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기억군도(記憶群島)
당나라때의 4대여시인(女詩人)인 이야(李冶), 설도(薛濤), 어현기(魚玄機), 유채춘(劉采春)중에서 앞의 3명은 모두 도고(道姑)이다. 당나라의 근 200명공주중에서 고양공주(高陽公主), 태평공주(太平公主), 화양공주(華陽公主), 안강공주(安康公主)를 포함한 15명이 도고로 지낸 적이 있다. 더욱 신기한 것은 <대당육전(大唐六典)>에 이런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무릇 천하의 도관(道觀)은 모두 1,687개소인데, 1,137개소는 도사(道士)이고, 550개소는 여도사(女道士)이다." 비록 이 숫자가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어느 정도 당나라때 도고가 엄청난 수량으로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정도였다는 것은 알 수 있다.
도교(道敎)는 중국의 전통종교이고, 한(漢)나라때부터 생겨났으며, 당(唐)나라때 전성기를 누렸으며, 한때 유교, 불교를 뛰어넘는 혁혁한 지위를 누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당시 사회에서 도사(도고)가 되는 붐이 일어난다. 이런 분위기하에서 많은 당나라때의 여자들은 도문에 몸을 담게 된다.
당나라때 일어난 "도사붐"으로 남북조시기의 "불교붐"은 일거에 무너진다. 도교라는 본토종교는 불교라는 외래종교를 완전히 밀어내서 거의 자리를 잡지 못하게 된다. 당나라때는 도고가 되는 것이 유행이었다. 현대의 많은 여성들이 부호집안에 시집가기를 원하는 것처럼, 당시에는 위로는 귀족의 딸로부터, 아래로는 비첩에 이르기까지 도고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부호집안에 시집간 것이나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 당나라때는 중국의 고대여성들의 대문불출(大門不出), 이문불매(二門不邁)의 관습을 깨버렸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이유로 인하여 서로 다른 신분의 당나라여성들은 전통여성의 이미지를 버리고, 속속 도고가 된 것일까?
한나라때부터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다. 문벌사족 심지어 황제도 불교가 그들의 통치에 유리하다는 것을 알아 극력 불교를 보급한다. 그리고 한나라가 멸망한 후, 삼국, 위진남북조의 300여년간은 전쟁이 계속되어, 아침 저녁으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생의 행복을 추구하는 불교를 신봉했고, 절로 달려가 평안을 구했다.
그러나, 불교는 속세를 떠나는 교파이다. 속세를 떠난다는 것은 인간세상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결과 남북조후기, 전란이 빈발하자, 사람들은 속속 불교사원으로 가서 출가한다. 6세기초의 북제(北齊)시기에, 북제 한 나라에만 불교사원이 4만여개에 이른다. 승려는 200만명이었다. 동시에 남방의 양(梁)나라의 양무제(梁武帝)는 황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기까지 한다. 이를 보면 당시 불교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가지 중요한 점은 바로 불교사원은 국가에 세금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전답을 가지고, 국가의 가혹한 세금을 피해 도망친 백성들을 비호해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라에서는 세금도 거두지 못하게 되고, 전투를 할 병사로 데려가지도 못하게 된다. 비록 일부 국가에서 멸불정책을 써서 승려의 강제환속을 명령하고, 불교사원의 전답을 국고에 넣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불교는 그의 비호속성으로 인하여 다시 흥성하게 된다.
당나라초기, 이씨가족은 왕조통치의 정통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한편으로 불교를 깍아내리고,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조상이라는 노자(老子, 성이 당나라황제의 성과 같은 이씨임)를 받들어 도교를 국교로 숭상한다. 당고조(唐高祖) 이연(李淵),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과 당고종(唐高宗) 이치(李治)는 극력 도교를 지원하고 도관을 짓고, 태상노군(太上老君)을 추존한다. 동시에 경제적으로 도관에 전답을 내리고, 병역을 면제해주는 우대조치를 취한다. 심지어 <노자>, <장자>, <남화경(南華經)>을 과거시험의 내용중 하나로 넣었다.
비록, 무측천이 측위한 후 한때 불교를 중시하기도 했지만, 당중종, 당예종이 복국한 후에는 황권이 다시 이씨에게 돌아왔다는 것을 드러내고, 무주(武周, 무측천의 나라국호는 주였음)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도교를 강경하게 제창한다.
