방이 파촉으로 가는 길은 "두남에서 식중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식(蝕)'은 <사기집해>에 따르면, '한중으로 들어가는 길 골짜기의 이름이다.' 그리고 두남은 두현의 남쪽이라는 뜻이다.
유방이 두현남쪽을 통해 한중으로 들어가려면 가장 빠른 길은 장안에서 파촉, 한중으로 연결되는 중요도로인 자오도(子午道)이다. 그러므로, 유방이 처음 군대를 이끌고 가면서 아마도 새왕 사마흔의 주둔지를 지나갔을 것이고, 당시 명을 받아 이곳을 지키고 있던 양희와 한번 만난 인연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방은 그곳에 머무를 수 없었다. 항우의 그에 대한 의심을 해소시키기 위해, 그는 장량의 계책에 따라, 한중으로 넘어가면서 잔도를 불태워버린다. 이를 통해 항우에게 자신 및 휘하의 십만한군은 다시는 관중으로 나오지 않겠다는 암시를 전한다.
항우는 이로 인해 유방에 대한 경계를 잠시 늦추게 된다.
2
유방이 관중을 막 떠났을 때, 항우의 분봉에 불만을 가졌던 제후들도 들고 일어난다. 그중 가장 기세가 컸던 것은 제(齊)나라의 귀족 전영(田榮)이라 할 수 있다.
전영은 진나라말기의 의사(義士) 전횡(田橫)의 형이다. 일찌기 그는 전횡, 당형(堂兄)인 전담(田儋)등과 함께 제나라의 근정묘홍(根正苗紅)의 종실이다. 진나라가 육국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할 때까지. 나중에 진승(陳勝), 오광(吳廣)이 대택향(大澤鄕)에서 진나라에 반기를 들었을 때, 전씨 삼형제도 바로 뒤를 따라 산동에서 제나라를 복국시킨다. 전담이 제왕이 되어, 육국의 귀족들이 진나라에 반기를 드는 서막을 열게 된다.
다만, 그후 천하쟁탈과정에서, 전담은 진나라장수 장한으로부터 집중공격을 받는다. 쌍방이 교전할 때, 전담은 불행히도 진나라군대의 야습에 당해 전사하고 만다. 전담이 죽은 후, 진나라에게 통치받기를 원치 않는 제나라의 옛신하들은 공동으로 전국시대 마지막 제왕 전건(田建)의 동생인 전가(田假)를 신임 제왕으로 모신다.
이에 대해 전영은 크게 분노한다. 그가 보기에 제나라의 '부흥'은 그들 전씨삼형제가 밤잠을 자지 않고 죽어라 싸워서 얻어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전가가 그 과실을 따가려 하니 이는 정의에 맞지 않는다. 그는 여러번 초나라에 반진연맹의 맹주로서의 작용을 발휘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가짜제왕 전가를 위시한 제나라귀족들을 처벌해달라고 한다. 그러나 그때 막 초나라복국을 완성한 항량, 항우는 제왕이 제나라땅에서 가장 강력한 호응을 받고 있으므로, 전가를 주살하게 되면, 각 제후들의 신뢰가 무너질 수 있다고 여긴다.
항씨의 반대는 철저히 전영을 분노하게 만든다. 그는 전담의 옛부하들을 끌어모아 신속히 제나라땅으로 쳐들어가서 전가를 무너뜨리고 전담의 아들 전불(田巿)을 제왕에 앉히고, 스스로 승상(丞相)이 된다.
반진투재의 범위가 점차 확대되면서, 진나라는 문제의 심각성을 의식하게 된다. 장한이 이끄는 "여산군단(驪山軍團)"은 즉시 방향을 동쪽으로 바꾸어 황하하류지역에서 진승, 오광 및 제, 위 연합군을 맞이해 싸운다.
소식을 들은 항량은 초군에게 지원을 가도록 명하나 장한의 계책에 말려들어, 정도(定陶, 지금의 산동성 하택)으로 전전하면서 옹구(雍丘, 지금의 하남성 기현)를 탈취한다. 항량의 의도는 전과를 확대하는 것이어서, 사람을 보내 제나라에 도움을 구한다. 그러나 전영은 초나라에서 반드시 전가를 죽여야 제나라는 출병하겠다고 말한다. 그 결과 초군은 고귀한 기회를 잃게 된다. 그리고 진나라는 전국의 병력을 총동원하여 장한을 지원한다. 항량은 오만함과 자신감과잉등의 이유로 장한에게 패배하고 전투중 전사한다. 전영은 이로 인하여 항우와 원한을 맺게 된다.
