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최애역사(最愛歷史)
안사의 난(安史之亂)이후, 당나라는 이미 "부고모갈(府庫耗竭, 국고를 소모하여 고갈되다)", "금군미약(禁軍微弱)"의 곤경에 빠진다. 그러나, 제오기(第五琦), 유안(劉晏), 양염(楊炎)등 이재(理財)대가들의 노력을 거쳐, 당덕종 즉위초기인 건중원년(780년)의 국고세수는 이미 1305만관곡(貫斛)에 이른다. 정상적인 세입외에 매년 700만관곡에 이르는 염리(鹽利)세수도 있었다.
그의 부친 당대종(唐代宗)의 즉위초기와 비교하면 국고수입은 몇배로 늘었다.
이런 자금은 당덕종의 허리를 튼튼하게 만들었고, 그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삭번(削藩)"전쟁을 시작한다.
그는 큰 일을 하고자 했다(大幹一場). 그러나 역사는 오히려 이를 피동문장으로 바꾸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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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사의 난 이후, 당나라는 구안(苟安, 눈앞의 안정)을 추구하여, "하북(河北)의 땅을 나누어 반란에 가담했던 장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하여 안록산과 사사명의 부하장수들은 조정을 도와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병력을 거느리며 한 지방에 할거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중앙과 소원해진 하삭사진(河朔四鎭, 즉 成德, 魏博, 平盧, 盧龍)절도사는 바로 그런 전형적인 경우였다.
일찌기 직접 병력을 이끌고 안사의 난을 토벌하는데 참가했던 천자로서, 당덕종은 일찌감치 번진할거(藩鎭割據)가 중앙집권통치에 얼마나 위협이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즉위한 때부터, "삭번"에 주력했다. 심지어 전쟁을 벌이는 수단마저 마다하지 않았다. 번진절도사의 수중에서 일찌기 대당천자에 속했던 무상통치권을 빼앗아오는 것이다.
건중2년(781년) 정월, 성덕절도사 이보신(李寶臣)이 병사하고, 그의 아들 이유악(李惟岳)이 조정에 부친의 직위를 세습하여 계속하여 번진을 관리할 수 있도록 간청한다. 이보신은 일찌기 안록산에게 인정을 받아 의자(義子)로 거두어졌으며, 전투에서는 아주 용맹했다. 나중에 안록산 사사명의 세력이 약화하자 전승사(田承嗣), 이회선(李懷仙)등 반란에 가담했던 장수들과 함께 당나라조정에 투항한다.
이처럼 조정의 말을 듣지 않는 번진에 대하여, 중당(中唐)의 조정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모두 신하를 보내어 위로하고, 그 아들의 청구를 받아주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당덕종은 이번에 결심을 굳힌다. 그리하여 이유악의 상소가 올라오자마자 그 자리에서 회신을 내려보낸다. 이보신의 부장(部將) 장효충(張孝忠)으로 하여금 잠정적으로 성덕절도사를 대리하도록 하고, 이유악에게는 조정에서 보낸 사신과 함께 장안으로 와서 명을 기다리도록 한다.
이유악은 잘 알았다. 일단 입조하게 되면, 조상이 물려중 지방은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게 된다는 것을. 그리하여 사산이 아직 도착하기도 전에, 이유악은 휘하장령들에게 지시하여 연명으로 상소를 올리게 한다. 이렇게 당덕종에게 압력을 가하고, 조정으로 하여금 아들이 부친의 업을 잇는데 동의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당덕종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성덕군진과 조정간에는 사이가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 더더구나 위박군절도사 전열(田悅, 전승사의 조카)와 평로절도서 이정기(李正己)등도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하삭사진은 서로간에 평상시에는 마찰이 있기는 했지만, 근원적으로 보면, 그들은 모두 기암투명(棄暗投明)한 안록산 사사명의 옛부하들이다. 이보신, 이유악부자의 출신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조정이 현재 이렇게 '이유악'을 박대하자, 그들도 걱정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삭사진의 좋은 시절은 이제 끝났다. 목숨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마찬가지로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하는 산남동도(山南東道)절도사 양숭의(梁崇義)와 연락하여, "병력을 거느리고 조정의 명을 거부하자고 몰래 모의했다"
당덕종은 위박, 평로등 진의 태도를 보고나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표시한다. 이유악등은 조정의 명을 어길 생각을 하고 있다. 설사 오늘은 아무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향후 반드시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대당천자의 태도가 이토록 확고하자. 이유악, 전열, 이정기, 양숭의는 더 이상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사진의 난(四鎭之亂)"을 일으킨다. 천하는 다시 한번 전화에 휩싸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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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4진중에서 3개가 반란에 가담하고, 게다가 산남동도절도사 양숭의까지 추가되었다. 남북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당덕종도 긴장하여 긴급히 가지고 있는 병력을 배치했다.