실제로, 당나라정권이 비교적 안정된 후에는 도교가 계승의 합법성을 만들어내는 정치적도구로서의 기능이 이미 약화된다. 그러나 군주의 장생불사, 태평성세의 욕망은 게속하여 도교가 발전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입사사차기(廿四史箚記)>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당헌종, 당목종, 당경종과 당무종등의 황제는 모두 방술(方術)을 믿었고, 단약(丹藥)을 잘못 복용하여 목숨을 잃었다. 이런 사회환경하에서, 윗사람이 좋아하면 아랫사람들도 따라하는 법이다. "여도사붐"이 나타난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외에, 도교는 다른 종교의 여성관과 다르다는 점도 당나라때 부녀들이 도고가 되는 것을 좋아한 이유이기도 하다. 도가사상을 주류로 하는 도가는 일종의 주음철학(主陰哲學)이다. <노자>에는 이런 말이 있다: "현빈지문(玄牝之門), 시위천지근(是謂天地根), 면면약존(綿綿約存), 용지불근(用之不勤)"(현묘한 암컷의 문은 천지의 뿌리이다. 면면히 이어져서 항상 존재하니 아무리 써도 힘들지 않다). 즉 만물의 근원은 모성의 역량이라는 것이다. 도교에서 만든 신선체계에서 여성도 마찬가지로 득도하여 신선이 될 수 있고, 사람들의 숭배를 받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서왕모(西王母)가 있다. 이는 교의상으로 여성을 받아들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위에서 말한 것은 그저 큰 배경적인 설명이다. 아래에서는 전형적으로 도고가 된 인물의 경우를 살펴 자세히 그들 개기인이 어떤 상황하에서 어떤 이유로 도고가 되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첫번째 경우, 개인의 활동공간을 확대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추구하기 위하여.
여기의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이야(李冶)라고 할 수 있다. 이야는 성당에서 중당시기(18세기중역)의 저명한 시인이고, 당나라 4대여시인중 한명이다. 6살 때, 그녀는 장미를 보고 시를 한 수 짓는데, 거기에 이런 두 구절이 있었다: "경시미가각(經時未架却), 심서난종횡(心緖亂縱橫)"(오랫동안 받침대를 해주지 않아서, 가지와 꽃이 마구잡이로 어지럽게 되어 있구나). 그녀의 부친은 그녀가 쓴 시의 "架却"이 "嫁却"과 발음이 같아서, 막 6살된 그녀가 이미 규중부녀의 애환을 알고 있으니 장래 분명히 실절(失節)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얼마후 부친은 그녀를 도관에 보내어 그녀나 수신양성(修身養性)하기를 바랐다.
도교에 출가한 그녀는 조용히 도를 닦지 않고, 계속하여 글을 쓰는데 주력했다. 그녀는 성격이 낭만적이고, 장난을 좋아하는데다가 금(琴)도 잘 타고, 시도 잘 지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육우(陸羽), 석교연(釋皎然), 주방(朱放), 한규(韓揆), 염백균(閻伯鈞), 소숙자(蕭淑子)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그녀의 일부 시, 예를 들어 <기주방(寄朱放)>, <송염이십육부섬현(送閻二十六赴剡縣)>등은 여성작가의 수줍음같은 것은 전혀 없고, 남녀간의 사귐을 얘기하고 있다. 이는 그이후 천년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경우였다.
나중에 당현종이 그녀의 시재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녀를 경성으로 부른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그녀가 늙었을 때이고, 저명한 화도(花都) 광릉(廣陵)에 몸을 담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황명을 받았으니 북상할 수밖에 없었다. 아쉽게도 784년, 반란을 일으킨 장수 주자(朱泚)에게 시를 써준 것으로 인하여, 당덕종의 명에 의해 몽둥이로 맞아 죽는다.
기실, 이야같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당시 당나라는 개방적이었고, 많은 여성들은 자신을 표현할 기회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도 당나라때 여성의 시사와 그녀들에 관해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다.