항우의 패업이 완성되면서, 전영의 좋은 시절을 끝이 난다.
제후를 분봉할 때, 항우는 제나라를 셋으로 나누어, 원레의 제왕 전불은 즉묵(即墨)으로 보내 교동왕(膠東王)에 에봉하고, 전가를 옹립하여 등극시킨 전씨종실 전도(田都), 전안(田安)을 각각 제군(齊郡)과 제북군(齊北郡)을 근거지로 하여 제왕(齊王), 제북왕(濟北王)으로 봉한다. 이렇게 분봉하는 것은 명백하게 전영을 겨냥한 것이다. 항우는 제후왕들에게 각각 자신의 봉국으로 가도록 한다. 불만을 품은 전영은 병력을 보내 제왕 전도와 제북왕 전안을 공격하여 죽이고, 삼제의 땅을 다시 교란시킨다.
이때 교동왕으로 봉해진 전불은 마음 속으로 두렵기 그지없었다. 항우는 사람됨이 '강포(强暴)'하므로, 만일 자신이 교동으로 가지 않아서 일단 항우가 병력을 일으키면 교동왕의 자리조차 보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전영의 입장에서는 죽기를 겁내는 짓이다. 당형인 전담이 수십만 진군의 포위공격에도 전혀 두려움없이 끝까지 싸우다가 죽었는데, 어찌 지금 그 아들 전불은 그저 눈앞의 영화부귀만 누릴 생각을 하고 있단 말인가.
분노한 전영은 즉묵까지 추격하여, 직접 전불을 살해하고, 스스로 제왕에 앉는다. 그후 전영은 반초(反楚)의 깃발을 내걸고, 조나라의 장수 진여(陳餘)와 연합하고, 그리고 위나라땅을 받아 이미 만여명의 인마를 거느린 팽월(彭越)로 하여금 제음(濟陰)에서 거병하게 함으로써 항우의 국면을 교란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전영이 전혀 생각지 못하게도, 그의 반항은 단지 유방에게 도움을 주는 결과를 맞이한다.
유방이 촉에 들어간 후, 군심은 시종 동요하고 있었다. 그가 이끄는 한군은 패현(沛縣)사람이 위주였다; 그외에 항우가 그에게 보내준 3만의 초병은 조적이 대부분 황하, 회하일대였다. 생활습관이나 언어습속이 모두 현지의 백성들과 맞지 않았다. 그리하여 많은 한군의 장병들은 유방이 거병하여 서정에 나섰을 때, 몰래 부대를 빠져나가 고향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중에는 당시 한군의 물자보급을 책임지던 치속도위(治粟都尉) 한신(韓信)도 들어 있었다.
이건 한신이 처음 '탈영'한 것이 아니었다. 일찌기 한중으로 가는 길에 평생 양초를 관리감독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던 한신은 떠날 생각을 한다. 그는 밤을 틈타 한군의 군영을 빠져나왔으나 한군의 도망병을 체포하는 소분대에 체포되고 만다. 다행히 형을 받을 때, 말솜씨를 이용하여, 책임자 하후영(夏侯嬰)을 교묘한 말로 설득하여 죽음을 면하고, 한나라 승상 소하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다.
이번에는 한신이 떠날 생각을 굳혔다. 그러나 소하가 한신을 떠나지 못하게 하려는 마음은 더욱 강했다.
한신이 부대를 떠나려한다는 말을 듣고,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말을 타고 쫓아간다. 그리하여 유방과 수하장병들까지 상국이 한왕을 떠나려 한다고 여겨서, 사기가 한때 극히 가라앉는다. 다음 날, 한신을 설득하여 군영으로 돌아오게 만든 소하는 비로소 유방에게 모든 것을 설명하고, 다시 한번 한신을 대장으로 삼도록 추천한다.