이유악등 4진이 반란을 선포한 다음 날, 당덕종은 송주(宋州, 하남 상구), 박주(亳州), 영주(潁州) 삼주를 선무군(宣武軍)으로 하고, 송주자사(宋州刺史) 유흡(劉洽)을 총지휘관으로 삼는다. 이어서, 당시 동도유수(東都留守) 노사공(路嗣恭)을 하양절도사(河陽節度使)에 임명하고, 선무, 하양을 영평군(永平軍)에 예속시킨다. 그렇 북선전장의 군사방어를 맡겨, 이정기를 막는다.
당덕종의 군사배치를 보고, 이정기는 양숭의와 손을 잡고, 병력을 보내어 서주(徐州), 와구(涡口, 지금의 안휘 회원현 회하입구)일대를 막아, 조정의 강회(江淮, 장강과 회수)의 조운(漕運)을 차단하면서, 당덕종을 압박했다. 그리고 멀리 하삭에 있는 위박군절도사 전열은 자신의 지역편의를 이용하여 먼저 병마사(兵馬使) 맹우(孟佑)로 하여금 오천의 보병,기병을 이끌고 북상하여 이유악을 지원하고, 다시 직접 수만대군을 이끌고 한단(邯鄲)을 지킨다. 이를 통해 조정의 대군이 북상하지 못하게 막았다.
"사진(四鎭)"의 기세가 흉흉했지만, 쌍방간의 실력차이는 분명했다. 산남동도의 양숭의를 예로 들면, 당시 그가 점거하고 있던 형양칠주(荊襄七州)는 예로부터 "땅이 가장 편벽되고, 병력도 가장 적고, 법령은 가장 잘 정비되어 있고, 예의도 가장 공손한" 것으로 유명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가 가진 병력은 약했고, 형양의 땅은 백성들의 풍속이 제로(齊魯), 하북처럼 용맹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진"이 난을 일으킨 초기에 양숭의의 부하는 그에게 조정에 투항하고 벌을 받겠다고 청하여 화를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간언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양숭의는 반란을 일으키기로 마음을 확실히 굳혔다. 그가 이전에 존경했던 상사 내전(來瑱)이 황제와 환관에게 미움을 사서 결국 굴욕적으로 죽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설사 성공의 희망이 보이지 않더라도, 그는 더욱 전투준비에 박차를 가해 조정에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양숭의가 혼자 나서서 반란을 일으키자, 회서절도사(淮西節度使) 이희열(李希烈)은 크게 기뻐한다.
이희열은 원래 양숭의와 원한이 있었다. 그는 사람됨이 잔학하고, 형양을 독패하며, 일방을 할거하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다. 일찌기 "사진"이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그는 여러번 당덕종에게 양숭의를 소탕할 것을 건의했지만, 당덕종의 그의 요청에 응하지 않았었다. 이제 당덕종은 이희열에게 양숭의를 토벌하라는 명을 내려준 것이다.
그리하여, 이희열은 양숭의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한다. 회서군이 계속하여 밀고 들어오자, 양숭의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다. 그가 가진 땅이라고는 양양성(襄陽城) 하나만 남게 된다. 양숭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처와 자식을 안고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이렇게 하삭삼진보다 먼저 평정된다.
양숭의가 죽은 후, 일찌감치 형양의 땅을 노리던 이희열은 그대로 차지해버린다. 당덕종은 다시 공부상서(工部尙書) 이승(李承)을 산남동도절도사로 임명하여, 형양을 접수하게 하고, 이희열을 쫓아낸다.
이희열이 조정을 대신하여 양숭의를 토벌한 것은 원래 다른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싸움이 끝나자 조정은 논공행상을 하지도 않고, 오히려 사람을 보내 그를 쫓아버렸다. 이에 그는 분통을 터트리게 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형양일대에서의 기반이 탄탄하지 못함을 고려하여, 할 수 없이 채주(蔡州)로 병력을 물리고, 다시 힘을 기르기 시작한다.
"사진"의 병력은 남북으로 나뉘어 있어서, 전열, 이유악등은 아예 양숭의가 이희열 및 조정과 싸우는 것을 도와줄 수가 없었다.
양숭의의 상황과 유사하게, 이유악에게도 '내부의 적'이 하나 있었다. 그는 바로 범양절도사(范陽節度使) 주도(朱滔)이다. 원래 하삭번진은 같은 편인데, 당대종때 위박절도사 전승사가 모반을 일으키면서, 이보신을 부추겨 범양을 취하도록 해서, 하마터면 주도가 죽을 뻔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주도는 이보신 일가와는 세불양립하겠다고 맹세한다. 이제 이유악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주도는 당연히 복수를 해야 했다.