두번째 경우 보면, 어른을 위하여 복을 빌기 위함이다. 다만, 이는 대부분의 경우 겉으로 드러난 이유일 뿐이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경우는 태평공주이다. 태평공주는 더 이상 소개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어쨌든 태평공주가 8살때, 이미 사망한 외조모 영국부인(榮國夫人) 양씨(楊氏)의 명복을 빈다는 명목으로 그녀는 출가하여 도고가 되었다. 그이후 그녀의 공주이름인 태평은 기실 그녀의 도호(道號)이다.
출가했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계속하여 궁중에 머물렀다. 토번(吐蕃)의 사신이 와서 직접 태평공주의 이름을 직접 찍어서 청혼했을 때까지. 이치와 무측천은 사랑하는 딸을 먼 곳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직접 토번의 요구를 거절하기도 힘들었다. 그리하여 태평관(太平觀)을 지어 그녀를 보내고, 정식으로 출가시킨다. 그리고 공주는 이미 출가했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화친을 회피한다. 그리고 3년후 태평공주는 환속한다.
기실 당나라의 공주들 대부분은 이런 목적으로 도고가 되었다. 다만 우리가 역사서를 뒤져보면 바로 발견할 수 있다. 이들 도고가 된 공주들은 수양이 목적이 아니었고, 그녀들은 왕왕 놀러다녔다. 그리하여 도고로 있는 동안 쓴 비용이 궁중에 있을 때보다 훨씬 많았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출가하여 도고가 된 경력을 영광으로 여기고 향후 권리나 더욱 많은 재물을 획득하기 위한 거리로 삼았다.
세번째 경우는 비교적 흔한 경우로, 혼인생활에서 좌절을 맛보거나, 남편이 죽은 경우에 도문에 몸을 의탁하는 것이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는 드라마 <호묘전>의 주인공중 하나이자 중국사대미녀중 하나인 양옥환(楊玉環, 양귀비)가 바로 그런 전형적인 경우이다.
양옥환은 16살때 당현종의 셋째아들 수왕(壽王)의 비(妃)가 된다. 다만 나중에 당현종의 눈에 들어 그녀를 반드시 취하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윤리도덕문제로 양옥환에게 도관으로 가서 수행하도록 한다. 명목상으로는 당현종의 모친인 두태후의 복을 빌기 위한 것이고, 기간은 5년이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느낌은 아주 익숙하지 않은가? 기실 당시 당현종의 조상인 당고종도 써먹은 방법이다. 단지 사람이 양옥환이 아니라 무측천이고, 간 곳이 도관이 아니라 사묘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보기에 당나라는 이런 습속이 계속 전해져 내려왔던 것같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일은 당나라사람들이 이를 담담하게 보고, 통상적인 일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다른 왕조때처럼 큰 파란을 불러오거나 하지 않았다.
5년이후, 당현종은 당당하게 양옥환을 귀비에 봉한다. 그후,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이야기는 시작된다.
실제로, 이상의 세 가지 가장 흔하게 도관에 들어가 도고가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도 여성이 병에 들어 도관에 들어가 종교의 역량과 도교의 양생비법으로 체질을 증강시켜 질병의 고통을 벗어나고자 한 경우도 있고, 어떤 여성은 생활이 힘들어 도교에 들어가서 몸의 의탁한 경우도 있다; 또한 가혹한 세금을 피하여 도망쳐서 도관에 들어간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은 비녀출신이라 자신의 주인이 도관에 들어감에 따라 따라 들어간 경우도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들 여인들이 도관에 들어간 것은 상당한 정도로 어쩔 수 없었고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볼 때, 당나라때 도고는 도관내에서 왕왕 사치방종하며, 자유롭게게 살았다고 여긴다. 일부 문인묵객은 왕왕 그녀들을 당나라때 부녀의 지위가 상승했고, 속박이 줄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세속사회가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 어현기같은 풍류여성들이나 도교에 귀의한 후 자유로운 곤간을 얻었을 뿐이다. 혹은 일부 남자들은 자신의 사적인 욕심으로 자신의 자녀 혹은 애인을 도관에 들어가게 함으로써, 자신의 명성을 지킨 것이다. 당연히 도관에 들어가 수절한 여성들은 예법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이를 보면 남성은 여전히 당시 사회를 주도했고, 법력이 무궁하고 사람의 존경을 받는 여신은 그저 사람들의 환상 속에나 존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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