유방은 사람들의 체면을 생각하여, 할 수 없이 한신을 대장으로 삼는다. 그러나 한신은 유방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당시의 천하형세에 대하여, 한신은 이렇게 판단했다. 유방과 항우를 비교하면, 쌍방의 병력이나 일대일의 '필부지용'이나 모두 같은 수준이 아니다. 다만, 항우의 결점도 아주 치명적이다. 즉, "항왕이 지나간 곳에는 죽은 자만이 만는다. 천하에서 원망하는 사람이 많고, 백성들이 그에게 귀부하지 않는다. 그저 그의 위세때문에 억지로 복속하고 있을 뿐이다. 이름은 비록 패(覇)이지만 실은 천하의 마음을 이미 잃었다."
한신의 말에 유방은 실력과 민심 사이에서 오랫동안 고민해보다가 최종적으로 의연히 초한쟁패의 길로 나서게 된다.
3
한원년(기원전206년) 팔월, 유방이 한중을 나와 삼진(三秦)을 평정한다.
한신의 모략에 따라, 한왕은 천하를 빼앗을 것을 도모한다. 먼저 철통같은 한중, 파촉등지를 벗어나 민심의 옹호를 받는 관중으로 나가야 했다. 그리고 다시 팔백리 진천(秦川)의 우세를 이용하여 이전양전(以戰養戰)하면서 동쪽으로 항우의 서초세력과 결사전을 벌이기로 한다.
이 전략은 소하가 처음 내놓은 것이다. 일찌기 유방이 촉으로 들어갈 때 소하는 이렇게 건의한 바 있다: "그 백성을 잘 기르고 현인을 모시면서 파, 촉을 거두고 삼진을 평정하면 천하를 도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전쟁에 나선 적이 없던 소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한신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 자오도는 이미 불태워버렸다. 한군이 진령(秦嶺)을 넘으려면, 서쪽에서 동쪽으로 진창도(陳倉道), 기산도(祁山道), 포사도(褒斜道)로 관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세 개의 고촉도(古蜀道) 중에서, 포사도는 진한시기 한중, 파촉을 관중평원과 연결시키는 가장 중요한 경제통로였다. 그리고 기산도와 진창도의 출발지는 모두 진창(陳倉, 지금의 섬서성 보계)이다. 유일하게 다른 점이라면 기산도는 휘(徽, 지금의 감숙성 휘현), 성(成, 지금의 감숙성 성현분지를 지나가야하고, 가릉강(嘉陵江)의 서쪽 수원이 감숙예현의 기산일대로 흘러가는 길을 따라가야 하기 때문에 거리가 비교적 멀다.
그래서, 한군은 진창도를 통해 관중을 기습하는 것이 한신이 내놓은 계책이었다.
관중의 상대방을 미혹시키기 위하여, 한신은 두 가지 준비를 한다: 한편으로 사람들을 시켜 불태워버린 자오도를 복구하게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포사도의 노면을 확장시키게 한다. 유독 그가 가고자하는 진창도만은 남겨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한신의 거동에 한때 옹구를 수비하던 장한은 유방이 곧 포사도로 나와 그의 기반을 침범할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한신이 두 개의 잔도를 수리하는 동안, 진창도를 통해 병력을 관중으로 이동시켜, 장한, 사마흔, 동예등 진나라에서 투항한 3명의 장수들을 기습할 줄이야. 세 사람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사마흔, 동예는 그 자리에서 유방에게 투항한다.
이 전투를 통해, 유방은 관중에서 확실하게 명망을 떨친다. 그리하여 항우에 의해 세워졌거나 스스로 자리잡은 제후들은 속속 유방을 지지하게 된다.
사마흔과 동예이후, 하남왕 신양(申陽), 서위왕 위표(魏豹), 한왕신(韓王信)등 여러 세력이 연이어 유방에 귀순한다. 동쪽전선에서 항우에 저항하는 제왕 전영, 대왕(代王) 진여, 조왕(趙王) 조헐(趙歇)등과 연합하여 천하대세는 유방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항우는 이때 제초(齊楚)전쟁으로 다른 곳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유방은 한2년(기원전205년) 사월, "오제후지병(五諸侯之兵)"으로 동정을 시작한다. 직접 항우의 근거지인 팽성(彭城, 지금의 강소 서주)으로 향한다. 유방은 굳게 믿고 있었다. 팽성만 점령하면, 천하는 그의 것이 된다고.