비록 이유악이 인심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의 수하에는 이보신이 생전에 키운 대장 장효충이 있었다.
장휴충은 군내에서 용맹하기로 이름이 나있었다. 일찌기 오랫동안 범양을 방어하는 책임을 맡아왔다. 그러므로, 주도는 그를 아주 꺼려했다. 이보신이 죽기 전에, 아들 이유악이 순조롭게 승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성덕의 숙장을 여럿 죽인 바 있다. 주도는 이를 돌파구로 함아, 장효충에게 심리전을 전개한다. 이에 장효충은 주도의 말에 따르기로 하고, 조정에 투항한다. 이 사건은 성덕군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얼마 후, 성덕군의 대장 왕무준(王武俊)도 칼끝을 반대로 돌려 이유악을 액살시키고, 그의 수급을 경사로 보낸다.
이때, "사진"중에서 전열, 이정기만이 남아 있었고, 이들은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었다. 다만, 이정기는 나이가 이미 많아서, 양숭의와 연합하여 강회를 봉쇄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다. 그의 아들 이납(李納)은 이유악의 경험을 본받아, 이정기가 죽은 사실을 대외적으로 감추고 계속 자신이 명을 내린다. 그러나 나중에 부장 전정개(田庭玠), 소진(邵眞), 곡종정(谷從政), 이유(李洧), 전앙(田昻), 유평(劉怦)등의 반대에 부닥친다. 그중 이유는 이납의 백부로, 조정에 충성했다. 이납은 자신이 부친의 절도사직을 승계하게 해달라고 조정에 요청했으나, 이유는 당조정에 투항하고, 당군과 함께 이납과 싸운다. 이납은 패배한다. 이렇게 하여 사진중에서 전열 한명만이 남게 된디.
전열의 처지도 별로 좋을 것이 없었다. 하루빨리 내란을 평정하기 위하여, 당덕종은 한편으로 경서번진의 방추병(防秋兵)을 불러들이고, 다른 한편으로 명장 이성(李晟)으로 하여금 신책금군(神策禁軍)을 이끌고 전선으로 달려가게 하여, 마수(馬燧), 이포진(李抱眞)등 동로번진과 합쳐서 공격한다. 여러 곳의 대군이 포위해 들어오자 위박군은 패배한다. 전열은 잔여부대를 이끌고 위주(지금의 하북성 대명)으로 도망쳐서 목숨을 보존하고, 향후 재기를 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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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는 잠시 평화를 회복했다. 당덕종은 자랑스러웠다. 그는 자신이 대당을 중흥시킬 능력이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어진 사태는 그의 예상을 전혀 벗어난다.
"사진"의 난이 평정된 후, 원래 하삭사진의 균형은 이미 깨져버린다. 전쟁전의 약정에 따르면, 원래 하삭진내의 성덕군이 관할하던 항주(恒州, 하북 정정), 정주(定州, 하북 정주), 역주(易州, 하북 역현), 조주(趙州, 하북 조현), 심주(深州, 하북 심주), 기주(冀州, 하북기주), 창주(滄州, 하북창주)의 7개주가 재분배된다.
전쟁전에 주도등이 조정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게 하기 위하여, 당덕종은 이렇게 약속한 바 있다. 반란평정에 가담하는 번진이 전투중에 획득한 성덕군 관할지는 전쟁후에 모두 수복한 번진의 소유로 해준다. 그러나, 전후에 참전했던 번진들이 성덕군의 영토를 나눌 때, 당덕종의 조정의 명의로 성덕군관할지를 국유로 귀속시켜 통일적으로 분배한다.
조정의 통일적인 조치에 따르면, 당덕종은, 정주, 역주, 창주 삼주를 떼어내어 장효충에게 주고 그를 새로운 의무군절도사(義武軍節度使)로 임명한다. 그리고 이유악을 죽인 전 성덕군 대장 왕무준은 항주, 기주의 2개주를 얻는다. 그외에 왕무준의 옛부하이며 성덕군 대장인 강일지(康日知)는 왕무준에게 성을 바치고 투항하라고 권유한 공로를 인정받아 심주, 조주 2개주를 얻는다. 주도는 당덕종이 원래 이정기, 이납에게서 빼앗은 덕주(德州, 지금의 산동성 동릉현), 체주(棣州, 산동성 혜민)를 그에게 나누어주고, 나머지는 모조리 당나라중앙조정이 소유한다.
여기서 알아야 할 점은 주도가 가지고 있는 범양과 덕주, 체주 2개주의 사이에는 성덕, 위박이라는 양대 번진이 놓여 있다는 것이다. 당덕종은 진심으로 그에게 상을 내린 것인지 모르지만, 주도로서는 그저 그림의 떡같은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욱 치명적인 점이라면, 조정의 명령이 내려가자 왕무준이 받기를 거절한 것이다. 왕무준은 자신이 직접 이유악의 목을 잘랐기 때문에 자신의 공이 으뜸이 되어야 하고, 공로는 당연히 장효충보다 높다고 여겼다. 그런데 조정은 장효충의 공을 으뜸으로 보고, 그만 절도사로 임명한 것이니 부당하다는 것이다.
당덕종은 주도, 왕무준등의 불만은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공로가 있는 인원에게 상을 하사한다는 명목으로, 왕무준에게는 삼천석군량을 주도에게 주도록 명령하고, 다시 주도에게는 군대내의 500필말을 마수의 대군에 주도록 명한다. 당덕종의 조치는 더더욱 주도, 왕무준으로 하여금 조정은 삭번할 생각이고, 지금 이유악을 없애고, 이제는 다시 그들을 없애려 한다고 생각한다.
왕무준, 주도등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전열은 한줄기 희망을 느낀다.
전열은 밤을 새워 밀사를 주도에게 보내 연락한다. 그리고 주도에게 자신의 근거지를 지키려면 번진내부가 반드시 단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위가 무너지면, 연, 조는 그저 손쉽게 함락시킬 수 있다" 그뿐아니라, 그는 사자를 시켜 패주(貝州, 하북 청하)의 지도를 보내주면서, 주도가 우의를 회복하려고 원하면, 이 땅을 무상으로 넘겨주겠다고 말한다.
공동의 이익 앞에 주도, 왕무준은 전열과 다시 공동전선을 구축한다. 건중3년(782년) 십일월, 반란평정에 앞장섰던 여러 번진이 다시 반란의 주역이 된다: 주도는 기왕(冀王)으로 칭하고, 전열은 위왕(魏王)으로, 왕무준은 조왕(趙王)으로, 이납은 제왕(齊王)으로 칭한다.
천하가 혼란에 빠져들고, 멀리 채주에 있던 이희열은 스스로 천하도원수(天下都元帥), 태위(太尉), 건흥왕(建興王)에 올라, 양성(襄城, 하남 양성)에서 출병하여 낙양으로 진격한다. 이렇게 북방 여러 번진과 호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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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불꽃이 다시 일었다. 당나라조정이 의존하던 경제동맥, 강회조운이 다시 마비되었다. 당덕종이 생각해낼 수 있는 목숨연장조치는 오직 세제개혁으로 더 많은 돈을 거두는 것뿐이다. 그러나 스스로 총명하다고 여기는 그는 엉터리정책만을 계속하여 시행하게 된다.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당덕종은 "양세법(兩稅法)"에서 취소한 각종 잡세를 다시 거두고, 상세(商稅)를 추가징수한다. 이렇게 세금을 증가시켰지만, 그래도 급증하는 군사비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자치통감>의 기재에 따르면, "예전의 제도에 여러 도의 군대가 출동하면 국고에서 보수를 지급했다. 상부에서는 병사들을 우대하여 매번 출동할 때마다 주육을 추가로 주었고, 현지에서는 급여를 그 가족에게 여전히 지급했다. 한 사람이 세 사람의 급여만큼 받아서, 병사들에게 이익이 되었다. 그래서 여러 군대는 출동하여 경계를 넘어가면 멈추었고, 매달 비용이 백삼여만민(緍)에 이른다. 국고에서 감당할 수 없었다." 당덕종의 삭번전쟁때 군인이 되면 혼자서 전체 가족을 먹여살릴 수 있었다. 이건 이미 '모병제'하의 여러 번진장병들의 컨센서스였다 .이렇게 되니, 전쟁만 발생하면 돈을 뿌려서 부대에 공급해야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일상적인 세금만으로는 군대를 먹여살릴 수가 없다. 그리하여, 당덕종은 명을 내려, 향후 백주를 국영으로 하고, 1곡백주의 판매가격을 3천문으로 하며, 쌀값이 싸지더라도 술값은 1곡당 2천문이하로 내릴 수 없도록 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돈이 드는 삭번전쟁을 감당할 수 없었다. <자치통감>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당시 양하(兩河)에서 병력을 유지하는데 매월 백여만민이 들었다. 국고로도 몇달을 감당하지 못했다." 국고의 적자가 엄청나게 늘면서, 장기적으로 천하의 세금을 추가징수하는 것은 그다지 합리적인 대책이 아니다.
당덕종의 곁에 있던 두 명의 신하 태상박사(太常博士) 위도빈(韋都賓)과 진경(陳京)은 조정에 "차상(借商)"을 건의한다. 그들은 끝도없이 백성들의 부담을 증가시키기보다는, 차라리 경사의 상인들에게서 돈을 뜯어내는 것이 낫다는 것이었다. 위, 진 두 사람의 건의는 국가신용을 담보로 하여, 경사에서 가장 돈이 많은 1,20명의 상인들에게 돈을 빌리자는 것이다. 기준은 개략 조정에서 번진을 수복한 후 두 배로 갚는 것이다.