사실은 증명한다. 유방은 자신감이 지나쳤다고.
항우의 용병은 비록 한신, 장량등의 운주유악(運籌帷幄), 신기묘산(神機妙算)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천하군웅들이 함께 모여있을 때도 서초패왕으로 천하를 호령할 수 있었으며, 절대로 남다른 용맹함과 모든 것을 돌보지 않고 돌진하는 힘에만 의존하지는 않았다. 한신의 말에 따르면, 항우는 "용한인강(勇悍仁强)"에서 모두 유방보다 뛰어났다. 항우수하의 병사들은 강동자제를 제외하면 대부분 원래의 대진의 예사(銳士)들이다. 예를 들어, 장한이 항우에게 투항할 때, 그의 휘하에 있던 진나라의 기병은 모조리 항우의 휘하로 들어갔다. 한편 유방의 휘하에 있는 한군은 초기의 패현자제병이건 나중에 거둔 각로의 의병이건, 기본적으로 모두 '졸(卒)'리고 보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보병으로 기병과 싸우면 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리하여, 유방은 자신만만해 하면서 직접 힘들게 조직한 '오제후'의 근 육십만대군을 이끌고 팽성으로 쳐들어갈 때, 항우는 겨우 3만의 정예기병으로 마치 호랑이가 양떼들 속에 들어간 것처럼 유방 휘하의 정예를 깨끗이 쓸어버린다. 소하는 어쩔 수 없이 긴급히 영을 전하여 "관중의 노인, 미성년자도 모조리 형양(滎陽)으로 보내라"고 하게 된다. 그 의도는 관중의 인력, 물력을 동원하여 항우에 대항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유방이 순조롭게 인마를 모으기도 전에, 일찌기 스스로 유방에게 귀순했으며 그를 따라 전선까지 왔던 새왕 사마흔, 적왕 동예, 조왕 조헐, 대왕 진여같은 류는 경궁지조(驚弓之鳥)처럼 속속 항우의 편으로 돌아서서, 유방의 적이 된다. 그리하여 유방의 처지를 더욱 곤경에 빠지게 만든다.
그러나, 이번 전투는 유방에 있어서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현존하는 사료로 추단해보면, 새왕 사마흔, 적왕(翟王) 동예가 항우에 투항할 때, 그의 수하에는 병졸 한명도 없었다. 즉 사마흔, 동예가 항우에게 투항한 것은 단지 개인적 행위이고, 대규모의 군대가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유방은 관중을 점령한 초기, 사마흔과 동예의 군권을 박탈했지만, 여전히 항왕이 하사한 왕의 칭호는 남겨두었다. 바로 그러했기 때문에, 사서에는 계속하여 새왕, 적왕같은 칭호로 사마흔과 동예를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실제로 실력에 있어서 그들은 단지 필부일 뿐이었다.
새왕, 적왕이 항우에 귀순한 것은 유방에게 위협이 되지 못했고, 정반대로 그들이 남겨둔 구진군부대는 유방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한군이 계속하여 초국의 기병에게 치욕을 당하자, 유방은 관중의 노인과 미성년자들을 전선으로 지원받는 동시에, 군대내에 하나의 명령을 하달한다: "군대내에서 말을 탈 수 있는 자"를 골라, 한군기병부대를 조직하라.
명령이 하달된 후,한군내에서는 기병장령을 추천하는 붐이 일어난다. 군대내에서 많은 사람들은 옛진군의 기병 이필(李必), 낙갑(駱甲)을 기병교두로 추천하여, 기병의 조직과 훈련을 맡기게 된다. 이필,낙갑은 중천(重泉, 지금의 섬서성 포성) 사람이다. 중천은 사마흔이 다스린 삼진시대의 새국에 속했고, 새국의 도성인 역양(櫟陽, 지금의 서안시 염량구)의 인근현이다. 그러므로, 이필, 낙갑의 이전 '주공'은 아마도 사마흔이었을 것이다.