"차상"은 확실히 중당시기 경제를 부양하려는 의도에 배치된다. 위, 진 두 사람의 건의는 판탁지(判度支) 두우(杜佑)의 반대에 부닥친다.
두우는 이렇게 말한다. 현재 여러 곳에서 병력을 운용하는데 국가는 매월군비로 백만이상을 쓴다. 관리녹봉, 경제건설, 황실경비에도 모두 돈이 든다. 1,20명의 부유한 상인들에게 돈을 뜯어내더라도 기껏해야 국고를 몇달 채울 뿐이어서, 실질적으로 장기적인 대책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당덕종은 단지 '중흥'을 꿈꾸었고, 그는 도박을 걸기로 결심한다. 먼저 장안의 상인들에게서 돈을 뜯어내어 현재의 난관을 넘기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장안의 부유한 상인들에게 대거 돈을 뜯어냈고, 형벌이 엄혹했다. 사람들은 채찍을 버티지 못하고 자살까지 했다.
사후 통계에 따르면, 거둔 돈은 겨우 200만민가량으로 원래 예상분보다 훨씬 적었다. 그러나, 민심은 완전히 이반한다.
하북과 회서의 반군공세가 맹렬해지자, 공황에 빠진 당덕종은 완전히 어쩔 줄을 모른다. "차상"이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는 다시 각주에 "소금 의 두(斗) 당 가격을 백전씩 올리라"고 명한다. 동시에 경성의 백성들에 대한 약탈을 강화한다. 이런 상황하에서 당나라의 수도에 부동산세법인 "간가법(間架法)"이 등장한다.
장안성내의 건물을 등급을 나누어 '간가세'를 거둔다는 것이다. 사람이 집에 거주하기만 하면 장안성내에서 원칙적으로 모두 세금을 내야 한다. 여러 부동산을 가진 사람은 엄청난 세금을 내야하니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장안의 백성들이 숨기고 보고하지 않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간가법이 나오는 날부터 당덕종은 호부의 관리를 파견하여 모든 백성집의 건물면적을 조사하게 하여, 부동산세액을 확정한다. 만일 고의로 거짓보고를 하면, 1간당 곤장60대를 때리고, 고발한 자의 말이 맞으면 상금 50관을 고발자에게 내렸다.
동시에 정부에서는 법령을 반포하여 백성들에게 "거래세"를 내도록 했다. 이익 1민당 50전을 내는 것이다. 만일 세금을 회피하면, 100전당 곤장 60대, 벌금 2천을 과했다. 그리고 고발자의 경우 그의 말이 사실로 확인되면 상금 1만을 내린다.
그러나, 이런 조치들로는 만당경제, 정치위기를 해결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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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국고는 이미 바닥을 드러냈다. 경원병(涇原兵)이 다시 전장으로 나아가 죽었다. 그리하여 갈등이 폭발하게 된다.
건중4년(783년) 겨울, 서북에서 온 5천의 경원병이 명을 받아 강회로 출정한다. 정식 전투를 개시하기도 전에, 이 경원병은 먼저 장안으로 달려가 상부터 요구한다. 이건 원래 당군의 신제도하에서의 일종의 거래이다. 그러나 예상외로 경원병은 장안에서 한푼의 상도 받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모욕을 당한다.
원래 경원병이 입경하여 상을 요구하였을때, 당덕종은 경조윤 왕굉(王翝)에게 상을 내리라고 명했다. 그러나 왕굉은 원래 무인들을 멸시했고, 자기의 판단에 따라 형편없는 쌀과 소금에 절인 야채등 값싼 물건들을 가지고 군영으로 가서 위문행세만 냈다.
경원병이 출발하여 장안에 도착했을 때, 군량 속에 고기가 전혀 들어있지 않은 것을 보고 불만정서가 크게 일어난다. 혼란중 누군가 황실내고(內庫)를 털자고 주장한다. 선동적인 발언에 경원병의 반감은 더욱 커지고, 분노한 병사들은 창끝을 거꾸로 겨누어 황궁으로 진격한다.
경원병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에 당덕종은 분노하여 급히 금군으로 하여금 방어하게 한다.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결국 5천 경원병의 맹렬한 공격하에, 장안을 점령당하고, 당덕종은 당현종, 당대종이후 세번째로 장안을 버리고 도망치는 황제가 된다.