이필,낙갑은 구 진나라기병장령으로 한군내에서 명성이 점점 높아진다. 양희도 이 두 사람과 비슷했을 것이다. 그도 아마 한군의 기병장수중 하나로 뽑혔을 것이다. 그러므로, 양희가 "낭중기로 한왕2년 두에서부터 따랐다"는 것은 아마도 이 일을 이야기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필, 낙갑 두 사람은 손쉽게 이 중임을 맡을 수가 없었다. 그건 능력문제가 아니라, 출신문제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필, 낙갑은 자신들이 "옛 진나라백성으로 한군에서 우리르 신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유방은 그리하여 심복 관영을 이 기병부대의 총사령관에 앉힌다. 그리고 이필, 낙갑 두 사람이 보좌하게 한다. 이들은 병력을 모집하고 말을 구매하고 군대의 기승술훈련을 시키는등의 임무를 맡았다. 그리하여 후세에 '관영기군(灌嬰騎軍)'으로 불리는 한군의 신속대응부대가 정식으로 탄생하게 된다.
조직된 날로부터, '관영기군'의 전투력은 남달랐다. 먼저 천리동쪽까지 기습하여 형양의 포위망을 풀어준다. 그리고 다시 초나라장수 항관(項冠), 환영(桓嬰)과 싸우고, 한신을 따라 제나라를 정벌하는데 모조리 승리를 거두어 명성을 사방에 떨친다. 해하지전에 이르러 두 차례 항우를 대패시키고, 일대패왕을 오강가까지 몰아가고나서야 비로소 잠시 전쟁터에서 물러난다.
4
여러 해동안 조용히 지내다가 한군기병의 일원이 된 양희는 마침내 운명을 바꿀 기회를 맞이했다.
<사기>기록에 따르면, 한5년(기원전202년) 십이월, 항우는 밤을 틈타 남은 8백명의 기병으로 해하에서 포위망을 돌파한다. 도중에 관영이 이끄는 5천기병으로부터 제지당한다. 항우는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물러나서, 회하를 건너고, 음령(陰嶺)을 지나, 전투는 장강북쪽의 동성(東城)에까지 이어진다. 이때 항우의 곁에는 겨우 28명만이 남았다.
이때 관영의 기병도 추격해왔다. 양희가 처음 사서에 이름이 나오게 된다. <사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때, 적천후(양희)는 기장(騎將)으로 항왕(항우)를 추격했고, 항왕은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적천후는 사람과 말이 모두 놀라서, 두려움에 몇 리를 물러난다. 그리고 그의 기병들과 세 곳에서 모인다." 항우는 용맹함으로 양희를 말과 사람이 모두 놀라 수리를 물러나게 만든다. 이런 기세는 후세 <삼국연의>의 장비(張飛)가 장판교(長板橋)에서 소리치자 놀란 하후걸(夏侯傑)이 말에서 낙마하여 죽은 경우와 유사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양희는 하후걸이 아니다. 그는 백전노장으로, 전쟁터에서 피를 맛보며 성장한 기병장수이다. 하물며 당시의 항우는 이미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었다. 그리하여 양희는 놀라서 물러난 후 다시 병력을 이끌고 항우를 향하여 몰려갔다. 항우는 어쩔 수 없이 자결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한군은 항왕의 시신을 서로 가지려고 다툰다. 그리하여 다시 수십명이 사상당한다. 결국 항우의 시신은 다섯으로 나뉘어져 낭중기 양희, 기사마 여마동, 낭중 여승, 양무, 낭중령 왕예의 5명이 각각 나누어가진다. 양희는 이 공로로 적천후에 봉해지고, 한나라초기 군공집단의 공신이 된다.
사실상 이상의 기록을 보면, 양희는 가장 먼저 항우의 종적을 발견한 한군의 기병장령이다. <사기>의 내용은 많지 않아, 양희는 별다른 인물이 아니었는데, 사건참여자의 중요정도로 보면, 만일 그가 필수적인 역사의 목격자, 참여자가 아니라면 사마천은 그저 가볍게 언급하고 지나가면서, 항우를 추격한 기병장령 및 나중의 적천후 양희를 언급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 원칙은 사마천이 <사기.태사공자서>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내가 고사를 '기술(述)'하는 것은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을 온전하게 하려는 것이며, '지어낸(作)' 것이 아니다(余所謂述故事, 整齊其世傳, 非所謂作也)" 여기서 '술(述)'은 기술하다 환원하다는 뜻이며, '작(作)'은 창작하다 창조하다라는 의미이다. 이를 보면 사마천은 <사기>는 '술'이며, 역사사실을 기술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양희가 해하전투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에 대한 유일한 해석은 그가 항우를 추격하는데 불세의 공을 세워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하여 그에 대한 상으로 그의 상사인 왕예, 여마동등을 제치고 <사기>에 활약상을 남기게 된다.