경원병이 황궁으로 쳐들어갔을 때, 당덕종은 이미 봉천(奉天, 섬서성 건현)까지 도망친다. 반군은 우두머리가 없었다. 궁중의 재물을 약탈하면서 그들은 나중의 일이 걱정되었다. 반란을 중도에 그만두면 결과가 참혹해진다. 그들은 이미 경사를 점거하고, 황제를 쫓아냈다. 만일 철저히 반란을 계속하여 '사진'과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지 않으면 화근이 자신의 가족들에게도 미치고, 죽어도 온전히 시신을 보존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리하여, 약탈이 지난 후 이 경원병은 절도사 요영언(姚令言)의 지휘하에, '기왕' 주도의 형이자 당시 장안에 거주하던 태위 주자(朱泚)를 주군으로 모시고 장안의 숙위를 장악한다.
주자는 원래 야심이 큰 인물이다. 경원반군이 찾아오자, 그는 기쁜 기색을 나타낸다. 그러나, 주자가 입조했을 때 겨우 3천병력을 데려왔는데, 지금 반란을 일으킨 경원군 5천장병까지 더하게 되더라도 합쳐서 1만을 넘지 못한다. 당덕종이 황제의 위세를 이용하여 장안을 리모트콘트롤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주자는 경원반군의 수령이 된 후, 바로 명을 내려 장안성을 봉쇄한다. 그리고 왕조교체를 선언한다. 자칭 대진황제(大秦皇帝)에 오른다. 그리고 봉천으로 도망쳐 숨어버린 당덕종과 분정항례(分庭抗禮)한다. 역사에서 "주자의 난(朱泚之亂)"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장안이 함락되고, 황제는 도망쳤다. 이는 아직 하북과 강회전선에서 반란평정을 진행하고 있던 당군에 엄청난 소식이었다. 봉천의 황제와 신하들이 전전긍긍하며 보내고 있을 때, 남쪽의 이희열은 연이어 양성, 변주를 함락시키고, 중원에 진주한다. 주자가 황제를 칭하는 것을 보고 이희열도 똑같이 한다. 스스로 초제(楚帝)에 오른다.
이제 이 '삭번'으로 인해 일어난 반란과정에서 4명이 왕을 칭하고, 2명이 황제를 칭한다. 즉, 주도는 기왕, 왕무준은 조왕, 전열은 위왕, 이납은 제왕, 주자는 대진황제, 이희열은 초제를 칭한다. 역사에서는 "이제사왕의 난(二帝四王之亂)"이라 칭한다.
봉천의 곤경을 해소시키기 위해, 당덕종은 아직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이성(李晟), 이회광(李懷光), 마수(馬燧)등을 자신의 곁으로 불러, 신책군, 삭방군, 하동군의 협력으로 국면을 뒤집고자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늘이 당을 돕는다고 여길 때, 황제를 구하러 가던 군대내에서 다시 문제가 터진다.
원인은 이회광이 당덕종의 주변에 간신이 너무 많다는 것을 못마땅해 한 것이다. 그리하여 황제에게 현신을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할 것을 권한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이회광은 성격이 거칠고 고집스럽다. 가는 길에 여러번 노기(盧杞), 조찬(趙贊), 백지정(白志貞)은 모두 간신이라고 말한다. 또한 "천하가 혼란스러워진 것은 모두 이 자들 때문이다. 내가 황상을 만나면 마땅히 이들을 주살하라고 청할 것이다." 노기, 조찬, 백지정은 당덕종의 심복이다. 이회광이 전쟁의 책임을 자신들에게 돌리는 것을 보자, 겁을 먹는다. 이회광의 삭방군은 회군도중 주자를 격패하고, 봉천으로 가서 황제를 직접 배알할 것을 청한다. 노기는 당덕종에게 건의하여, 이회광으로 하여금 승기를 잡아 추격하여 장안을 취하도록 하고, 봉천으로 오지 못하게 한다.
이회광은 본래 반란을 평정한 신하이다. 당덕종의 위기를 해소시켜주었다. 그러나 황제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다. 그는 내심으로 분개했지만, 이를 폴 길이 없었다. 당덕종의 명령을 받은 그는 홧김에 고의로 병력을 노점(魯店, 지금의 섬서성 건현의 동남쪽)으로 이끌고 가서, 행군의 속도를 늦춘다. 이를 통해 불만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회광을 다독이기 위해, 당덕종은 할 수 없이 노기, 조찬, 백지정 3명의 좌천시켜 내려보낸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이회광의 권세를 강화시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삭방군은 비록 일찌기 곽자의의 지휘하에 '재조대당(再造大唐)"의 휘황한 전적이 있지만, 결국 삭방군은 경원군과 다를 바 없다. 지방의 잡패군인 것이다. 황제가 보기에 신책군(神策軍)만이 천자의 조아(爪牙)이고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군대이다. 그리하여 기분이 나빠진 당덕종은 이성을 이용하여 이회광을 타격하고, 삭방군을 견제한다. 그런 방법으로 당나라조정에 대한 군사위협을 감소시킨다.