아쉽게도 한나라초기 공신인 양희는 '무명지배'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해하전투이후 다시 역사에서 사라지고, 특수한 때에 다시 가끔 역사책에 등장하게 된다.
5
서한왕조가 건립된 후, 초한전쟁때 공로를 세운 장수들은 속속 신왕조의 제후가 된다.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한왕조는 진나라의 옛제도를 그대로 이어받고, 진나라가 망한 교훈을 받아들여, 군국병행제(郡國幷行制)를 추진하여, 각 제후국에 충분한 자주권을 주었다. 원래 통일되었던 경제체제는 제후국이 현지사정에 맞게 자체적으로 발전하는 다원체계로 변모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군공을 세운 공신을 주체로 하는 정치집단이 탄생하게 된다. 한고조 유방이 한나라를 건립한 때로부터 한무제에 이르는 수십년간, 이 집단은 시종 한나라의 정계에서 활약하고, 정국을 좌우하는 중요한 역량이 된다.
이런 배경하에서, "한나라초기 군공으로 혜택을 받은 계층"인 적천후의 가족은 많은 혜택을 누린다. 다만, 번쾌, 관영등 유방에 대해 가장 충실했던 심복들과 비교하면, 양희와 그 가족은 지도자에 대한 시종일관하는 절대충성심은 갖추지 못했다. 그리하여, 역사적으로, 적천후는 분봉된 때로부터 여러번 한나라통치자로부터 탄압과 배척을 당한다.
양희 본인은 고후원년(기원전187년) 작위를 박탈당했다가, 나중에 다시 회복된다. 그후, 양희의 손자인 양무해(楊毋害)는 "사기죄로 육백냥을 편취하여" 사기죄로 한경제때 작위를 박탈당한다. 그후 다시 임여후(臨汝侯)로 바꾸어 봉해지고, 한무제때에 이르러 죄로 인해 철저히 작위는 철폐된다.
한나라초기 군공집단의 세력은 아주 컸다. 한나라초기 상품경제가 부활하는 배경하에서, 법규의 헛점을 이용하여 경제범죄를 저질러 폭리를 도모하는 자가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주언서(奏讞書)>에 기재된 "예양령회(醴陽令恢)"는 "예양의 향관미 이백육십삼석 팔두를 훔쳐, 사인 흥, 의로 하여금 판매하게 하여 금 육근삼량, 전 만오천오십을 얻었다." 이 일이 발각된 후에 처벌을 받는다. 이 예양현령의 작위는 좌서장(左庶長)으로 한나라초기 20등급의 작위중 11급이었다. 양희의 적천후보다 훨씬 낮은 직위였다. 그러나 그가 횡령한 금액은 훨씬 컸다.
양무해는 겨우 "육백전"의 사기죄를 저질렀다니, 이는 공신집단내에서는 우스개거리에 불과하다. 다만 이는 다른 한편으로 적천후 양희는 시종일관 그저 '허명(虛名)'뿐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설사 그가 항우의 다리 한쪽을 얻어 제후에 봉해졌지만, 한타라초기 군공집단내에서는 그저 별볼 일 없는 인물에 불과했던 것이고, 근본적으로 가족전체의 신분상승을 가져올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적천후의 가족이 '가난했기' 때문에, 한무제에 의해 작위를 철저히 박탈당한 후, 비로소 개국공신의 영광을 지닌 양씨가족은 철저히 바닥을 찍고 분발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양무해의 작위가 박탈된 후, 그의 아들 양창(楊敞)은 서한의 정계에서 활약하기 시작한다. 양창은 관직에 오르기 전에, 홍농화음(弘農華陰, 지금의 섬서성 화음)에 살았다. 그리하여 그가 성공한 후 양희에서 시작된 양씨가족을 세상사람들은 "홍농양씨(弘農楊氏)"라고 부르게 된다.