서로 속고 속이는 조정의 투쟁과정에서 이회광은 결국 어쩔 수 없이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장안을 수복하는 것은 당덕종의 망상이 되어버린다.
6
하삭3진이 반란을 일으킨 때부터, 짧은 3,4년의 기간내에 천하의 번진들중 능력있는 자는 모두 반란을 일으킨다. 어찌할 도리가 없어진 당덕종은 그저 신하들에게 방법을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기실 그의 주변에는 간신도 있었지만, 좋은 대신도 적지 않았다. 한림학사 육지(陸贄)는 이런 의견을 내놓는다: "지금 도적이 천하에 가득하니 마땅히 '통자구회(痛自咎悔)'함으로써 백성들의 마음을 뭉직여야 한다."
당덕종의 "통자구회"는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 죄기조(罪己詔, 황제가 자신에게 죄가 있다는 조서를 만들어 공표하는 것)를 내려야 한다.
편집증적 성격의 황제가 스스로가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것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평상시라면 육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바로 끌고가서 목을 베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당덕종에게 이미 예전같은 오기는 없었다. 육지의 권유에 따라 자신이 반성문을 씀으로서 국면을 뒤집을 수 있다면, 체면을 조금 잃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기게 된다.
그리하여, 육지가 초안한 <죄기조>는 당덕종이 고개를 숙이고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는 아주 진지하다.
"소자(小子)는 구덕술사(懼德不嗣)하여 망감태황(罔敢怠荒)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깊은 궁궐 속에서 자라다보니,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는 어두어서, 적폐에 쉽게 빠지고, 편안하게 지내는데 안주하고 위기를 잊어, 농사의 어려움을 알지 못하고, 병사의 노고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다. 그리하여 은덕이 아래(백성)에 미치지 못했고, 백성들의 뜻을 위(황제)에서 알지 못했다. 이렇게 간극이 있다보니 사람들도 의심을 갖게 된다. 스스로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고 군대를 일으켜 사방을 토벌하고, 천리에 물자를 보내고, 수레와 말을 보내면서 원근이 소란스러웠다. 물자를 보내고 받느라고 백성들이 모두 고생했다. 혹은 하루에도 몇번씩 전투를 하고, 혹은 해가 지나도록 갑옷을 벗지 못했다."
당연히 황제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육지가 보기에 첫걸음에 불과했다.
'이제사왕'으로 하여금 군대를 거두게 하려면,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번 <죄기조>에서 육지는 먼저 당대종을 대신하여 주자, 왕무준, 전열, 이납 및 이희열의 죄행을 사면한다. 그후 경원군이 주자를 멀리한다면 잘못을 묻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외에 <죄기조>가 반포되면서, 맥전(陌錢)외에 간가세등 일련의 잡세를 모조리 폐지하고,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해준다.
모든 것은 육지가 생각했던 대로 진행된다. <죄기조>가 반포되자, '이제사왕'은 즉시 내부적으로 분열된다. 왕무준, 이납, 전열의 3명은 귀순을 표시한다. 오직 주도는 형 주자의 일 때문에 아직도 주씨왕조의 꿈을 계속 꾸고 있었다.
흥원원년(784년) 육월, 혼감(渾瑊), 이성등 장수들의 공격하에, 주차는 패배하여 사망하고, 장안은 다시 대당이 되찾는다. 칠월, 근 십개월간 떠나있던 당덕종이 결국 다시 그의 대명궁으로 되돌아온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백의기사(白衣奇士)" 이필(李泌)에 관한 것이다. 당덕종은 토번의 힘을 빌어 즉 외부세력과 연합하여 번진을 소탕할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토번으로 하여금 대당을 침식할 기회를 준 셈이 되었다. 주자반란이 기본적으로 평정된 후, 토번은 대당에 안서(安西) 북정(北庭)의 두 곳을 내달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병력을 출동시켜 농우(隴右), 하서(河西) 일대를 점령한다. 이런 위난의 순간에, 당덕종은 일찌기 조부를 도와 대당을 구해주었지만, 지방으로 쫓아낸 사람을 떠올린다. 그는 급히 사람을 보내 이필을 부른다.
이때, 일찌기 대당신동(大唐神童)으로 불리던 이필은 이미 환갑을 넘겼다. 비록 두 눈이 글자도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마음 속의 모략은 여전히 완숙했다. 이필의 업무처리상의 편의를 위하여 당덕종은 이필에게 "일치서성이후대(日値西省以候對)"를 명한다. 이필에게 사실상 재상의 권한을 준 셈이다. 그러나 이필은 취임하자마자, 바로 당덕종이 준비한 영토를 토번에 할양하는 구상을 부결시킨다.