적천후의 후인으로서, 양창은 공신후손의 혜택은 누리지 못한다. 그가 이름을 떨친 것은 운좋게도 대장군 곽광(霍光)의 막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곽광이 권신으로 정권을 좌지우지할 때 관직이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오르고, 안평후(安平侯)의 작위에 봉해진다.
한소제(漢昭帝)가 죽은 후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가 즉위한다. 그러나 유하 본인이 너무 나대는 바람에 곽광과의 갈등이 날로 격화되었고, 곽광은 창읍왕을 폐위시키고 한무제의 증손인 유병이(劉病已)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고자 했다. 곽광은 대사농(大司農) 전연년(田延年)을 양창에게 보내 의견을 묻는다. "양창은 놀라고 두려워 어떻게 말해야할지 몰랐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으며, 그저 네네할 뿐이었다."
양창은 조십스럽고 담량이 작았다. 그리하여 그의 처는 그를 무시했다. 양창의 처는 바로 태사공 사마천의 딸인 사마씨이다.
사마씨가 나서서 바로 말한다. 곽광은 집정한지 오래되었고, 지위가 공고하다. 사람을 보내어 양창의 의견을 물은 것은 그저 절차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양창이 정말 반대의견을 낸다면, 나중에 양씨가족에 큰 후환이 닥치게 될 것이고, 사마씨가족도 아마 멸족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사마씨의 협조하에, "양창, 부인은 전연년에게 동의한다는 말을 전하고 대장군의 명령을 받들겠다고 한다. 그리하여 함께 창읍왕을 폐위시키고, 한선제를 옹립한다."
바로 이런 정치투기로 마침내 양희에서 시작한 양씨가족은 한선제시대에 흥성하게 된다.
양창은 한선제가 즉위한 한달후에 병사하고, 그의 아들 양충(楊忠)이 작위를 계승한다. 한선제는 양창부부가 나라를 안정시키는데 공이 있다고 생각하여, 양충에게 식읍 삼천오백호를 추가해준다. 이렇게 하여 새로운 명문집안이 나타나게 된다.
조정이 '철거제(察擧制)'의 형식으로 지방에서 인재를 선발하여 관료로 등용하는 것이 통상적인 방식이 된다. 서한사회는 이때부터 가문을 중시하고, 향리의 문화건설과 실력강화에 힘쓰게 된다. 그리하여 종친을 돌보고, 고향을 도우며, 가족의 종학문화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양한시대에 각 대세가(大世家)가 발전하는 관건이 된다.
한무제이래로 독존유술(獨尊儒術)함에 따라, 각 대세가는 가족의 명성을 이어가기 위하여, 가학전통의 '유학화'는 필수적인 추세가 된다. 양창의 또 다른 아들인 양운(楊惲)은 '외조부(즉 사마천)의 <태사공기>를 읽고, <춘추>에 특히 뛰어나서 재능이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여러 유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조정에 명성을 알려, 좌조(左曹)로 발탁된다." 이를 보면, 유학수양은 양휘가 성공한 관건이다. 이 모든 변화는 한나라때 유학문화에 대한 정치적 수요에서 기인한다.
양창을 이어, 양씨가족은 인재를 배출한다. "관서공자(關西孔子)"로 불리던 저명한 유학자 양진(楊震), 그리고 태위(太尉) 양병(楊秉), 태위 양표(楊彪) 및 승상주부(丞相主簿) 양수(楊修)등이 있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삼공의 요직에 앉는다. 그리하여 후세에 이때 흥성하기 시작한 양씨가족을 "사세삼공(四世三公)"의 집안으로 불렀다.
수(隋)나라에 이르러, 수문제 양견(楊堅)이 스스로 홍농양씨 후손이라고 말한다. 그는 오대조 양원수(楊元壽)가 적천후 양희의 십오대손이라고 말했다. 이 주장은 약간 견강부회의 의심이 들기는하지만, 홍농양씨가 기나긴 역사에서 심원한 영향력을 지녔음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일개 소인물인 양희는 항왕의 다리 한쪽을 가지고 천년간 이어지는 전설을 만들어냈다. 거기에는 시대의 기연을 만난 우연성도 있다. 역사의 발전은 그 논리적인 체인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왕왕 별 것아닌 순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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