그는 말했다. 두 곳의 요새를 토번이 가져가면, 관중은 더 이상 지켜낼 험준한 요새가 없다. 장안이 더욱 위험해질 것이다. 하물며, 북정, 안서는 모두 군사요충지인데, 설사 황제가 국토를 지켜온 장병의 공을 생각지 않더라도, 두 땅을 넘겨주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야 하는 여러 장병들은 아마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고, 분명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므로, 영토할양은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이필의 견해에 따르면, 대당은 내부적으로 번진이 있고, 외부에는 토번이 있는데, 마땅히 더욱 큰 시야를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옛날 당현종이 바둑을 둘 때와 마찬가지로, 이필의 마음 속에는 대당도 좋고, 토번도 좋지만 모두 바둑판 위의 바둑돌에 불과하다. 만일 잘 운용하면, 판을 뒤집을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다. 그가 제안한 책략은 "북으로 회흘과 연합하고, 서로 대식과 화합하고, 남으로 남조, 천축과 연결하여, 함께 토번을 제압한다"는 것이다(北聯回紇, 西和大食, 南結南詔天竺, 共制吐藩)
토번은 대당과 국경선을 접하고 있는 외에, 북으로는 회흘과 이웃하고 있고, 서로는 흑의대식(아랍제국)과 붙어 있으며, 남으로는 소국 남조, 천축(인도)등과 붙어 있다. 복잡한 지연정치속에서 토번은 이들 국가의 발전공간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막아온 것이다. 특히 북쪽의 회흘은 이때 3,4대 칸을 내려오면서 영토를 확장할 좋은 시기였다. 다른 나라의 영토를 집어삼키는 일은 회흘로서는 가장 원하는 일이다. 그리고 대당황제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회흘의 재상 돈막하(頓莫賀)는 전임 모우칸(牟羽可汗)의 위치를 찬탈할 때, 특별히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칭신을 허용해달라고 청한다. 그러므로 회흘과의 연합은 문제가 없어졌다.
정원3년(787년), 대당의 함안공주(咸安公主)가 정식으로 돈막하에게 시집간다. 동시에 돈막하를 "장수천친가한(長壽天親可汗)"으로 책봉한다. 성의를 표시하기 위하여 돈막하도 대당황제에게 글을 올려, "예전에는 형제였는데, 지금은 장인사위관계이니 절반은 아들이다. 만일 토번이 근심스럽다면 아들로서 마땅이 부친을 위해 토번을 제거하겠다."
이필의 협조하에, 대당은 다시 연이어 남조, 천축, 흑의대식등 토번의 이웃나라들과 동맹협의를 달성한다. 4개국이 토번을 나누어갖기로 한다. 이때부터, 토번의 국력은 급전직하한다. 사방에서 전쟁이 발발하여, 이를 막아내느라 피로에 지쳤다. 더 이상 대당의 땅을 침범할 생각은 할 수 없게 된다. 여러 해가 지난 후, 토번은 사방세력의 포위협공하에 갈수록 약화되고, 강국패주의 지위를 철저히 상실해버리게 된다.
다만, 이런 국면을 이필은 직접 보지 못한다. 이 전략을 내놓은지 2년후인 정원5년(789년), 일찌기 네번 출산하여 세번 대당을 구한 '구시재상(救時宰相)' 이필이 장안에서 사망한다. 향년 68세였다. 비록 그가 평생 출도하여 관직에 있던 기간은 짧았지만, 매번 등장했을 때마다 국면을 반전시켰다.
대당을 위해 바둑돌을 놓았던 백의기인이 떠났다. 번진을 없애기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고 맹세했던 황제는 '이제사왕의 난'을 겪은 후 결국 위축되어버린다.
인생의 후반기에, 천하번진이 어떻게 돌아가더라도 당덕종은 이제 더 이상 신경쓰지 않았다. 묵묵히 받아들일 뿐이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여러번 경원군이 반기를 들었던 그 날의 그 무섭고 놀라운 장면이 떠올랐다: 반란병이 이미 쇄도해 들어오고 있다. 텅빈 대전내에 그는 급히 호위할 자들을 불렀지만, 신책금군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위기의 순간에 오직 두문장(竇文場), 곽선명(郭仙鳴)의 두 환관이 백여명의 내시를 데리고 황제를 호송하여 장안을 빠져나갔을 뿐이다.
이번에 환관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한 경력은 그의 기억속에 계속하여 떠올랐다. 그리고 그의 치군(治軍)이념을 철저히 바꿔버린다. 군인은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천직이다. 그런데 금군이 황제을 호위하지 않으면, 잘못은 병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장군에 있다. 장군이 말을 듣지 않지만, 환관은 말을 듣는다. 그렇다면 말을 잘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목숨을 구해줄 금군을 장악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말년의 당덕종은 분명 자신이 바꾼 금군체계에 만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역사에서 환관의 굴기와 권력남용을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모든 쓴 열매는 나중에 그의 자손들이 맛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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